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전영객잔]
[신전영객잔] 깨달음에 관한 슬픈 시가 있네
2012-05-24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은교라는 별을 사이에 둔 헐… 과 할!에 대해 당신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
<은교>

“첫사랑이 원래 잘 안되라고 첫사랑이지, 잘 되면 그게 첫사랑이냐, 마지막 사랑이지?” 이렇게 말한 것으로 보아 연애에 관한 한 만물박사로 행세한 <건축학개론>의 재수생 납뜩이는 정작 연애가 아닌 사랑에 관해서는 무지했던 것 같다. 마지막 사랑이라고 해서 다 잘되는 것이 아니다. 첫사랑에 관한 영화 <건축학개론>에 뒤이어 개봉한 마지막 사랑에 관한 영화 <은교>가 그걸 여실히 보여준다. <은교>의 70살 노시인 이적요는 17살 소녀 은교를 사랑하였으나 그 사랑은 잘되지 않았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사랑이었다. 이적요는 그 사랑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그를 따랐던 제자 서지우를 죽음에 빠뜨렸으며 결국 은교도 얻지 못했다. <은교>의 마지막 장면을 보건대 은교는 이승에서 꿋꿋하게 자라날 것이지만 이적요는 저승으로 쓸쓸히 돌아갈 것이다.

<은교>는 그렇게 늙음과 젊음 혹은 유한적 삶과 육체적 쇠락 또는 실패한 사랑에 관한 영화로 알려져왔다. 많은 평자들이 그 점을 지적하였으며 그것이 부정하기 힘든 이 영화의 큰 테마일 것이다. “너희 젊음이 너희의 노력으로 얻은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나의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라는 대사는 잊기조차 힘들다. 다만 지금은 그것들을 전부 수긍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다른 걸 떠올린다. “뾰족한 연필은 슬프다”고했던 이적요의 표현에 빗대어 말하자면, 지금까지 우리는 <은교>라는 연필이 얼마나 슬픈지 말해온 것 같다. 지금 이 자리에서는 <은교>라는 연필이 어떻게 슬퍼지는지 말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늙음과 젊음, 노년과 청춘이라는 잘 알려진 주제가 아닌, 잘 알려지지 않은 다른 변주의 테마를 말하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은밀한’ 그 변주의 테마가 <은교>에는 있다. 원작을 두고 만들어진 영화를 구태여 원작과 비교할 필요는 없다는 입장을 갖고 있지만 지금의 경우에는 영화의 그것들을 드러내기 위해 종종 원작과의 비교도 감내할 것이다. 은밀한 그 테마란 무엇인가. ‘헐…’과 ‘별’과 ‘할!’ 지금은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다.

헐…

“헐…”이라는 말은 영화 <은교>의 은교가 가르쳐준 중요한 말이다. 헐… 이 처음 등장한 건 이적요가 은교를 위해 스팀 걸레를 사주었을 때다. 그때 은교가 헐… 이라고 한다. 이적요가 그 뜻을 묻자 은교는 “매우 고맙다는 뜻”이라고 얼버무린다. 설명하기 어렵고 말해줘도 모를 거라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이적요가 우연히 은교의 바지 속을 엿본 다음 당황하여 말리고 있던 은교의 교복을 떨어뜨렸을 때에도, 그걸 모르고 은교는 또 한번 이적요를 향해 헐… 이라고 말한다. “옷을 떨어뜨려 고마운 게냐?” 의아한 이적요는 그렇게 말했지만 실제로 헐… 이 고맙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에 이 대사는 웃음을 자아낸다. 이적요는 아직 헐… 이 변화무쌍하게 쓰일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카페의 종업원이 음료를 내왔을 때 그는 고맙다는 말 대신 헐… 이라고 말하여 다시 한번 우리와 은교의 웃음을 자아낸다. 그제야 은교는 “헐… 은 요즘애들이 쓰는 말”이라며 “황당하거나 신기하거나 놀랍거나 새로울 때” 쓴다고 알려준다.

