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녀가 되길 갈망하는 소녀랄까. 아니면 소녀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숙녀랄까. 짧은 파마머리며, 짙게 그려진 아이라인이며, 입술을 생기있게 뒤덮은 분홍 립스틱이며, 스튜디오의 문을 열고 들어온 남보라는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았다. 우리가 알던 그는 언제나 교복을 입은 사춘기 소녀이자 누군가의 여동생 혹은 딸이 아니었던가(<고死 두 번째 이야기: 교생실습>(2010), <써니>(2011), <하울링>(2012)). 그러나 잊고 있는 게 있었다. 아이는 언젠가 성장해 어른이 된다는 진리를. 그것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소녀’ 남보라가 익숙한 관객에게 호러 옴니버스영화 <무서운 이야기>의 단편 <콩쥐, 팥쥐> 속 그의 모습은 다소 생소, 아니 충격 그 자체다. 동명의 전래동화를 현대적으로 각색했다는 이 작품에서 남보라가 맡은 역할은 ‘공지’(정은채)의 동생 ‘박지’. 언니 공지가 가진 거라면 뭐든지 따라 하고, 빼앗아야 직성이 풀리는, 욕심 많은 동생이다. 예쁘게 보일 수만 있다면 악착같이 얼굴에 칼을 대고, 공지가 선물받은 명품 브랜드의 옷도 자기 것인 양 빼앗아 입고, 테이블 아래로 발을 뻗어 형부가 될 민 회장(배수빈)의 ‘그곳’을 과감하게 건드리는 등 욕망에 충실한 행동은 그간의 남보라에게서 떠올릴 수 없는 행동이자 이미지였다.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남보라 역시 자신이 그런 역할을 맡게 되리라고는 상상 못했다고. “박지가 아닌 공지를 떠올리며 시나리오를 읽었어요. 그런데 홍지영 감독님께서 제가 맡을 역할이 박지라고 하시더라고요. 박지? 그런 캐릭터는 한번도 안 들어왔거든요. 의외라는 생각에 감독님을 만났어요. 한번도 안 해본 캐릭터라고 말씀드렸더니 감독님께서 ‘그냥 날 믿고 따라오라’고 하시더라고요.” 홍지영 감독의 자석 같은 매력에 이끌려 그날 그는 큰 도전을 하기로 결심했다. “이 영화에서는 아기 티를 벗자. 5명이 각자의 욕망을 좇는 영화인 만큼 네 욕망을 쫓아가라”는 감독의 팁과 함께.
캐릭터를 만드는 방법
“굉장히 개방적인 아이인 것 같아요.” 남보라는 박지를 한마디로 이렇게 설명한다. 그렇게 요약한 이유를 좀더 들어보자. “가지고 싶어하는 건 뭐든지 가질 수 있다고 믿는 친구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박지는 자신의 여성성을 주무기로 활용해요. 만약 보수적이거나 꽉 막힌 생각의 소유자라면 그게 가능할까요? 성적인 것을 비롯해 모든 면에서 개방적이기 때문에 그런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럴듯한 분석이다. 그러나 거리를 두고 캐릭터를 분석하는 것과 캐릭터가 되기 위해 그 옷을 입는 건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특히, 13명이나 되는 형제자매와 함께 화목한 가정에서 부모님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란 그에게 박지는 상식적으로 이해가 잘되지 않는 여자인 건 분명하다. “그래서 감독님께 캐릭터 자체만 보면 이해가 되는데, 남보라로서 박지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어요. 엄마가 보는 앞에서 민 회장의 목에 키스하는 장면이 나와요. 부모 앞에서 그런 강한 스킨십이 대체 가능한 거냐고 물었어요. 감독님이 뭐라고 대답한 줄 아세요? 참 순수하대요.(웃음) 그날 촬영이 끝난 뒤 밥 먹으러 가는 길에 엄마 역을 맡은 나영희 선생님께서 ‘네가 이해할 수 없는 박지의 행동은 박지의 못된 엄마 때문에 성립이 가능하다. 그 전제를 잘 받아들여야 한다’고 조언을 해주셨어요.”
