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엔 종북세력만 있을까. 그보다 더한 종미(從美)집단도 있다. 김경만 감독의 첫 번째 장편다큐멘터리 <미국의 바람과 불>은 한국의 종미주의 60년을 다룬다. 한국 소녀들이 “미국은 나의 조국, 나의 고향”이라고 노래하고, 온 국민이 “미군 철수를 반대하는” 기도를 올리고, 늘씬한 미스 유니버스 미녀들이 한국을 찾아 퍼레이드 행진을 벌이고 있을 때, 과연 이 땅에선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 김경만 감독은 기존의 기록영상들을 조합하는 것만으로도 한국의 종미주의가 어떤 끔찍한 역사적 결과를 낳았는지를 손쉽게 증명하며, 직접적으로 발언하지 않고서도 어떻게 전복적인 다큐멘터리를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혹시 지루하고 난해한 다큐멘터리 아니냐는 오해를 품었다면 서둘러 접어두시길.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관객상을 수상했다.
-이전에 만들었던 단편에서도 독재자, 국가보안법, 전쟁, 선거 등의 주제를 다뤘다. 해방 이후 모순과 기만의 현대사를 다룬다는 점에서, <미국의 바람과 불>은 일종의 종합판 격인데.
=장편이라고 해서 종합판은 아닌 것 같고. (웃음) 실제 세계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생각은 극심한 차이가 있는데도 어떤 생각들이 계속 지배적인 힘을 갖게 되는 건 무슨 까닭일까. 사실과 유리된, 세계와 괴리된 믿음의 체계들을 따져보고 싶었던 것 같다.
-흥겨운 퍼레이드 사운드가 흘러나올 때 보여지는 건 끔찍한 전쟁터의 참상이다. 첫 장면부터 마지막까지 이미지와 사운드를 비틀어 접붙였다.
=카메라가 어떤 풍경을 찍고 있는데 내 머리에선 다른 풍경이 영사되는 느낌을 담고 싶었다.
-유사한 앵글의 이미지들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는데, 그 의미가 달라진다. 이를테면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때 촬영한 항공촬영 장면들은 비슷해 보이지만 앞뒤 숏으로 인해 전혀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질서가 변한 건 없다. 다만 우리의 위상이 변한 것일 텐데. 흔한 말로 밑바닥에서부터 신분상승을 했는데, 사실 신분이 상승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거다. 후반부에 나오는 것처럼, 한국 사람들은 관중석에서 박수치는 이들일 뿐이다.
-연출자가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것까지 관객이 보고 떠올려주기를 바란다고 여러 번 말했다. 영화제 상영 때 접했던 관객 반응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뭔가.
=극소수이긴 하지만, 정부의 선전영화 아니냐고 오해한 분도 계셨다. (웃음) 개인적으로 자료를 수집하면서 박정희와 육영수가 비행기 타고 미국에 갈 때 기내 전화를 사용하면서 신기해하는 장면들은 그야말로 영화적이었다. 촌스러운 한국 사람의 대표 같은 느낌이랄까. 미국에 대한 한국 사람의 선망을 그만큼 잘 보여주는 것도 없다.
-1980년 5월에 관한 영상들도 국립영상제작소에서 구한 것인가.
=가능하면 광주장면을 많이 넣고 싶었는데 입수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관객이 쇼크를 받는 장면도 <오월愛>의 김태일 감독님이 갖고 있던 것을 쓴 것이다. 기존 영상자료를 활용해야 했기 때문에 한계가 많았다. 베트남전쟁 당시 연출해서 만든 영상 중 한 병사가 고함을 지르면서 달려나가는 얼굴 클로즈업은 좀더 길게 쓰고 싶었는데 편집본이 너무 짧아서 아쉬웠다.
-88올림픽에서 1998년의 IMF 상황으로 건너뛴다. 그러면서 김대중 역시 이전의 독재자들과 같은 부류로 비쳐진다.
=박정희와 김대중은 흔히 독재와 민주의 상징으로 불리지만, 실은 지배라는 같은 몸통의 두팔임을 보여주고 싶었다.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풀어가는 다큐멘터리에는 관심이 없나.
=많이들 하는 거니까 굳이 그 길로 또 갈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사실 한 사람으로 요약해서 무엇을 이야기하기란 쉽지 않다. 삶과 사회는 복잡하게 엉켜 있으니까. 이거다, 라고 하나로 딱 이야기할 수도 없을뿐더러 그렇게 하려면 뭔가 진짜인 것처럼 만들어서 보여줘야 하는데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고.
-영화제작소 청년엔 어떻게 들어가게 됐나.
=<오! 수정> 작업하면서 당시 연출부였던 박찬옥 감독님을 알게 됐다. 성향이 맞는 것 같고 그래서 소개받아 들어갔다.
-<오! 수정> 때는 제작 스탭으로 일했던 건가.
=스탭이 아니라 배우였다. (웃음) 프로덕션 PD인 영수(문성근) 아래서 일하는 조연출 역할을 맡았다. 홍상수 감독님을 좋아해서 한번쯤 그의 영화에 출연해보고 싶었다. 건조하고 사실적인 캐릭터니까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래서 공개 오디션에 참여했다. 당시에는 혼자서 비디오로 뭔가를 만들어보던 시절이었다.
-다음 작품으로 말이 필요없는 1950∼70년대에 관한 기록물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말이 안 나오는 영화다. 무성영화처럼 음악만 흐르고. <미국의 바람과 불>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