영화 <은교>에서 가장 황당하거나 신기하거나 놀랍거나 새로운 것은 이적요로 분한 박해일이다. 박해일-이적요는 한마디로 헐… 이다. 이 말이 오해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은교가 이미 알려준 것과 같이 헐… 은 나쁘거나 좋다는 단정의 범주에 결코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박해일을 이적요로 캐스팅한 건 탁월한 선택이다. 그는 동시대의 한국 남자배우 중 누구와 견주더라도 독특한 자기만의 인장을 하나 갖고 있다. 그가 자주 철없거나 귀여운 청년 또는 순수한 아이 또는 그 역의 이미지로서 순수해 보이지만 실은 살인귀(<살인의 추억>)라는 인물로 등장하는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그의 자태의 기본에는 소년성이 깃들어 있다. 그 소년성이 그를 소년과 청년으로 혹은 그 역효과를 위하여 살인자로 그리고 기어이 노인의 역할로 이끌었을 것이다.

그런 박해일의 노인 분장이 표가 날 정도로 어색하다거나 박해일의 연기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적 의견들이 있는데 실제로 그렇다 할지라도 이 의견은 영화 <은교>에 관한 핵심을 벗어난 것으로 느껴진다. 비교를 거쳐보자. 정지우가 각본을 썼던 영화 <이끼>에서 마을의 촌장 역을 맡은 정재영은 실제 나이를 훨씬 뛰어넘는 역할을 했고 분장도 과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때 그의 연기와 분장은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은교>의 연기와 분장이 문제가 되는 건 전적으로 정재영과 박해일의 연기력이 빚어낸 차이 때문이었을까? 혹은 분장의 기술력 차이 때문이었을까? 우리는 이런 차이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정재영이 연기한 촌장이 문제가 되지 않은 건 대부분의 관객이 <이끼>의 그 촌장을 ‘장르적 캐릭터’로 용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은교>의 박해일-이적요라는 인물의 완성도에 비판적 의견을 보내는 관객은 지금 그러한 장르적 캐릭터가 아니라 다른 것이 박해일-이적요에게 있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는 중이다. 그건 무엇일까. 그들은 박해일은 얼마나 이적요로 변신해야 하는가 하는 ‘재현’의 정확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이 비판과 요구가 나는 무용하다고 느낀다. 박해일-이적요의 몸은 재현으로서의 몸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의 표현으로서의 몸이기 때문이다. 재현이 아니라 표현으로서의 몸? 감독 정지우도 박해일-이적요에게서 중요한 것은 몸이라고 인정하였으나, 그가 그렇게 말할 때의 몸이란 얼마나 정확하게 재현되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충분히 느껴지도록 하는가 하는 점에 핵심이 있을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얼마나 노인처럼 정확히 재현해낼 것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여 노인됨을 느낄 수 있게 할 것인가 하는 점이 핵심인 그런 몸.

노인됨을 가리키는 저 흔한 말이 있다. 몸은 늙었어도 마음은 청춘. 그 흔한 진리를 영화는 어떻게 느끼게 할 것인가. 그걸 위해 영화 <은교>는 은유라는 표현을 선택한다. 은유의 상(相)/(像)이 박해일-이적요의 몸이다. 박해일-이적요는 늙은 육신에 관한 재현의 몸이 아니라 늙은 육신에 관한 은유의 몸이다. 때문에 소년성을 갖춘 배우가 노년성이라는 가면을 썼을 때 거기에 박해일과 이적요 사이의 불일치는 도리어 매력이 된다. 우리는 박해일-이적요를 늙음에 관한 은유로 느껴야지 재현적 성과로 가늠해서는 안된다. 박해일-이적요 사이에 낀 그 주름의 중첩을 보았을 때, 이적요로 분한 박해일의 어떠한 상(相)/(像)을 보았을 때, 이승과 저승처럼 먼 그 마음과 몸의 거리를 느끼며 황당하거나 놀랍거나 신기하거나 새로워서 우리는 헐… 하고 반응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박범신의 원작 소설 <은교>에는 그와 같은 헐… 이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은어들이 등장한다. 절친, 열폭, 볼매, 또는 앙영하세요(안녕하세요의 외계어)가 등장한다. 하지만 그건 전부 은교의 세대를 혹은 은교 세대의 세태를 그들의 어법 또는 신조어의 쓰임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절친, 열폭, 볼매 등 청소년기의 세속적 비어들은 전부 제외되고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오로지 헐… 이라는 말에만 초점이 맞춰진다. 그때 헐… 은 세대의 환경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라 영화적 구조와 인물들간의 운명적 관계에 연루되어 있는 은유로서의 표현이며 은어다. 말하자면 무엇보다 헐… 은 열폭이나 볼매 같은 말과 질적으로 다른데, 헐… 은 단순하게 줄임말도 아니고 외계말의 적당한 비틀기로서의 상상도 아니다. 헐… 은 말 이전의 말이며 차라리 변화무쌍한 언어적 상(相)/(像)이며 그래서 이미지로서의 말이다. 그 헐… 이 있는가 없는가, 그것이 영화 <은교>의 짝을 정해준다. 은교와 이적요에게는 있지만 서지우에게는 없는 것이 헐… 이다.