물론 올해 23살인 남보라가 그 말을 단번에 이해한 건 아니다. 아니, 어쩌면 남보라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는 선배가 해준 그 조언을 자기 식으로 해석하고, 소화하려 했다. 그게 “박지가 풍기는 분위기”였다고. “성적인 매력을 이용해 욕망을 채우려는 캐릭터인 만큼 겉으로 드러나는 뉘앙스와 분위기를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했어요. <블랙스완>에서 니나(내털리 포트먼)가 흑조로 변했을 때의 모습을 박지의 가이드로 삼았어요.” 때로는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버텨야 하는 법. 아직 경력이 얼마 되지 않는 남보라에게 이 사실을 깨닫는 건 매우 중요하다. 어쨌거나 강형철 감독이 “남보라의 실제 성격을 참고해 만들었다”는 <써니>의 어린 금옥이나 “캐릭터와 이미지가 맞다는 이유로 캐스팅된”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의 천방지축 민화 공주 등 자신과 비슷하거나 익숙한 면모를 꺼내 보였던 전작과 달리 이번 작품은 생전 보지 못할 캐릭터를 새로 만들어가는 작업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감독과 대화를 많이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소녀는 성장한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무서운 이야기>의 <콩쥐, 팥쥐>는 “그동안 쌓여 있던 가슴 속 응어리가 조금은 해소된 작품”이다. “전에는 아무리 ‘20살 넘었어요’라고 얘기해도 사람들은 ‘애 같아’, ‘학생 같아’ 라고 말했거든요. 물론 어려 보이는 게 장점이 될 순 있겠죠. 그러나 그런 얘기를 너무 많이 듣다보니 나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이번 영화가 개봉하면 아마 저를 보는 시선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고 있어요.” 배우로서 겨우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딛었지만 앞으로 남보라가 입어야 할 옷은 너무나 많다. 모든 배우가 그렇듯 그에게도 매번 연기라는 큰 산이 기다리고 있다. 드라마 <해를 품은달>의 방영 초반, 시청자 사이에서 ‘남보라, 연기 논란’이 일었던 적이 있다. 그때 겪은 마음고생이 많은 공부가 됐다고 한다. “드라마를 시작했는데, 인터넷에 계속 (남보라, 연기 못한다는) 글이 올라오고 있고. 다음 촬영이 한달 뒤면 무슨 준비라도 하겠는데, 드라마는 당장 내일이 촬영이니까. 첫회 방영된 뒤 이틀 정도 쉬었는데, 아무것도 못했어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되돌아보니 그 이틀이 너무 아까운 거예요. 차라리 그 시간 동안 대사 한줄이라도 더 연습을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앞으로는 남들 말에 일일이 영향을 받지 않고, 나를 믿고 부단히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어린 나이와 달리 스스로에게 냉정한 성격인 것 같다. “음, 냉정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발전이 있지 않을까요? 너무 편하면 지금의 위치에 안주할 것 같아서.”
그래서인지 남보라는 최근 2년 동안 영화 네편(<써니>, <하울링>, <무서운 이야기>, (아직 개봉하지 않은) <돈 크라이 마미>와 드라마 두편(<영광의 재인>(2011), <해를 품은 달>(2012)) 등 총 대여섯편을 찍으며 쉬지 않고 달리고 있나보다. 보다 많은 경력을 쌓아야 한다는, 어린 배우 특유의 조급함 때문은 아닐까. “조급함은 전혀 없어요.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을 읽었는데 거기에 그렇게 나와 있더라고요. 아직 20대밖에 안됐는데, 무엇 때문에 조급해하는가. 그때 딱 느꼈어요. 인생은 길잖아요. 지금 당장 누구보다 많은 작품을 빨리 해야겠다는 생각보다 좋은 작품과 캐릭터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오면 충실히 그 역할을 맡고. 그러면서 차근차근 하나씩 밟아나가다보면 그때 모습은 지금의 그것과 많이 달라져 있지 않을까요?” 맞는 소리다. 또박또박 내뱉는 그의 말을 들어보니 외모 꾸미는 시간만큼 속도 알차게 채워나가고 있는 게 분명했다. 사진 촬영을 마친 뒤 스튜디오 문을 열고 나가는 그의 뒷모습은 확실히 숙녀의 그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