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전영객잔]
[신 전영객잔] 코스튬 드라마가 옷을 벗을 때
2012-07-12
글 : 김혜리
각색의 고삐에서 탈출하기 위한 <폭풍의 언덕>의 몸부림

“각색은 절대 안 하겠다고 떠들고 다니더니, 결국 <폭풍의 언덕>을 하냐고 주변 사람들에게 조롱당했어요.” 지난 1월 열린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서 <폭풍의 언덕> 상영 전 공개토크에 나선 안드레아 아놀드 감독은 청중을 여러 번 웃겼다. 그녀는 관습적인 대답을 체질적으로 못 견디는 사람으로 보였다. 아놀드는 대뜸 이 영화가 싫다고 말했고 그럼 다른 전작들은 마음에 드느냐는 사 회자의 질문에, 기본적으로 본인의 작품을 다 싫어하는데 <폭풍의 언덕>을 제일 싫어한다고 대답했다. 완성도에 대한 불만이라기보다 영화로 인해 2, 3년 동안 고통, 폭력, 사도마조히즘의 그늘 속에 살아야 했던 스트레스의 표현이었다. 극장의 불이 꺼지기 직전 안드레아 아놀드는 남말하듯 짓궂게 경고했다. “화면을 보고 얼마나 실망하시건 현실 풍경은 그것보다 훨씬 추레했어요. 여러분은 객석에서 두 시간 보면 그만이지만 난 몇주 동안이나 하루에 10시간씩 저기 있었다고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지금부터 당하실 일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원작의 무의식을 향하여

어린 캐서린의 머리칼이 어린 히스클리프의 뺨을 간지럽힌다. 소녀의 향기에 굶주린 소년이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린다. 말 갈기를 빗질한 바람은 곧장 동시녹음 마이크를 두드리고 태양광은 정통으로 렌즈를 찔러 얼룩을 남긴다. 관객은 모든 감각이 과민해짐을 느낀다. 로비 라이언의 카메라는 황야를 배회하는 인물을 멀리서 찍는 게 아니라 키 큰 풀 사이를 직접 헤집고 다닌다. 따갑다. 진흙은 인물의 발목을 붙들고 늘어지고 얼굴에 튀어 흘러내린다. 전기조명은 최대한 배제됐고 화면 밖 음악은 없다. 텍스처(texture)를 우선 전달하는 <폭풍의 언덕>은 촉각적이라는 면에서 또 다른 ‘3D영화’다. 통상 코스튬 드라마 장르와 가장 멀다고 간주되는 시네마 베리테적 양식과 해석이 따라붙지 않는 파편적 장면으로 구성된 초반 1시간 서사를 보고 있는 동안, 본래 각색 작업이 취향이 아니라던 감독의 말이 머릿속에서 자꾸 부풀어올랐다. 암시에 걸린 탓일까? 안드레아 아놀드의 <폭풍의 언덕>은 괴이하게도, 마치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이 그것을 보고 들은 다음 재현하고 주석을 단, 소설의 제재인 것처럼 보였다. 각색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면서도 꼼짝없이 고전을 영화화하는 입장에 처한 이 당찬 감독은 혹시, 원작 소설의 존재하지 않는 원작 같은 영화를 만듦으로써 각색이라는 개념에서 탈주해버린 것이 아닐까?

아놀드의 <폭풍의 언덕>은 ‘감히’ 소설이라는 양식 너머에 있었던 최초의 충동에 가닿고자 한다. 에밀리 브론테로 하여금 이 소설을 쓰도록 밀어붙인 에로틱한 욕망과 잠재의식, 분노를 상상한 다. 그리고 19세기 소설 양식과 당대의 매너와 완곡어법의 포장에 감싸인 그것을 움켜잡아 끌어내려 한다. 말하자면 안드레아 아놀드는 바즈 루어만이 MTV 스타일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취한 경로와 반대 방향에서 출발해 같은 지점에 도착하려고 한다. 이 영화를 보고 비로소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을 이해했다는 관객이 있는 것도 그러므로 무리는 아니다. 아놀드판 <폭풍의 언덕>은 고전 문학을 읽을 때 현대 독자가 감촉하곤 하는 나와 이야기 사이에 드리워진 엷은 커튼이 걷히는 쾌감을 선사한다(이 해방감은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이 록우드라는 1인칭 화자에서 시작해 가정부 넬리 딘이 들려주는 이야기로 진입하는 두겹의 거추장스런 액자를 두르고 있기에 배가된다). 그리고 <폭풍의 언덕>이라는 텍스트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실은 그동안 만들어진 영화와 드라마의 미장센에 의해 매개된 것이었다고 간접적으로 주장한다. 누군가가 <폭풍의 언덕>을 도발적인 수정주의적 해석이라고 말한다면 감독은 깜짝 놀라며 이보다 교조적인 해석이 있었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유년에만 가능한 사랑

