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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꽃무늬 기모노와 현대 미술, 그리고 슈베르트
2012-06-08
글 : 박해천 (디자인 연구자)
<돈의 맛> 회장님의 오디오

오늘도 어김없이 윤 회장의 서재에선 알프레드 브렌델이 연주하는 슈베르트의 피아노곡이 잔잔하게 울려퍼진다. 머리 큰 외계인처럼 생긴 바워스 앤드 윌킨스의 스피커가 이 음향학적 무대의 연출자다. 젊은 시절의 윤 회장은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청년이었다. 그 시절, 그는 지방 명문고를 졸업하고 서울대에 입학했다. 변변치 못한 가계의 식솔들에게 그는 집안을 일으켜 세울 희망이었다. 그는 운이 좋았다. 1973년의 1차 오일쇼크와 78년의 2차 오일쇼크, 그사이의 고도 성장기에 어렵지 않게 대기업에 입사했다. 고향의 어머니는 출세한 아들의 맞선 자리를 알아보느라 두문불출했지만, 그는 입사하자마자 같은 부서에서 일하던 여직원과 눈이 맞았고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을 약속했다. 그런데 이 평범한 사내 커플의 연애담은 어느 순간, 당시 인기를 끌던 김수현표 주말드라마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그 여직원이 창업주의 딸임을 뒤늦게 고백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그녀는 순정파였다. 집안 사정으로 성악이 아니라 경제학을 선택한 남자에게 동정심을 느꼈고, 그가 중후한 바리톤의 음색으로 부르는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사랑했다. 남자도 그녀의 진심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말들이 주변에 넘쳤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결국 왕회장은 딸의 고집을 꺾지 못했고 이들의 결혼을 허락했다. 왕회장은 남자를 불신했지만 그의 잘생긴 외모와 뛰어난 두뇌, 그러니까 그의 유전자만큼은 신뢰했다. 사석에선 언제나 꽃무늬 기모노를 걸치고 있던 왕회장은 진화론 신봉자였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첫아이가 세상에 나온 뒤였을까? 남자의 아내, 백금옥 여사는 빠른 속도로 변해갔다. 세상의 모든 욕망은 그녀의 차지인 듯 보였다. 남자는 회장님으로 불리기 시작했지만 실상은 “서울대 경제학과 나와 현금보따리 나르다가 한 자리씩 차지”한 월급쟁이들을 진두지휘하는 역할을 떠맡았을 뿐이었다. 왕회장이 일선에서 물러나고 백씨 가문의 대저택에 자신의 서재를 꾸몄을 때, 그는 그곳이 거대한 관 같다고 느꼈다. 그는 <스테레오사운드>의 애독자였던 시절을 떠올리며, 그 관 내부를 음향학적 공간으로 꾸며야겠다고 작심했다. 지난날 애청했던 음악이 자신이 느끼는 모욕감을 조금이라도 씻어줄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다. 또한, 암호 같은 현대 미술 작품들을 벽면에 내걸고 집안을 갤러리처럼 치장하려 드는 백씨들의 취향에 무언의 반기를 든 것이기도 했다.

윤 회장이 최종 낙점한 오디오 기종은 바워스 앤드 윌킨스 스피커와 매킨토시 앰프였다. 유명 제조사의 최상급 라인이었지만 재벌 회장님치곤 다소 클래식하고 검소한 선택이었다. 물론 반발이 없지 않았다. 그가 체리색 무늬목 스피커를 선택했을 때 백 여사는 검정 대리석이 주조를 이룬 인테리어 분위기를 해칠 수 있다며, 로스 러브그로브가 디자인한 유기적 형태의 알루미늄 스피커를 권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못 들은 척했다. 백 여사는 레벨미터가 들어간 매킨토시의 오디오 기기가 자리잡는 걸 보고선 결국 설득을 포기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출신은 속일 수 없다며 남편의 구닥다리 미감에 혀를 끌끌 차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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