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전영객잔]
[신 전영객잔] 돈의 맛도 결국 관념이고 허상일 뿐
2012-06-07
글 : 김영진 (영화평론가)
<돈의 맛>을 보며 화면의 물성을 통제하는 임상수의 재능에 감탄함

나는 직업이 평론가니까 임상수의 <돈의 맛>을 봤다. 평일 조조 상영을 보는데 다른 관객은 뭘 기대하고 보는 것일까 궁금했다. 주부 관객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대개 서너 사람씩 동네 주민들끼리 온 것 같았다. 수다로 시끄럽던 객석은 영화가 시작되자 이내 조용해졌다. <돈의 맛>의 첫 장면, 주인공 주영작(김강우)이 윤 회장(백윤식)의 지시로 비밀금고에 들어가 돈뭉치를 담을 때 굉장한 스펙터클이 나오기 때문이다. 영작은 돈다발 더미를 보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다. 카메라가 그의 넋나간 모습에서 뒤로 빠진다. 시야가 넓어지면 엄청난 돈다발들이 쌓여있다. 관객이 보고 싶은 스펙터클의 기대치를 처음부터 만족시키는 장면이었다.

그 장면에서 윤 회장은 영작에게 몇 다발 넣어두라고 충고한다. 맛 좀 보라고, 다들 그렇게 한다고 말이다. 영작은 돈다발의 냄새만 맡고 주머니에 넣지는 않는다. 냄새를 맡을 수 없는 관객은 그저 눈요기만 한다. 우리의 관음증은 이런 천문학적 돈을 쌓아두고 사는 부자들의 집안 내부 얘기를 궁금해한다. 임상수는 정확히 그렇게 한다. 예상할 수 있는 순서대로, 차근차근 그들의 욕망과 결핍을 그린다. 다분히 멜로 드라마틱한 공식을 따르며 종종 사회비판적인 메시지를 인물의 입을 통해 직설로 던진다.

관음증과 교훈극의 접합을 겨냥한 임상수는 이 영화에서 돈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재벌가의 디테일을 볼거리로 묘사한 다음, 직설적으로 그들을 비판하고 그들에게 맞서는 주인공을 통해 인간의 자존을 따뜻하게 보여주려 한다. 이것은 기존의 임상수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장치였다. <바람난 가족>의 마지막 장면에서 황정민이 연기하는 변호사 주영작이 아내에게 최종적으로 결별의지를 재차 확인받고 돌아서는 김에 살짝 두발을 공중으로 들어올리며 짝짝거리는 정도가 가장 산뜻한 임상수식 긍정의 표식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 그사람들>은 처절한 비극을 블랙코미디의 감성으로 중화시킨 영화였고 <오래된 정원>은 멜로드라마였으나 다음 세대의 무심한 시선을 통해 아버지 어머니 세대의 불행을 희망으로 순치시킨다. <하녀>에서 은이(전도연)는 자존을 지키기 위한 방법으로 자신의 고용인들인 재벌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불태운다.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울어줄 리도 없으나 그것조차도 거부한다는 듯이. 그런데 <돈의 맛>에선 주인공 주영작을 단단한 자기 긍정을 회복하는 인간으로 그린다. 심지어 그의 점진적인 변화 궤적 속에선 재벌가 따님 나미(김효진)와의 동지적 관계가 연애 형식으로 만들어진다.

임상수의 예술, 소통에 성공했을까

관객은 부잣집 내부에서 벌어지는 화려한 통속극을 보고 싶어 했는데 주인공들은 그 세계에서 빠져나오려 한다. 그 세계 안에서 승리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또는 그 세계에서 멜로드라마틱한 과장법으로 치장된 패배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들은 그 세계를 부정하고 비판한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의 위엄을 지킨다. 주영작과 나미는 평생 재벌가 리더로 살았던 윤 회장에게서 그 탈주를 위한 지침을 받는다. 유산을 물려받은 아내 백금옥 여사(윤여정)에게 얹혀살면서 부와 권력을 누린 윤 회장은 영화 중반, 필리핀 하녀 에바와 사랑에 빠져 가문을 등지기 직전에 주영작과 나미에게 평생 원없이 돈을 써봤으나 얻은 건 모욕감이라고 말한다. 그와 에바의 사랑은 지속되지 못하고 그는 비극의 장엄한 주인공이 되는데 그때가 되어서야 영화 속 어느 인물보다 행복해 보인다.

