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고현정] 미로를 벗어나 GO, GO
2012-06-25
글 : 김혜리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미쓰GO> 고현정

<조지아>의 제니퍼 제이슨 리가 조지아가 아니고 <베니와 준>의 조니 뎁이 베니도 준도 아닌 것처럼 <미쓰GO>에서 ‘미쓰 고’는 고현정이 아니다. ‘미쓰 고’로 불리는 정체불명 여인의 심부름을 선의로 맡았다가 마약 거래에 휘말려 ‘미쓰 고2’로 오인되고, 부산의 두 범죄조직과 경찰 사이에서 피구공마냥 오락가락하는 가여운 여자 천수로가 고현정이 분하는 인물이다. 철심 같은 신경의 소유자가 당해도 혼이 나갈 괴변인데, 천수로는 대인기피증을 앓아 타인이 곧 지옥인 여자다. 골방에 들어앉아 꼭꼭 눌러 그리는 만화만이 그녀와 현실을 평화공존하게 한다. 게다가 대소동은 유일하게 수로의 곁을 지켜주던 친구 영심마저 일본으로 떠난 가장 무방비한 순간에 터진다. 모험, 사랑, 그리고 배신. 고소공포증 환자 롤러코스터 타듯, 여태 미루고 봉인했던 인생의 격렬한 체험에 한꺼번에 멱살잡혀 휘둘리던 천수로는 그만 팡! 터져버린다. 김설 작가의 원작 소설 <게임 오버-수로 바이러스>의 한 구절을 빌리자면, “느닷없이 끼어든 바이러스인 자신이 새로운 변수가 되어” 이 죽일 놈의 게임을 풀어가겠다고 독하게 떨쳐 일어난다. 번역하자면, 우리는 <미쓰GO>를 보면서 고현정에 관한 한, 두편의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미쓰GO>, 시나리오가 있는 나의 첫 영화

고현정의 소매를 가만히 붙든 것은 영화 전반부의 심약한 수로였다. 대학 친구인 제작자 장소정 대표가 건넨 <미쓰GO> 시나리오를 읽고, 센 척해도 실상 자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소녀 같은 면을 잃고 싶지 않아 하는 자기를 알아주는 마음이 감지돼 고마웠다. “다른 제안이요? 이혼하고 아이를 직접 키우지 못하는, 세상이 다 아는 제 조건과 비슷한 상황에 인물을 넣은 시나리오가 많았어요. 제가 나옴으로써 관객에게 미칠 감정적 효과가 클 거라는 점을 고려한 시나리오들. 몸도 덜 고되고, 연기도 비교적 쉽게 칭찬받을 수 있고, 완성도 높을 것 같은 영화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리로 쉽게 가면 안된다는 강박 비슷한 생각이 있었어요. 솔직히 모성을 다룬 이야기는 얼마간 자신이 있고 표현 욕구도 있어요. 기존에 그려지는 모성애와는 다른 기억과 체험이 있거든요. 하지만 어찌됐건 거기에는 관련된 다른 사람들이 있어요. 제 분야 일을 한다고 말하면서 마치 (과거를) 이용하는 느낌, 정면승부하지 않는 찜찜함이 있었어요.” <미쓰GO>를 일컬어 고현정이 자주 쓰는 표현은 ‘시나리오가 있는 나의 첫 영화’다. 하긴 홍상수 감독 영화와 이재용 감독의 <여배우들>은 완결된 시나리오가 없었고, TV드라마는 사전 제작이 아니고서야 종착점을 알지 못한 채 연기해야 하니 배우로서 나름 하지 않았던 체험이었던 셈이다. “뒤가 어떻게 될지 알고 있는데, 연기하는 순간에는 다음을 모른다고 자기 최면을 걸어야 하는 점이 저로선 좀 어려웠어요.” 하지만 시나리오 있는 영화라는 말에 숨은 더 무거운 뜻은 ‘상업적 대중영화’일 테고, 이는 장르적 캐릭터의 완성을 배우가 온전히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로 연결된다. 지난해 6월 <미쓰GO> 촬영을 앞두고 고현정은 눈에 띄게 체중을 줄였다. “이 영화는 제 눈빛, 발성, 소위 연기 기교를 뺄 수 있는 한 다 빼고, 보이는 걸로만 확 설명되는 부분이 50% 이상 돼야 한다고 판단했어요. 시나리오를 보고 떠올린 천수로의 이미지가 나뭇가지에 옷이 툭 걸려 있는 듯한 모습이었거든요. 여기에 조상경 의상팀장님이 소매길이를 늘려 손가락까지 감추고 후드를 뒤집어쓰고 다니는 스타일을 더해주셨어요. 역할을 만들 때 남에게 기대어가는 경험을 별로 못해봤는데 훌륭한 스탭을 만나니 큰 걸 해결해주시는구나, 감사했어요.”