그렇다면 이적요의 헐… 은 무엇인가? 이적요에게는 은교의 헐… 에 가까운 그것, 곧 시어가 있다. 은교가 이적요에게 시란 무엇인지를 배웠다는 사실을 우린 알고 있다. 은교는 이적요에게 세상에서 가장 최첨단의 세속화된 말 혹은 자기 세대의 은어를 알려주고 이적요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말 혹은 시대를 뛰어넘는 은유를 알려준다. 하나는 엉터리이고 또 하나는 위대하다는 차이가 있지만 둘 다 자기들만의 헐… 이며 시어다. 그러니 시어가 본디 하나의 뜻으로만 통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헐… 이 본디 하나의 뜻으로만 통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중요하다. 영화 속 대사를 비틀어 차용하자면 헐… 이라고 다 똑같은 헐… 이 아니다. 그러한 논리가 곧 시의 논리다. 은교와 이적요는 이 헐… 로, 시로 서로를 교감한다. 아직까지는.

<은교>

“누가 자네에게 별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가르쳐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별이 아름답게 보이겠지만 배고픈 사람에게는 쌀로 보이지 않겠는가.” 이적요와 서지우의 과거 장면에서 이적요는 그렇게 서지우에게 ‘별’의 순리에 관하여 말해준다. “어떤 사물에서 각자 떠올리는 이미지는 이승과 저승만큼 멀다”는 신조를 지닌 이적요이니 그 말은 곧 시의 순리에 관한 것이기도 할 것이다. 영화에서 이적요의 요지는 “별이라고 다 똑같은 별이 아니다”이다. 헐… 과 별은 그렇게 연관된다. 헐…이 소설 <은교>에 등장하지 않는 것처럼 별도 소설에서는 잠시 등장할 뿐 영화에서처럼 중요한 의미를 갖지 않는다. 헐… 과 별을 주의 깊게 창조하고 연결하는 것은 영화이며 정지우다. 하지만 교감으로 시작한 헐… 은 이제 별을 거치며 무섭게 갈등의 중심으로 향한다. 헐… 이 인물을 잇더니 별이 인물들 사이를 다시 갈라놓는 형국이다.

처음에 별은 거울로 등장한다. 은교는 서지우의 잘못으로 엄마가 사준 안나수이 공주 거울을 절벽 아래로 떨어뜨리고 운다. 서지우가 다른 똑같은 거울을 사주겠다고 해도 “어떻게 똑같은 거울이냐”며 “똑같아도 똑같지가 않다”고 항변한다. 얼마 뒤 서지우와의 다툼이 있던 날, “엄마 사랑이 그 거울 안에 녹아 있기라도 하다는 거야?” 하고 서지우가 말할 때 은교는 “별이 똑같은 별이 아닌 걸 아는 데 10년 걸린 공대생”이라고 이적요의 말을 빌려 다시 서지우를 비아냥거린다. 그 말은 서지우의 입을 통해 다시 돌아온다. 문제의 그날, 이적요의 생일 술자리에서 서지우는 잔뜩 취해 이적요를 향해 “선생님 감사합니다. 별도 모르는 공대생 받아주셔서!”라고 스스로 자조한다.

