[mix&talk]
[민규동] “장성기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2012-05-18
글 : 강병진
사진 : 오계옥
<내 아내의 모든 것> 민규동 감독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을 연출할 당시, 민규동 감독은 자주 트윗을 날렸다. 현장에서 느낀 상념을 전하거나, 거장들이 남긴 말을 인용했다. 하지만 <내 아내의 모든 것>을 연출할 때, 그의 트윗은 조용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이나 불안과 외로움을 공유할 친구가 필요해서 하는 것 같다. 그런데 결국 그 안에도 구원이 있는 것 같지는 않더라. 더이상 잘될 거다, 잘할 수 있다는 최면으로 버티기에는 한계가 온 것 같다. 이제 새로운 마약이 필요하다.” <내 아내의 모든 것>의 아내 연정인(임수정)도 외로움과 불안에서 도피시켜줄 마약을 찾는 여자다. 그의 마약은 ‘말’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아우르며 세상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네는 그녀의 화법은 남이 듣건 말건 어떻게 생각하건 말건 말을 던지는 SNS 시대의 대화와 닮아 있다. 아마도 민규동 감독은 연정인의 대사를 쓰는 동안 이미 1년치 트윗을 모두 날렸을 것이다. 개봉을 앞둔 그의 말투는 띄엄띄엄하면서 조근조근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이후 1년 만의 신작이다. 생각보다 빨리 나온 것 같다.
=그동안 워낙 충전을 많이 해서인지 이제는 좀 방전하고 싶다. (웃음) 다음에 찍을 영화, 과거에 준비했지만 아직 만들지 못한 영화에 대해 생각하는 게 에너지가 되더라. 물론 기쁨의 에너지는 아닌데, 나는 계속 더 싸워보고 싶은 것 같다.

-<내 아내의 모든 것>은 원작이 있다고 들었다.
=아르헨티나 영화다. 영어 제목으로는 <A Boyfriend for My Wife>인데, 영화로 보지는 못했다. 기획실 친구가 영화를 보면서 필사한 텍스트를 봤다. 처음에는 흥미가 안 생기더라. 아내와 이혼하고픈 남자가 아내에게 다른 남자를 붙여준다는 설정이나 접근 방식이 서구적인 담론으로 보였다. 그런데 한달 정도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내가 가진 이야기를 한국적인 이야기로 만들 수 있는 접점이 뭘까 생각하면서 여자의 외로움이나 불안, 피곤함을 떠올렸다. 요즘 나에게도 불안해, 피곤해, 이런 말들이 큰 화두인데, 그 맥락을 보니 할 만한 이야기가 있을 것 같더라.

-왜 외롭고 피곤한가.
=나만 그러고 사는 건가? (웃음) 어쨌든 많이 외롭다. 인생의 비밀도 조금 봤고, 생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도 확실히 느끼고 있다. 전작을 통해 씻김굿을 많이 해서 가벼워지기는 했다. 그 뒤로는 내 안의 욕구와 삶의 조건이 어떻게 맞물려 갈지 보이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더이상 판타지로도 자극이 안 생기더라.

-그런 화두를 어떻게 구체화했나. 연정인이란 캐릭터를 구축하는 과정에서도 중요한 고민이었을 것 같다.
=흔히 거짓 희망과 거짓 칭찬, 거짓 에너지로 버텨가는 게 있지 않나. 그런 순간적인 처방이 큰 의미가 없다는 깨달음이 중요했다. 누구나 그런 순간적인 처방을 원할 때가 있다. 한때는 자신의 매력에 대한 믿음으로 살았지만 어느샌가 그런 매력이 보이지 않는 거지. 그때 주변에서 그의 매력을 확인해줘야 하는데, 오히려 가장 가깝고 오래된 관계에서 그를 굳은살처럼 느끼곤 한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침묵과 소음에 관한 화두를 찾았다. 난 말이 별로 없고 싸우거나 힘겨울 때도 그냥 침묵을 지키는 편이다. 하지만 연정인은 말을 많이 하는 만큼의 에너지가 있다. 그런 에너지의 결을 다뤄보자는 순간에 이 인물을 사랑하기 시작한 것 같다.

-남편의 입장에서도 공감한 게 있지 않을까.
=남편 입장에서 보면 나는 반성문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웃음) 언제나 남자들이 문제다. 남자에게 여자는 선물 같다. 하지만 남자들이 가진 속성상 선물의 가치를 잘 모를 뿐만 아니라 상대를 외롭게 만든다. 그렇다고 해서 남자들에게 상대방의 매력을 잘 보라는 식의 강요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니다. 다만 상대의 외로움을 만드는 출발점이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극중의 두현(이선균)은 이기심 때문에 가장 밑바닥의 방식을 따르지 않나. 아내와 헤어지고 싶으면 솔직하게 말하거나 다른 사람을 찾는 방법도 있을 텐데, 나쁜 남자로 남고 싶지는 않은 거지. 그런 기질이 오히려 상대를 외롭게 하는 것 같다.

-류승룡이 연기한 장성기 캐릭터를 상상하는 과정도 쾌감이 있었을 것이다.
=일단 이름부터 고민했다. 장성기는 성기가 길다는 뜻이다. 류승룡은 아예 페니스 장이라고 했다. ‘양성기’도 생각했다. ‘양담배’처럼 붙였던 이름이다. (웃음) 장성기에는 여러 남자의 느낌을 더하려 했다. <하몽하몽>의 하비에르 바르뎀 같은 정력가부터 동양인으로는 양조위의 느낌이 있었으면 했고, <그리스인 조르바>의 앤서니 퀸까지 스펙트럼을 넓혔다. 무엇보다 관객이 보기에 폐부를 찌르는 유혹의 비수 같은 게 있어야 했다. 그게 과연 가능할까? 여러 고민을 하다가 50줄 정도 되는 리스트를 적어서 류승룡에게 카카오톡으로 보냈다. 미술팀을 포함해 여성 스탭들과 논의해서 나온 것들이었다. 테니스 선수의 팔뚝, 호나우두의 허벅지, 양조위의 눈썹, 이런 거다.

