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전영객잔]
[신전영객잔] 매끄러운 표면 뒤 다큐멘터리의 근골이
2012-05-31
글 : 김혜리
<아르마딜로>가 흡수한 극영화의 문법을 고찰함
<아르마딜로>

<아르마딜로>는 2009년 아프가니스탄 헬만드에 나토 평화유지군으로 파병된 덴마크 병사들의 8개월을 촬영해 편집한 기록영화다. <디스커버리 채널> 다큐멘터리로 오인되기 십상인 영화 제목은 덴마크 군인들이 탈레반과 대치해 주둔하는 전진 작전기지 이름에서 나왔는데, 최첨단무기와 장비로 무장하고 있음에도 적군 소재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어 유사 감금 상태에 처해 있는 나토군의 상황은 궁지에 몰리면 갑피 속에 웅크려드는 동물 아르마딜로의 생태와 비슷하기도 하다.

야누스 메츠 페데르센 감독의 <아르마딜로> 는 이중의 의미에서 전방(前方)의 영화다. 그리 고 이 두 가지 전위성은 두개의 불안을 낳는다.

우선 페데르센 감독과 라스 스크리 촬영기사가 이끄는 팀은 반년간 목숨을 내걸고 아프가니스탄 전장에 머물며 영화를 찍었다.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판단을 내린 페데르센은 당초 30분 길이 방송프로그램으로 기획된 <아르마딜로>를 극장용 장편으로 밀어붙였다. 고작 30분 TV 노출을 위해 인생을 하직하긴 아깝다고 판단한 것이다. 실제로 <아르마딜로>를 관람하다보면 카메라맨이 영화를 찍다 죽을까봐 철렁하는 순간을 수차례 경험한다. 영화는 스크린을 통해 죽음을 오락으로 만들었지만 그 반대편에는 영화를 찍기 위해 죽음의 가능성을 감수하는 인간이 여전히 있는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불안이다. 한편 <아르마딜로>는 픽션과 다큐멘터리가 서로 닮아가는 21세기 영화 동향의 전방에 포진한 영화다. 널리 지적된 대로 <아르마딜로>는 전쟁을 그린 극영화와 흡사한 외양을 갖췄다. 엔딩 크레딧에는 ‘드라마투르기 컨설턴트’의 이름도 보인다. 픽션인 브라이언 드 팔마의 <리댁티드>나 J. J. 에이브럼스의 <클로버필드> 일부 시퀀스와 <아르마딜로>를 아무 정보 없는 관객에게 나란히 보여주고 어느 쪽이 다큐멘터리냐고 설문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할 지경이다. 두 번째 불안은 이 다큐멘터리가 리얼리티를 취급하는 비정통적 방식에서 발생한다. 이 감정은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사실이 얼마나 인위적으로 ‘구성’된 것인지 확신할 수 없기에 관람의 포지션을 확정할 수 없는 불안이며, 흔들리는 발판 위에 선 구경꾼의 조마조마함이다. 요컨대 <아르마딜로>의 관객은 핸드헬드 카메라와 헬멧 카메라의 흔들리는 시점 숏에 실려 포탄의 위협을 받는 동시에, ‘리얼’(the real)의 영토가 공격받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20세기 후반부터 극영화는 가장 상업적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부터 다큐멘터리 양식을 흉내내고 기록영화는 뮤지컬, 애니메이션을 포함한 장르 양식을 동원했다. 그러나 가짜 다큐멘터리 형식을 끌어들인 픽션영화를 소비하면서 우리가 취하는 여유로운 자세와 딴판으로, 극영화 문법을 흡수한 다큐멘터리는 희미한 경계심을 부른다. 극영화에서 다큐멘터리적 장치는 효과를 배가하기 위해 심상히 구사되는 다양한 기교의 하나일 뿐이지만, 반대 경우는 장르의 본령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양식과 수용자 사이의 약속이 걸린 문제이고, 특히 해당 다큐멘터리의 주제가 정치적 사안이라면 프로파간다로 변질될 위험을 포함한다는 점을 우리는 역사적으로 알고 있다.