별의 순리는 곳곳에 있고 사실 끊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적요가 썼으나 서지우의 것으로 알려진 대중소설 <심장>에 관하여 서지우는 “천박한 대중소설”이라고 일축하지만 이적요는 “시적이고 인간에 대한 이해도 뛰어나다”라고 말하여 다름을 드러낸다. 혹은 이적요의 애틋한 사랑에 관하여 서지우는 그건 “사랑이라고 하지 않아요. 더러운 스캔들이라고요”라고 비난한다. 한편 서지우를 향해 “네 놈이 소름끼치고 무섭다”고 한 이적요의 비난의 말을 서지우는 출판사 사장에게 “네 놈이 내 안에 들어왔다 나간 것 같아 무섭다”고 했다며 칭찬의 말로 바꿔 전한다. 영화의 초반부 영화 속 단편소설 <은교>를 이적요의 목소리로 한번 들려준 영화가 동일한 구절을 후반부 서지우의 목소리로 다시 한번 들려주는 것 또한 하나의 사물이 어떻게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 혹은 별은 어떻게 아름답게도 흉측하게도 변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하나의 사물을 다르게 볼 수 있듯이 어떤 하나의 사물은 두 갈래로 존재하기도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변주된 별 중에 가장 중요한 별, 은교라는 별을 움직이는 요체다. 은교라고 다 같은 은교가 아니다. 말하자면 영화 <은교>의 은교는 둘이다. 첫 번째는 사람 은교이고 두 번째는 이적요가 은교에 관해 쓴 단편소설 <은교>다. 첫 번째 은교는 이제 잘 알려져 있지만 아직도 말해지지 않은 것은 두 번째 은교인 것 같다. 그런데 실은 이 두 번째 은교가 서사의 면에서 어쩌면 사람 은교보다 더 중요하다. 이것이 소설 <은교>를 각색한 영화 <은교>의 각본의 핵심이며 이 영화의 가장 파격적인 서사적 선택이라고까지 말하고 싶다. 소설 <은교>가 중·후반부 서사를 지휘하는 커다란 별이다.

원작 <은교>에서 서지우가 훔치는 이적요의 소설은 이적요가 이미 오래전에 써두었던 것이다. 에밀레종 설화를 모티브로 한 것이었고 어떤 종지기의 “완전한 종에 대한 갈망을 다룬 짧은 소설”이었고 “일종의 탐미적인 예술가 소설”이었다. 하지만 영화 <은교>에서 서지우가 훔치는 이적요의 소설은 탐미적인 예술가 소설이기는커녕 은교에 관한 활화산 같은 마음을 숨기지 않은 ‘은교’라는 단편이었다. 그것이 너무 아름다워 훔치고 말았다고 서지우가 말할 때 이적요는 경멸한다. 당연하게도 그는 사람 은교가 너무 아름다워 그걸 썼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은교>에는 좀 무리해 보이는 영화적 설정이 하나 등장하는데 실은 이 단편소설<은교>가 그 이유를 제공했을 것이다. 이적요를 재방문하여 창가에 서서 들어가기를 청하던 은교가 문득 왜 탁자 위에 놓인 문학 계간지에 관심을 두는지 그 순간의 영화적 감정과 리듬으로는 석연치 않다. 책의 겉장에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는 걸 보았다고 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은교가 그 순간 그 책의 겉장을 보아야만 이후의 서사가 가능했다고 말하는 편이 영화적으로는 더 옳다. 은교는 그걸 읽어야만 하는 운명이다. 그걸 읽어야 은교는 서지우에게 마음을 줄 수 있고 섹스를 하게 되고 그래야 그걸 본 이적요의 분노를 끌어낼 수 있다. 소설에는 없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도 비로소 그때에야 가능하다. 소설 <은교>에서도 분노와 미움은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영화 <은교>와 그것과는 천지차이다. 소설 <은교>에서 서사적 소용돌이를 사람 은교가 만들어낸다면 영화의 서사적 소용돌이는 단편소설 <은교>가 만들어낸다.

영화 <은교>의 영화적으로 가장 특별한 장면도 단편 <은교>에 동일하게 빚지고 있다. 이적요의 생일날 집을 나가려다 다시 돌아온 은교, 아니 이적요가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은교의 발을 비추는 장면이다. 섬세한 카메라의 움직임은 이적요에게서 나와 서지우에게로 들어가는 은교의 발을 생생하게 포착한다. 이적요에게 돌아오는 발이 아니라 서지우에게 가는 그 발. 우리는 그 순간 은교의 발걸음이 황당하거나 놀랍거나 신기하거나 새로워서 헐… 한다. 그 순간의 헐… 은 이 장면의 아름다움과 충격에 대한 반응일 것이다. 은교라는 별은 왜 서지우에게 가는가. 단편 <은교>라는 별을 서지우가 썼다고 잘못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단편 <은교>는 끝내 사람 은교를 아름답게 움직여, 즉 하나의 별이 다른 별을 아름답게 움직여 우리에게 헐… 하고 뱉도록 한다. 이후의 장면, 은교와 서지우의 섹스장면이 영화 <은교>의 정점이자 모든 것인 양 말해지지만 실은 이 영화의 정점은 은교의 발이 발걸음을 돌리는 바로 이 순간이다.