천수로의 옷차림으로, “오라 오라, 수로!”라고 명랑한 주문을 외며 스튜디오 조명 안으로 걸어 들어온 고현정의 눈과 코가 잠시 뒤 빨개지더니 울컥 일그러진다. 떠나는 친구를 차마 못 붙잡아 “가지 마” 애원조차 녹음기 앞에서만 겨우 입 밖에 내던 그 여자, 수로가 온 거다. 천수로는 스타 고현정이 세상에 되도록 들키고 싶지 않았던 부분을 전면에 드러낼 것을 요구하는 캐릭터다. 원인은 달라도 수로가 처한 고립은 고현정에게 생경한 상황이 아니다. “(연예인 생활이나 결혼 이전에도) 고립이나 열외의 경험은 익숙해요. 일단 키부터 너무 컸으니까. 반대급부로 그런 티를 절대 안 내고 싶어 하는 제가 형성됐는데, 수로는 반대로 티를 내는 사람이죠. 수로의 증세 뒤에는 부모의 사고에 관한 트라우마가 있어요. 과한 애정을 받고 자라던 아이가 제가 잘못한 것 없이 모든 걸 박탈당하고 자기가 삐쳐 있음을 무의식적으로 표내는 거죠.” 천수로는 주인공인데도 영화 중반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끌려다니고 리액션을 주로 한다는 점에서 특이한 경우다. 수동성을 표현함으로써 후련해졌다면 이상하게 들리지만 그것이 바로 고현정의 <미쓰GO> 체험이다. “밖에서는 제가 모든 걸 주도적으로 결정하는 사람이라고 여기지만 제 입장에서는 상황에 밀려 하는 일도 많거든요. (웃음)” 인물과 맨살이 닿아 있다 보니 자칫 연기의 아이디어를 내지 못하고 부지중에 ‘내 짓거리’를 해서 영화가 탁해지면 어쩌나 하는 고민은 덤이었다. 거꾸로, 천수로를 그려가다 보니 본인의 두려움과 대결할 일도 생겼다. 타고난 공포증을 무릅쓰고 수심 5, 6m의 수조에 몸을 던졌고, 아이들과 마지막 여름을 보낸 추억으로 말미암아 마음속 금단구역으로 울타리쳤던 부산 바닷가에도 한 발짝씩 다가가 마침내 걸어보았다. “부산에서 촬영하지만 거기 가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 라는 나름의 웃긴 금지가 있었어요. 실은 못할 거 같으니 주체적으로 결심한 척한 건지도 몰라요. 그런데 자꾸 눈에 보이니까… (사이) 처음엔 밤에 혼자 몰래 밟아보고, ‘해보자. 해야 해’ 하는 이상한 강박으로 다음엔 낮에 숙소 돌아오는 길에 별일 아닌 척 들러보고. 수로처럼 제가 그랬던 거 같아요. 영화가 아니었다면 못했겠죠. 고마운 직업이에요.”

삶에 능숙한 역을 할 준비가 되었어요

고현정의 이력에서 수로처럼 주저주저하는 여자는 <여우야 뭐하니>의 성인잡지 기자 병희 정도다. “병희는 그래도 괄괄한 데가 있죠. 속이 어떻든 작심하면 사회생활은 무리없이 돌아가요. 하지만 수로는 제 안의 병적인 부분을 80% 이상 순발력있게 끌어내야 하는 문제였어요. 일하는 동안 제가 보이는 여우스러움, 사람 만나기 힘들어하면서도 일단 자리에 나가면 짐짓 더 열심히 즐기는 표면 뒤의 힘든 지점을 꺼내야 했어요.” 얼핏 생각하면 벌거벗으면 되니 일이 단순할 성싶지만 배우 입장에서는 반대였다. 다른 작품은 현장에 나오면서 한번 일하는 자아로 무장하고 집중을 유지하면 됐지만 이번에는 들락날락하는 단계가 하나 더 생긴 셈이니 말이다. 여기까지만 해도 ‘꼬임’이 많은데 영화가 반환점을 돌면 천수로는 급기야 표변한다. 달라도 한참 다른 수로A와 수로B의 동일성을 고현정은 어디서 구했을까? “빨간 구두(유해진)와의 멜로드라마에서 잡았어요. 수로의 갑작스런 기지와 괴력도, 아무도 믿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 어렵게 마음을 주었다가 실망한 충격의 깊이와 연관해 이해할 수 있었어요.” 한데 <미쓰GO>의 멜로드라마 또한 만만치 않다. 온 우주가 로맨틱한 계기로 충만한, 고현정이 그간 TV에서 섭렵해온 본격 멜로에 견주어볼 때 코미디와 액션까지 아울러야 하는 <미쓰GO>는 연애 감정에 충분히 명분을 주는 각본은 아니다. “설명이 부족해 보일 수 있지만 수로는 상호적 감정을 아예 모르고 그냥 본인이 생각하고 느낀 것만 일방통행하는 애라고 해석했어요. 그래서 객관적으로는 계기가 미흡한 상황인데 수로 입장에서는 충분할 수 있는 거죠. 연애 경험이 없어서 다른 남자와 비교하거나 의심할 데이터가 없으니까.”

질문 많고 상념 많은 여정이었다. 뒤늦은 첫 상업영화를, 도합 8개월에 걸친 부산 로케이션 촬영으로 완주하고 난 고현정은 어느새 영화를 찍는 당시에는 미처 품지 않았던 자문에 대한 대답까지 <미쓰GO>를 통해 돌려받은 기색이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많은 면에서 저로선 ‘공정하게’ 유보없이 최선을 다해봤다는 기분이에요. 그래서 이제는 <미쓰GO>를 선택하기 전에 주저했던 작품들도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진짜 성인 연기, 이를테면 엄마 역도 할 준비가 됐다고 느껴요. 컴백 이후 여러분이 저를 많은 일을 겪은 능수능란한 ‘어른’으로 보셨지만 제 감각엔 떠나 있던 10년은 없었던 시간이고 스물둘에서 곧장 연결된 것만 같았거든요. 그런데 천수로를 끝으로 삶에 능숙하지 않은 역할은 졸업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배경그림 iToNGtOng_조연주·스타일리스트 황정원·메이크업 한마음·헤어 김정한·의상협찬 이자벨 마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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