-연정인을 연기하는 임수정의 모습이 신선했다. 다른 캐릭터들보다 고민이 많았을 캐스팅으로 보였다.
=나로서는 오랫동안 짝사랑해온 배우였다. 이미 예전에도 여러 번 제안했다가 거절당했었다. (웃음) 주변의 반대가 심했다. 분명히 잘 맞아 보이지 않을뿐더러 임수정이 좋아할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으니까. 나는 그런 점 때문에 더 집착하고 확신을 가졌다. 수필름에서 <김종욱 찾기>를 만들면서 그녀를 옆에서 봤었다. 변화를 갈망하고 있다는 느낌을 확실히 읽었다. 연정인이 가진 인생의 우울함과 밑바닥의 지점들이 배우로서의 삶에도 있을 것 같더라. 한때는 사랑받는 배우였지만 나이가 먹어가면서 자기보다 더 젊고 예쁜 배우들이 나오고, 그때 내가 지금도 매력이 있나? 사람들이 나를 좋아할까? 하는 불안감을 갖게 될 테니까. 다른 한편으로는 임수정이 좀더 욕망을 갖는 여자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전작들을 보면 눈속에 욕망이 안 보이더라. 임수정도 만나자마자 “나는 이제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고 하더라.

-영화의 주된 배경이 강릉이다. 낙후된 주택가의 골목이나, 황태를 말리는 덕장이 나오는데 한국영화에서 강릉이 이만큼 많이 등장한 영화는 처음이 아닌가 싶다.
=평소 강릉에 대해 이중적인 느낌을 갖고 있었다. 과거 영화를 공부할 때도 어딘가 도망가고 싶으면 강릉을 가곤 했다. 나에게는 도피처고 쉼터였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척박하고 오지 같은 곳이었다. 판타지가 있으면서도 전혀 매력이 없는 거지. 그런 느낌이 연정인의 내면 풍경, 그리고 평범한 부부 관계의 내면과 비슷해 보였다.

-영화음악 때문인지 코미디 무성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도 있었다.
=내가 좀 안 웃기지 않나. 어떤 스타일의 코미디를 할까를 고민하면서 음악의 역할을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재미있는 코미디영화는 음악이 만드는 것 같더라. 음악이 충분한 내레이터가 되면 좋을 것 같았다. 나로서는 처음 해본 스타일이다. 할리우드의 코미디 무성영화들이 가진 음악은 인물의 행동, 신의 연결과 싱크가 맞아떨어진다. 이 영화에서도 신과 행동에 맞는 리듬의 음악을 생각했다.

-음악 때문이기도 하고, 장성기라는 캐릭터 때문이기도 하고, 연정인의 취향 때문이기도 한데, 상당히 다국적인 이미지들이 한 영화에 엮여 있다.
=이선균도 영화를 찍는 동안 한국영화 같지 않다고 하더라. 나 역시 처음부터 레퍼런스를 찾는 게 어려웠다. 시작은 우디 앨런 영화였다. 농담 같은 상황으로 오래된 관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떠올렸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경쾌하게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그런 속내를 밝히면 투자가 안되니까 얘기할 수 없겠더라. (웃음) 연정인과 장성기가 놀이공원에서 손잡고 뛰는 모습에서는 <쥴 앤 짐>처럼 클래식한 프랑스영화를 보고 싶기도 했고, 실제 임수정에게 마리온 코티아르의 관능미와 샬롯 갱스부르의 지성과 냉소를 이야기하기도 했다. 나름 전형적이지 않은 방식을 고민하면서 나온 결과다.

-아내인 홍지영 감독이 연출한 <키친>도 함께 이야기해볼 수 있는 영화가 아닐까? 홍지영 감독은 뭐라고 하던가.
=아직 못 봤다. 그런 대화는 나눈 적이 있다. 연정인에게 장성기는 일종의 뮤즈다.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고, 영감을 불러일으키니까. 나한테도 뮤즈가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뮤즈를 찾고 있고, 뮤즈를 찾아 떠날 수도 있고, 다시 돌아올 수도 있고, 그러니까 그런 줄로 알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러라고, 어떻게 하겠냐”고 그러더라. (웃음) 사실 우리 모두에게 장성기가 필요하다. 그의 핵심적인 무기는 ‘아, 그렇구나’란 대사다. 누군가 자신의 어려움을 털어놓을 때, 그에 대해 ‘아, 그렇구나’라고 하는 것 말이다. 일상에서는 어려운 말이다. 아무나 할 수 없다. 장성기는 그걸 연기할 수 있는 남자라서 가능한 거다.

-전작들과 다른 영화를 만들었다. 다음 작품에도 달라지는 게 있을까.
=내가 코미디를 한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의혹을 많이 품었던 것 같다. 다행히 이제는 내가 도전하는 것들에 대해 의혹들이 조금은 옅어질 것 같다. 지금까지도 그래왔지만 앞으로는 갈지자로 가는 것이 더 심해질 것 같다. 언제나 내가 원하는 영화를 원하는 순간에 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투덜댔는데, 이제는 이리저리 부딪히는 모습이 내 모습 같다. 다음 영화도 이상한 점프컷이 되지 않을까?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