주영작은 윤 회장을 모방한 삶을 살 수도 있었다. 또는 윤 회장과 백금옥 여사 등과 대결 할 수 있었다. 이런 것도 클리셰지만 대중 관객이 원하는 것이기도 하다. 임상수는, 그리고 그의 의중이 반영된 주인공 캐릭터 주영작은 백금옥 여사가 제안한, 윤 회장의 삶을 흉내내는 삶의 길을 거절한다. 더이상 모욕감을 느끼고 싶지 않다며 <하녀>의 은이와 달리 당당하게 그들에게 등을 돌리고 걸어나온다. 돈의 맛을 느끼는 주인공을 보고 싶었던 관객에게 그는 돈의 맛을 보기를 거절한다. 첫 장면에서 윤 회장이 맛 좀 보라고 권할 때 주영작이 실컷 돈냄새를 맡은 뒤 호기있게 돈뭉치를 던져버리는 건 결말에 대한 복선이자 그의 본성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두 차례 반복되는 장면, 주영작이 방 모서리에 세워둔 거울을 치우면 뇌물 상납 때마다 챙겨놓은 돈다발들이 쌓여 있는 화면은 이 상승하지 않는 드라마의 알맹이를 표상한다. 돈의 맛을 본다 해도 그들에게 속하지 않은 우리는 찔끔 볼 수 있을 따름이다. 주영작의 방 안 모서리 거울 뒤에 숨겨둔 돈무덤처럼. 그것도 굉장하긴 하지만 이미 도입부에 산처럼 쌓인 돈더미를 본 우리에게 주영작의 방구석 돈다발들은 초라하다. 게다가 그걸 보기 위해서는 주영작이 거울 속 자기 모습을 보는 것을 우리도 봐야 한다. 간단하고 직설적이지만 이 두 장면은 충분히 인상적이었다. 거울 속 나를 보고 거울 뒤 돈다발을 챙겨야 한다. 돈다발이 쌓이는 정도만큼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다, 라고 주영작은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자기 성찰의 과정이 직설적인 화면으로 제시되기 때문에, 동시에 매우 공격적으로 묘사되기 때문에, 내가 본 극장의 객석 분위기는 초·중반의 관음증을 즐기던 온기가 점점 사라지는 것처럼 느꼈다. 한국 관객 대다수가 그렇긴 하지만,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관객은 조용히 서둘러 빠져나갔다. 노골적으로 불평을 늘어놓는 대신 조용히 빠져나가는 옆자리의 관객을 보고 나는 임상수의 예술이 소통에 성공한 것인지 아닌지 자문했다.