바즈 루어만이 클래식의 아우라에 가려진 셰익스피어의 세속성과 관능, 폭력성을 환기시켰다면, 안드레아 아놀드가 작심하고 파고든 <폭풍의 언덕>의 핵심은 유년의 성애와 사도마조히즘이다. 캐서린의 죽음 이후 히스클리프가 보이는 시체애호증(necrophilia)과 심리적 고통을 동물학대로 해소하는 설정도, 모두 원작에 있긴 하지만 어떤 판본보다 강렬하고 길게 묘사됐다. 빌리 와일더판 1939년작이나 피터 코스민스키판 1992년작 영화와 비교해 새로운 <폭풍의 언덕>은 어린 캐서린(섀넌 비어)과 히 스클리프(솔로몬 글레이브)의 스크린 타임이 월등히 길다. 심지어 캐서린은 소녀의 모습인 채로 에드가 린튼의 청혼을 받는다. 안드레아 아놀드와 올리비아 헤트리드가 쓴 시나리오는 캐시의 죽음 이후를 가장 무성의하게 처리한 각색이기도 하다. 아놀드는 나이든 히스클리프의 복수나 다음 세대로 유전된 비극과 궁극적 화해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전작 <레드 로드>(2006)와 <피쉬 탱크>(2009)에서도 아놀드의 주인공들은 복수에 해당하는 극단적 행위를 하지만 이내 상대를 벌하는 일이 자신의 진짜 필요가 아님을 깨닫고 돌아선다. 현대 여성인 그들에게, 복수는 결과보다 시도했다는 사실이 중요한 통과의례지만 19세기 초 남성 히스클리프를 유사한 방식으로 움직이기는 어려웠으리라. 아놀드판 <폭풍의 언덕>의 구조는 한쪽으로 치우쳐 유년의 사랑과 그 후주(後奏)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히스클리프야”라는 원작의 유명한 대사로 요약되는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나와 타자가 한 덩어리인 어린이의 사랑이다. 결혼 외에 장차 사회적 이동의 가능성이 없는 소녀는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신비로운 소년을 통해, 소속과 안정감이 결핍된 소년은 놀이친구이자 보살핌을 주는 소녀를 통해 비로소 온전한 한 사람이 됐다고 느낀다. 이런 사랑이 살아남아 성년의 세계로 진입하는 일은 불가능해 보인다. 보통 고전문 학을 각색한 영화 속 인물들은 사람 아닌 신처럼 말하는데 <폭풍의 언덕>의 인물들은 사람 아닌 동물처럼 행동한다. ‘문예물’이면서도 대사가 극히 적고 촉각적 이미지가 감정선을 대신하는 <폭풍의 언덕> 특유의 스타일은 영화의 심장이 대화보다 몸짓으로 커뮤니케이션하는 아이들의 사랑이 있기에 가능하다. 성(城)이라 불리는 워더링 하이츠의 높은 바위에 캐서린과 히스클리프가 놀러간 장면을 1939년작과 2011년작이 각각 어떻게 연출했는지 비교해보자. 전자에서는 성인 배우 멀 오베론과 로렌스 올리비에가 바위 앞에 똑바로 서서 “너는 나의 여왕”이라는 요지의 멋진 밀어를 주고받는다. 70여년 뒤, 생애 첫 스크린 연기를 하는 섀넌 비어와 솔로몬 그레이브는 그냥 말없이 배를 깔고 너럭바위에 나란히 누워 눈 아래 펼쳐진 언덕을 내려다본다. 예컨대 <제인 에어>라면 이런 연출을 상상하기 어렵다. 제인과 로체스터의 사랑은, 표면적으로 고용주-피고용인으로서의 계급적 거리를 깍듯이 지키면서도 또박또박 진심을 교류하고 논쟁하고 구애하는 대화 안에 거하기 때문이다. <제인 에어>는 로체스터와 제인이 말하는 내용이 중요하고 <폭풍의 언덕>은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이 말하지 않는 것들이 중요하다(그런 면에서 2011년작 <제인 에어>의 캐리 후쿠나가 감독은 현명했다). <폭풍의 언덕>의 에로티시즘 역시 어린 짐승들처럼 물고 핥고 뒹구는 소녀 캐서린과 소년 히스클리프 사이에 있다. 연구자들은 브론테 시대에 여성이 남성과 스스럼없이 스킨십을 주고받을 수 있는 시기는 유년뿐이었다고 지적한다. 남자형제와 동등하게 누리던 육체적 자유를 일정한 나이에 이르면 금지당한 시대의 여성 작가의 소설을 영화로 옮기며 유년기의 섹슈얼리티를 부각시킨 아놀드의 선택은 온당해 보인다.