할!

같은 것을 보아도 다르게 볼 수밖에 없고 또는 같은 이름을 가졌어도 다를 수밖에 없다. 그게 영화 <은교>의 순리다. 그것이 사랑도 만들고 갈등도 만들고 분노도 만든다. 그렇게 하여 서지우는 죽었고 이적요는 죽을 것이며 다만 은교만 살아갈 것이다. 인생이 헐… 이고 별이라는 사실을 누가 깨달을 것인가. 깨달음. 그러니 뒤늦게 이 말을 전해야겠다. 은교가 카페에서 이적요와 함께 있을 때 은교가 헐… 의 의미를 알려주자 이적요가 화답삼아 알려준 그것, 할! “뭔가 깨달았다는 뜻”이라고 이적요는 할!에 대해 설명한다. 헐… 과 별이 그러하듯이 할!은 정지우의 것이며 이것이 라스트 신으로 돌아온다.

시체처럼 누운 이적요를 찾아와 건네는 은교의 말 속에 그 할!이 있다. 은교는 뒤돌아 누운 이적요에게 말한다. “번개처럼 기억이 났어요. 그때 그 순간, 온도, 습기, 따뜻함. 아무리 얘기를 해줘도 절대로 느낄 수 없는 게 있잖아요. 은교, 할아버지 거잖아요.… 은교, 할아버지가 쓰신 거잖아요.” 정지우는 은교에게 “은교, 할아버지 거잖아요”(나는 당신의 것이잖아요)와 “은교, 할아버지가 쓰신 거잖아요”(그 작품 당신의 것이잖아요)라고 두번 말하게 하여 사람 은교와 작품 <은교> 사이의 뉘앙스와 리듬을 살려낸다. 은교의 그 깨달음은 감동적인 것인데, 은교가 소설의 문장의 의미를 깨달은 것이 아니라 “아무리 얘기를 해줘도 절대 알 수 없는”, 그 문장을 가능케 한 그날의 일회적 시간과 체험을 마침내 깨달았기 때문이다.

은교는 또한 “나는요 내가 그렇게 예쁜 아인 줄 몰랐어요. 고마워요. 은교 예쁘게 써줘서”라고도 말한다. 자기가 아름다움 그 자체인 줄 몰랐던 은교가 라스트 신에 이르러 이제 그 아름다움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할!이 깨우침과 연관되어 있다는 뜻을 알고 있었던 건 이적요이지만 실제로 할!하게 되는 건 은교다. 은교의 깨달음이 전해지던 이 순간에 박해일-이적요의 얼굴이 화면 전체를 채우고 그 장면이 오랜 롱테이크로 보존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우리로 하여금 인생은 헐… 이라고 느끼게 했던 바로 그 얼굴이 지금 누워 있고 인생은 별이라고 생각하게 했던 그 청춘이 다가와서는 스스로 할!하는 장면이다. 은교라는 별을 사이에 둔 헐… 과 할!은 저승과 이승만큼이나 멀다. 그러니 은교는 끝내 이승에서 자라날 것이지만 이적요는 곧 저승으로 돌아갈 것이다.

영화 <은교>가 어느 노시인의 애상만을 다루었다고 보이지 않는다. 늙음과 젊음이 겨루다 벌어진 치정극으로 한정하고 싶지도 않다. 차라리 그 애상과 치정극을 부르는 헐… 과 별과 할!에 관한 영화라고 말할 것이다. 늙음과 젊음에 헐… 하고 반응하는 영화이며 늙음과 젊음을 별처럼 다르게 보려는 영화이며 늙음과 젊음에 관하여 할!하고 깨달으려는 영화라고 말할 것이다. 이적요는 뾰족한 연필을 보면 슬프고 은교는 엄마 뒤꿈치를 보면 슬프고 우리는 <은교>를 보면 슬프다. 그 슬픔은 알려진 것처럼 우리가 노시인 이적요에 전적으로 동일화되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이 영화의 헐… 과 별과 할!이 슬프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삶에 놀라고 삶을 다르게 보고 삶을 깨닫는 건 때때로 슬픈 일이다. 영화 <은교>는 그렇게 헐… 과 별과 할!의 연으로 묶인 슬픈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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