저널리즘과 할리우드 전쟁 서사극을 동시에 보고 있는 듯한 이상한 맛. <아르마딜로>에 대한 상념은 여기서 출발한다. 구체적으로 <아르마딜로>는 얼마나, 어떤 식으로, 극영화의 화법을 이용했나? 그것은 다큐멘터리의 근본적 약속과 어떻게 절충되었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영화가 시작되면 우리는 노란 창공을 배경으로 군용헬기의 프로펠러가 천천히 돌고 있는 광경을 본다. <지옥의 묵시록>의 로고나 다름 없는 이미지이자 베트남전쟁을 그린 무수한 영화에서 반복된 숏이다. 이 도입부는 <아르마딜로>에 관해 생각보다 많은 힌트를 준다. 첫째, <아르마딜로>의 ‘스토리라인’은 <지옥의 묵시록>(원작인 <암흑의 핵심>)의 궤적을 뒤밟는다. 문명으로부터 야만으로 서서히 하강하고 마침내 바닥에 닿았을 때 수면으로 반등하는 대신 홀린 듯 거기 머무른 커츠 대령(말론 브랜도)과 윌라드 대위(마틴 신)의 여정과 덴마크 군인들의 체험은 방향이 같다. 둘째, <아르마딜로>는 사건의 서술 방식에서만 할리우드 베트남전쟁 영화를 참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관객은 영화 초반 이 다큐멘터리가 찍은 현실 자체가 할리우드를 참조하고 있다는 기이한 인상을 받게 된다. 대부분 유일한 전투 경험이라곤 1인칭 슈터 게임뿐인 젊은 군인들은 곳곳에서 익숙한 할리우드 전쟁영화의 제스처를 모방한다(덴마크는 1864년 이래 전쟁에 연루된 적이 없는 나라라고 한다). 마치 당대의 갱스터영화에 영감을 받았던 갱 존 딜린저처럼. 도랑을 휘젓던 병사가 문득 “웰컴 투 베트남”이라고 말할 때, 동료의 전사 뒤 야간 작전을 나가는 군인들이 사냥꾼의 표정으로 얼굴에 푸른 염료를 바를 때, 비인도적 행위에 대한 외부자의 비판에 대해 “그들은 거기 없었잖아?”라고 병사가 반박할 때 우리는 영락없이 추억으로부터 호출된 전쟁영화의 장면들과 대면하게 된다. 닭이 먼저일까, 달걀이 먼저일까. 셋째, 특정인을 뒤따르는 다큐멘터리가 아닌 만큼 주인공이 있을 수 없는 <아르마딜로>에서 그나마 주인공에 근접하는 인물 매드에게는 <플래툰>의 크리스(찰리 신)가 보인다. 매드는 무리 중 가장 순진한 눈동자와 다정한 가족을 가진 청년이며 스크린 밖 관객과 비슷하게 사태에 반응하는 인물이다. 영화에서 부모와의 전화 통화가 관객에게 보이고 들리는 군인은 매드뿐인데 이 장면의 반복은 <아르마딜로>에서 거의 유일한 감정선이다. 감독은 과거 영화로부터 얻은 신병의 이미지를 품고 있다가 처음부터 매드에게 주목했을 수도 있고, 촬영 도중 어느 시점에 이르러 <아르마딜로>를 순수로부터 추락하는 서사로 파악하고 편집 과정에서 매드의 푸티지에 집중했을 수도 있다. 달걀인가, 닭인가.

<아르마딜로>

다큐멘터리의 뼈, 픽션의 피부

<아르마딜로>를 보고 나오며 “극영화 같다”고 뭉뚱그릴 때, 우리는 이 다큐멘터리가 극영화를 관람하며 단련된 감각에 딱히 조율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있다. 페데르센은, 고전적 극영화가 리얼리티의 환영을 완성하기 위해 쓰는 ‘봉합’의 기술을 영화 전반에서 공격적으로 구사한다. 기지 내부, 차량에 배치된 촬영팀과 병사들의 헬멧, 심지어 무기에 부착된 여러 대의 카메라에서 취합된 숏은 전방위적으로 편집되어 전지적 시점을 완성한다. 사운드와 오케스트라 스코어 역시 정교하고 세련되게 편집됐다. 편집 이전에도, 상대적으로 정적인 상황에서 촬영된 개별 숏에는 주둔군의 긴장감과 고립감, 신경증을 표현하려는 의도가 역력하다. 한편, 안개 낀 캠프 전경을 위시한 설정 숏(establishing shot), 고속촬영된 조명탄이 발사된 밤하늘과 일몰의 인서트 컷, 풀벌레와 먼지바람이 불현듯 매혹적인 그림을 만들어내는 프레임은 정보 전달과 무관하게 함축적 이미지로 사용됐고 미적으로 감상된다. 이 숏들은 <아르마딜로>가 숙고의 시간을 거쳐 촬영됐음을 보여준다. 영화가 전하듯 아르마딜로 기지의 군인들이 교전상황을 맞이하는 것은 주둔 4개월 이후다. 군인들이 정찰을 반복하며 “진짜 액션이 일어나길” 기다리는 동안 제작진은 헬만드의 기지를 풍경으로서 관조할 시간을 가졌으리라. <아르마딜로>의 ‘극영화스러움’ 가운데 가장 당황스런 부분은 군인들이 배우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핸섬해 보였다는 뜻이 아니라 성격이 포착됐다는 의미다. 흔히 배우의 얼굴은 따로 있다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은 연기력을 다소 신비화한 표현에 가깝고, 실은 우리에게 연기하는 배우의 얼굴을 보여주는 극영화 카메라의 시선이 특별하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다. <아르마딜로>의 렌즈는 보통 청년들을 그렇게 관찰한다.