적어도 나는 <돈의 맛>에 감동했던 관객이다. 직설적이고 교조적이며 삐딱한 유머로 덧칠된 비극이라 정이 가지 않는다고 주변에서 비판하는 소리를 들었으나 나는 <돈의 맛>이 잘된 영화라고 생각한다.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에서 읽은 것들이 떠오르긴 했지만 상관없었다. 임상수는 비교적 대자본이 들어간 주류 영화산업 복판에서 돈의 흐름을 관장하는 지배 엘리트들을 이렇게 맨 얼굴로 드러내 공격할 수 있는 예술적 호기의 소유자이다. 관음증의 충족과 그 죄의식을 덮어주는 말랑말랑한 멜로드라마의 수식을 원했던 관객의 요구를 의식하면서도 끝까지 우리에게 죄의식을 환기시키는 배짱의 소유자이다. 주영작과 나미가 필리핀 에바의 본가에 찾아간 마지막 장면에서 갑자기 비가 내리는 하늘을 보며 주영작과 나미가 서 있는 비교적 감상적인 이미지들 사이에 끼어들어간, 매우 임상수적인 이미지가 있다. 관 속의 에바가 갑자기 눈을 뜨며 영작이 넣어둔 돈다발을 보는 숏이다. 이미 죽어버린 불행한 멜로드라마의 히로인인 필리핀 여성은 우리에게 시위라도 하듯이 눈을 부릅뜨고 돈다발을 쳐다본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우리 대다수는 돈의 맛에 환장해 있다. 더 많은 돈이 우리 수중에 들어올 수 없는 걸 아는데도 언젠가는 들어올지도 모른다고 억지로 믿는다. 그 강고한 억지 환상이 우리 삶의 불우를 지탱해주고 있다. 완만한 멜로드라마 교훈극에 삽입된 악몽의 시연으로서 이 장면은 이어지는 이미지의 감상적인 선의를 왜곡하지 않으며 그 의미를 입체적으로 보태준다.

공간의 지배권을 갖지 못한 인물들

<돈의 맛>은 임상수의 반골적 태도뿐만 아니라 화면의 물성을 통제하는 그의 영화감독으로서의 재능도 잘 증명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하녀>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공적으로 꾸며진 재벌가 저택 내부는 인물들만큼이나 중요하다. 임상수는 대저택의 공간적 질감과 소품들을 인물들과 유리해놓는다. <하녀>에서도 그랬다. 리메이크라고 홍보됐지만 임상수의 <하녀>는 김기영의 <하녀>와 거의 관계가 없었다. 김기영의 <하녀>에서 일층과 이층의 공간, 그리고 일층과 이층을 이어주는 계단, 모든 방의 미닫이문들은 침입과 점거라는 모티브로 집요하게 사용됐다. 특히 이은심이 연기하는 주인공 하녀는 주인 부부의 집 내부 공간을 자기 것으로 전유하기 위해 공세적인 몸짓을 한다. 거기서 공간은 그곳을 점유하는 이들의 표정과 겹친다. 그러나 임상수의 <하녀>에서 공간은 그냥 액세서리이거나 실용적 기능을 위해 있을 뿐이며 그 결과 인물들과 유리되거나 심지어 밀쳐내는 인상을 준다. 이를테면 계단을 활용한 미장센은 김기영의 영화에서만큼 의미와 정서를 가진 표정을 지닐 기회를 아예 박탈당하고 있다. 아주 살짝 침입과 점거의 모티브가 있지만(은이가 주인의 욕실에서 목욕하는 장면이 일례다) 내러티브 깊숙이 들어오진 못한다.

임상수의 <하녀>에서 은이가 주인 훈과 관계를 가진 뒤 처음으로 조찬을 갖다주는 아침의 일과 장면에서 은이는 남자의 몸을 가졌다는 여자의 심리로 표나지 않게 으스대지만 피아노를 장중하게 치고 있는 훈은 그런 은이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는다. 은이는 모욕감을 넘어 패배감을 느끼는데 피아노 위에 수표가 든 봉투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몸의 소통으로 심리적 소통관계에서 대등한 위치에 올라섰다고 느낀 은이는 훈의 태도와 돈봉투의 권위적인 메시지 앞에서 다시 열등한 위치로 내몰린다. 우아하게 클래식을 피아노로 연주하는 재벌 총수는 그의 교양을 시위하고 있고 돈봉투는 그의 권력 앞에서 굴종을 요구한다. 이것으로 임상수의 <하녀>에서의 은이는 김기영의 <하녀>에서의 여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계단을 오르내릴 수 없다. 그녀는 공간의 지배권을 갖지 못한다.

