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혼돈의 궁, 그리고 <후궁: 제왕의 첩>
2012-06-06
글 : 강병진

부모의 강요로 후궁이 되어야 하는 화연(조여정)은 오랜 연인인 권유(김민준)와 헤어져 궁으로 들어간다. 왕의 이복동생인 성원대군(김동욱)은 화연을 사랑하지만, 형수가 된 그녀를 어쩔 수는 없다. 5년 뒤, 선왕의 승하와 함께 성원대군은 왕위에 오른다. 섭정의 명목으로 왕의 머리 위에 오른 대비(박지영)와 그녀의 간신들이 선왕의 세력들을 처단하는 가운데, 화연 또한 위기에 놓인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는 성원대군은 무능한 왕이고, 내시가 되어 궁에 들어온 옛 연인 권유는 화연과 화연의 부모를 향해 이를 갈고 있다. <후궁: 제왕의 첩>(이하 <후궁>)은 궁이라는 미로에 홀로 남겨진 여인의 이야기다. 그녀에게는 출구를 찾을 실이나, 미로 밖으로 나갈 동아줄을 내려줄 사람이 없다.

<후궁>의 무대인 궁궐의 깊숙한 곳에는 ‘밀궁’이 있다. 선왕의 후궁이나 죄를 지은 후궁, 정절을 지키지 못한 나인들이 처벌받고 죽을 때까지 갇혀 있는 곳이다. 혼돈의 궁 안에서 화연이 느끼는 공포는 밀궁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것이다. <후궁>의 진짜 이야기는 그녀가 공포를 딛고 일어서는 순간부터 시작한다. 자신을 연모하는 왕의 마음을 이용해 궁의 권력관계를 무너뜨리고, 갈등을 심어넣는 등의 음모가 펼쳐지면서 화연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과 똑같은 인간으로 거듭난다. <혈의 누>에서 탐욕의 귀기(鬼氣)가 서린 섬을 묘사했던 김대승 감독은 <후궁>의 궁 또한 욕망의 지옥으로 상상한다. 왕과 대비를 비롯한 궁 안 사람들이 욕심에 사로잡혀 벌이는 행각들 또한 같은 맥락에서 볼 때 흥미롭다. 왕의 뺨을 때리는 대비와 그런 대비 앞에서 무릎을 꿇는 왕을 본 적이 있었던가. 소재가 지닌 에너지를 이야기의 빠른 속도로 소진시킨 점은 아쉽지만, 위기를 돌파하는 한 여인의 싸움이 전하는 쾌감으로는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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