요약하자면 <아르마딜로>는 매끄럽고 아름답다. 1960년대 경량 카메라와 녹음기가 도입된 이후 다큐멘터리 하면 떠올려 온 거친 형식과 배치되는 이와 같은 스타일은 시각의 문제인 것만큼이나 영화적 촉각의 문제다. 굳이 촉각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은 <아르마딜로>가 극영화에서 가져온 것은 ‘피부’이지 ‘근골’(筋骨)은 아니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다. 페데르센은 극영화적인 표면을 구성하지만 그 아래 드라마의 관절은 만들지 않는다. 복수의 시야를 조합해 전지적인 시각의 장을 얽어내지만 거기 멈춘다. 일반적 극영화처럼 인물을 주역과 조역으로 분리하고 그들의 시점을 정돈해 기승전결의 감정선을 구축하지 않는다(그런 편집도 원했다면 불가능하지 않았으리라고 추측한다). 8개월의 시간이 흐르는 박자는 불균질하고 불친절하다. 물리적 사건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 1시간8분 시점까지 상대적으로 드라마틱한 고비인 소대장의 피격이나 아군의 부상을 강조하기 위해 <아르마딜로>는 억지로 시간을 들이지 않는다. 현장을 촬영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르마딜로>가 다큐멘터리다워 보이지 않는 까닭은 무엇을 더 했다기보다 무엇을 하지 않아서인 면도 크다. 영화의 표면은 그토록 매끈하게 모자이크해놓고도 페데르센은 내레이션을 전혀 쓰지 않았고 갈등의 중심에 있거나 비밀을 쥔 병사들을 인터뷰하지 않았다. <아르마딜로>에는 인터뷰 비슷한 장면이 딱 한번 나오는데 폭격좌표를 적시한 결과 민간인 소녀가 죽었음을 알게 된 관측병이 흘리는 두어 마디다.

비약의 발판은 시학적인 것에 있다

<아르마딜로>의 극영화적 속성은, 편집을 통해 별개 시간대의 숏을 동시에 일어난 일처럼 이어붙였다거나 허구적 요소를 사실 사이에 섞어 사실로 간주하게 유도했다는 이유로 논란을 부른 <워낭소리>의 그것과 다르다. 알려진 배우를 기용해 부분적 픽션을 관객이 확연히 알고 보게 만드는 지아장커라든가 감독이 구성한 장면을 포함시키는 에롤 모리스의 방법과도 완전히 다르다. 페데르센의 시도는 차라리, 다큐멘터리가 실제로 일어난 일만 찍는다는 해묵은 근본 원칙을 훼손하지 않은 채 극영화의 문법을 수용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 가늠하는 정찰이다. 그럼 페데르센 감독은 어디다 쓰려고 픽션의 세공술을 도구로 취하고자 하는가? 비슷한 질문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한 바 있다. “내게 중요한 건 리얼리티를 시학적으로 전유해 항상 코앞에 드러나 있지만은 않은 것들에 다가가는 작업이며, 실재보다 더 리얼한 구조와, 순간에 서린 신화적 의미를 보는 작업이다.” 말이 좀 어렵지만 플라톤주의자의 진부한 포부라고 일축하기에 <아르마딜로>의 성취는 견실하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페데르센은 (낭만적이게도) 사실만을 채집해 진실까지 도달하려 하며 그때 비약의 발판은 시학적인 것, 즉 픽션의 기술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시학은 무엇이 사실의 훼손과 조작이고 무엇이 아닌가를 가리는 법정의 판사가 된다.

<아르마딜로>의 뇌관은 덴마크 군인들이 수류탄으로 이미 무력화된 탈레반 조직원에게 제네바 협정에 따른 교전수칙을 엄수했는지 논란을 부른 참혹한 장면이다. 카메라가 분명 수류탄 투척과 총격, 너덜너덜해진 주검을 끌어내는 광경을 보여주는데도 관객은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총격을 받은 시점 탈레반 군의 정확한 상태는 헬멧 카메라 화면에서 확인되지 않고 현장에 남아 있는 잠재적 위협 여부가 모호하고, 덴마크 군인의 무용담은 어디까지 허풍인지 애매하다. 이만큼 밀착된 영상을 보고도 진실을 확정할 수 없는 좌절은 관객에게 다큐멘터리와 사실 사이에 끝내 드리워져 있는 얇고도 공고한 막을 감촉하게 만든다. 감독이 결정적 데이터를 갖고도 공개하지 않았는지는 본인만 아는 일이고 그랬을 경우 추측되는 동기도 하나가 아니다. 아무튼 페데르센은 이 뜨거운 지점을 파고들어 당사자들에게 캐묻지 않는다. 대신 그는 문제의 전투 뒤 어스름 내린 기지에서 모터사이클을 몰며 장난치는 군인들을 멀리서 바라본다. 그리고 곧이어 소풍이라도 온 양 천진하게 물놀이에 몰두한 그들의 모습을 한참 보여준다. 풍경으로서 아름답기까지 한 이 장면에 이르면 영화 초반 아프가니스탄에 도착해 초조하고 두려워하던 청년들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법적으로 전쟁범죄를 저질렀느냐 아니냐를 떠나 그들은 야만성의 세계에 편안하게 둔감하게 젖어들고 있다. 피와 죄를 씻어내는 듯한 이 의례는 결말부 귀국한 군인 한명의 샤워장면으로 연결된다. 야누스 메츠 페데르센이 영화를 통해 다다라야 한다고 믿는 진실은 이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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