<돈의 맛>에서도 주영작은 당연히 공간의 지배권을 갖지 못한다. 그가 백금옥 여사의 지시를 받아 일상적인 잡무를 처리하기 위해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는 동안 그의 뒤와 곁에서 그를 쫓는 카메라는 그가 이 공간을 활보하는 게 아니라 조심스럽게 남의 집처럼 대하는 것을 공들여 묘사한다. 그는 곧잘 복도에서 방 내부로 들어가지만 그의 시점은 대체로 엿보는 자의 위치를 벗어나지 못한다. 주영작이 의도하지 않은 채로 윤 회장과 하녀 에바의 애무장면을 목격했을 때 주영작은 보지 말았어야 한다고 자책한다. 주영작은 이 부잣집 저택을 겨우 엿볼 수 있을 뿐이고 엿보는 것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느낀다면 백금옥 여사는 자신의 침실 내부에 설치된 폐쇄회로 화면으로 집안 곳곳을 보고 있다. 그녀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으므로 집안 공간을 장악하고 있다. 주영작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는 백금옥이 그를 폐쇄회로 화면이 설치된 방으로 불러들이는 영화 속 한 장면에서 주영작은 공간 깊숙이 들려오는 백금옥의 목소리를 따라 조심스럽게 백금옥의 사적 공간으로 살짝살짝 발걸음을 옮기며 들어온다. 투명 유리관을 걷는 것처럼 노출이라도 된 듯이 위축된 그는 이 공간에 대한 지배권을 가질 의욕조차도 박탈당한 사람 같다.

감시하는 자와 감시당하는 자의 위계

주영작이 걸으면 걸을수록, 그의 곁을 따라가는 카메라가 표상하는 것은 그가 좀비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덩달아 그의 시점에 포착되는 다른 피고용인들, 여러 하녀들과 경호원들의 존재도 영혼을 박탈당한 인형들처럼 보인다. 영화 속 한 장면에서, 주영작이 퇴근할 때 왕회장의 비서가 그런 주영작을 지켜보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고 그런 비서의 행동을 의아하게 나미가 바라볼 때 카메라는 감시하는 자와 감시당하는 자의 위계를 명확히 구분하는 이동화면을 연출한다. 이 화려한 공간에서 주영작은 겉돌거나 때로는 감시당하는 자이며 공간을 장악하고 감시하는 자의 편에 섰을 때 비로소 그들처럼 내려다보는 시점을 부여받는다. 고가의 장식품들로 꽉 차 있는 이 화려한 공간이 주인공과 겉돌고 있다는 느낌을 지속적으로 부여하는 임상수의 연출은, 그러나 그 공간의 주인들 입장에서도 똑같은 암시를 던진다. 윤 회장이 집을 나가기 직전 자신의 이층 서재를 정리하며 일층에 있는 주영작과 나미에게 돈을 맘껏 쓴 자의 모욕감을 얘기할 때 카메라는 그의 곁에서 내려다보는 앵글로 주영작을 비추고 있으나 여기서도 물리적 공간의 수직적 위계는 역설로 작용한다. 윤 회장조차도 그 공간의 지배권을 가질 수 없었다. 그는 꽉 찬 서재에서 자신의 것이라곤 고작 책 몇권만 챙길 뿐이다. 이는 윤 회장이 변심한 뒤 그가 드나들던 돈다발 창고가 텅 빈 것을 보고 허탈해하는 이전 장면과 조응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머무는 공간에서 등장인물들이 유체이탈된 듯한 이 역설은 심지어 이들 공간을 장악하는 것으로 보이는 백금옥 여사에게도 해당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돈의 맛도 결국 관념이고 허상이며 욕망의 가상대상일 뿐이고 누구도 그 돈으로 처바른 공간 안에 안착하고 있지는 않다. 결국 다 공허한 껍데기이므로. 임상수의 비관주의는 쓴맛이다. 그러니 애초부터 이 영화에는 요즘 유행하는 텔레비전 드라마와 같은 권력쟁탈의 드라마가 펼쳐질 여지가 없었다. 나는 그의 도저한 비관주의를 지지하며 그걸 화면의 번들거리는 물성에 비춰 보여준 영화감독으로서의 재능에 고개 숙여 경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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