에덴동산의 홈무비

코스튬 드라마는 과거 상류 계급의 실내장식과 의상, 소품을 카메라를 따라 눈으로 쓰다듬는 쾌락이 매혹의 큰 몫을 차지하는 페티시즘의 장르다. <폭풍의 언덕>은 갖춰서 차려입기는커녕 벗을 수 있는 한 헐벗은 시대극이다. 캐서린은 트레이너 스타일의 바지를 입고 뛰어다니고, 바람이 들이치는 남루한 언쇼가는 빌리 와일더가 연출한 1939년작 속 ‘워더링 하이츠’ 저택이 요크셔의 황야보다 미국 남부의 저택에 가깝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옷과 집뿐만 아니라 풍경을 제시하는 태도도 일관된다. <폭풍의 언덕>의 자연이 발하는 아름다움은 내적 갈등 없는 순연한 우미(優美)와 거리가 먼, 한없이 추(醜)에 근접한 아름다움이다. 독자적 스펙터클로 기능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 요크셔의 풍광은 인물이 부대껴야 하는 날씨이자 조건으로서 영화적 의미를 갖는다. 자연사 다큐멘터리인가 싶을 정도로 많이 등장하는 <폭풍의 언덕>의 곤충과 새, 동물 인서트는 테렌스 맬릭 영화에 비견되기도 했지만 땅에 떨어져 버르적거리는 아놀드의 나비와 새들은 맬릭의 그것과 달리 신의 뜻을 반추하게 하는 명상의 쉼표가 아니라 인물들과 동등한 조건에 처한 생명체다. 사랑할 때나 증오할 때나 <폭풍의 언덕> 속 인간들은 서로를 동물처럼 대한다.

<폭풍의 언덕>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두 가지 의외성을 꼽는다면 히스클리프로 흑인 배우를 캐스팅했다는 점- 원작의 히스클리프 묘사는 상당히 모호해서 독자에 따라 거의 모든 인종을 투사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아프리카계 배우 캐스팅으로 감독이 공격하고 있는 대상은 19세기 잉글랜드의 인종편견이라기보다 우리의 편향된 상상력이라고 보는 편이 옳다- 과 광야가 배경인 영화치고 상식을 벗어난 4:3의 화면비율이다. 옛날 TV의 화면비율에 해당하는 4:3은 가정용 TV조차 가로가 길어지면서 특정의도를 품은 미학적 선택으로 “왜 하필?”이라는 의문을 피해갈 수 없게 됐다. 촬영감독 로비 라이언의 대답을 보자. “안드레아는 4:3을 정말 사랑한다(전작 <피쉬 탱크>도 같은 비율이다). 이 포맷에는 어떤 정직성이 있다. 또한 4:3은 관객이 특정한 인물을 보도록 초점을 맞춰주기 때문에 한 사람의 시점을 표현하는 데 좋다. 안드레아가 즐기는 초상화적 필름메이킹에 매우 효과적이다.” 요컨대 <폭풍의 언덕>의 황야는 인물과 피부접촉하는 환경으로서의 황야다. 40도 경사의 비탈을 오르내리는 핸드헬드 카메라로, 남매로 길러진 소년과 소녀를, 4:3 화면으로 담아낸 <폭풍의 언덕>은 결과적으로 에덴동산의 홈무비에 근접한 형상을 띤다. <폭풍의 언덕>보다 먼저 빈곤의 미학으로 코스튬 드라마 장르를 충격했던 감독 데릭 저먼은 우연히도 이런 격언을 남겼다. “홈무비만 한 것은 없다.”(There is no place like home-movie)

절반의 성취, 예정된 실패

앞서 열거한 선택을 돌아볼 때 캐서린과 히스클리프가 유년의 에덴에서 추방되자마자 영화 <폭풍의 언덕>이 급격히 무너지는 것은 불가피한 결과다. 돌아온 어른 히스클리프와 캐서린 린튼 부인은 영화 전반부처럼 마술적으로 소통할 수 없다. 세속을 경험한 히스클리프는 언어적 인간이 됐고 2년의 공백은 무언의 교감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전반부의 강렬한 잔상은 후반의 성인 배우를 캐서린과 히스클리프로 동일시하기 어렵게 만들고 어색한 연기를 부각시킨다. 이를 인식하는 감독은 자꾸 파편적 플래시백에 의지한다. 원작 <폭풍의 언덕>의 구도를 프로이트 심리학의 틀로 정리한 린다 골드는 히스클리프, 캐서린, 에드가를 한 인물의 세 얼굴로 파악했다. 원초적 욕망을 대변하고 뿌리가 불명한 히스클리프는 이드, 사회와 문명의 규범을 체화한 에드가는 슈퍼에고이며, 히스클리프에게 끌리지만 사회를 의식하기에 둘 사이에서 협상하는 캐서린은 에고라는 도식이다. 어떻게든 남편과 히스클리프를 화해시키려고 애쓰는 캐서린의 제스처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영화 <폭풍의 언덕>의 캐서린은 처음부터 이드에 치우친 인물로 설정됐기에 후반부의 어떤 행동도 서사적 의미나 설득력을 발생시키지 못한다. 안드레아 아놀드는 지금까지 간과된 원작의 육체성과 신경계를 영화로 데려왔지만 작품 전체를 포괄하는 비전을 세우는 데에는 실패했다. 어쩌면 이 영화는 청혼받은 캐서린의 고백을 엿듣고 히스클리프가 폭풍 속으로 뛰쳐나간 순간 끝났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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