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팜므파탈 그녀의 비극적 사랑 <폭풍의 언덕>
2012-06-27
글 : 이현경 (영화평론가)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은 문학사에서 손꼽히는 인상적인 연인이다. 둘은 서로를 묶고 있는 운명의 끈을 놓지 못한 채 격정적인 사랑과 맹렬한 파국의 순간을 함께한다. 자신을 학대한 인물에게 처절한 응징을 하고 첫사랑을 되찾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히스클리프의 어두운 집념과 구둣발로 남자의 얼굴을 짓밟고 죽어가면서도 연인의 삶을 놓아주지 않는 캐서린의 불같은 열정은 한패가 되어 보는 이의 심장을 뒤흔든다. 비극적 사랑 이야기인 <폭풍의 언덕>은 서른살에 요절한 에밀리 브론테가 남긴 유일한 소설이다. 영국 요크셔 지방의 황량한 언덕 위해 세워진 저택(워더링 하이츠)에서 벌이지는 격정의 서사는 영화화된 것만 8번으로 알려져 있다.

워더링 하이츠의 주인 언쇼는 고아 히스클리프(제임스 호손)를 집으로 데려와 자식처럼 키운다. 그러나 히스클리프는 처음부터 자신을 싫어하는 힌들리(리 쇼), 첫눈에 호감을 표시하는 캐서린(카야 스코델라리오)과 형제로 지내면서 복잡한 내면을 지닌 인간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으로 워더링 하이츠의 주인이 된 힌들리는 히스클리프를 하인처럼 부리고, 캐서린은 야생의 소녀에서 숙녀가 되어 히스클리프에게 이질감을 준다. 학대와 갈등을 견디지 못한 히스클리프는 가출하고, 몇년 뒤 이들이 재회하면서 진정한 비극은 시작된다.

안드레아 아놀드 감독은 세 번째 장편영화인 <폭풍의 언덕>에서 파격적으로 히스클리프 역에 흑인을 캐스팅하였다. 그동안 히스클리프 이미지를 대표하던 로렌스 올리비에와는 사뭇 다른 새로운 히스클리프의 출현이다. 히스클리프를 흑인으로 설정하면서 사랑의 장벽은 한층 높아졌으며 이들이 떨어질 나락의 심연도 깊어졌다.

캐서린은 소설과 영화에 등장하는 그 누구보다 강렬한 여자다. 새의 깃털 한 가닥에서 생명의 숨결을 느끼는 섬세함과 연인의 상처를 혀로 치유하는 과감함을 동시에 지닌 이 여자는 손에 쥘 수도 놓아버릴 수도 없는 존재다. 죽는 그 순간까지 캐서린은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화해나 구원을 원하지 않는다. 캐서린 역을 맡은 신예 카야 스코델라리오는 주변 인물 모두를 몰락시키는 팜므파탈 캐릭터를 완벽히 소화한다. 영화 전반부보다 후반부에 몰입도가 높은 것은 카야 스코델라리오 덕이다. 이번 <폭풍의 언덕>은 기존의 어떤 버전보다도 공간적 배경 묘사에 공을 들였다. 시도 때도 없이 비바람이 몰아치는 광막한 풍경은 비극적 사랑 이야기에 입체감을 불어넣는다. 소설을 읽으며 상상했던 관념적 공간이 생생한 시각적 이미지로 재현되었을 뿐 아니라 영화가 재해석한 자연의 묘사는 인물 이상으로 관객을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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