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영화의 계절이다. 태양이 작열하는 계절이 찾아오면 특수를 노린 수많은 블록버스터가 쏟아져 나와 시원한 극장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하지만 여름이 진정 영화의 계절인 까닭은 각양각색 작지만 알찬 영화제가 다양한 방법으로 관객의 마음까지 시원하게 해줄 준비를 마친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정동진독립영화제는 여행의 향기가 난다. 수박 겉핥기 식으로 사진 찍고 눈으로만 후다닥 보고 나오는 ‘관광’이 아니다. 바람의 향기를 맡으며 찬찬히 걷다가 발밑 꽃 한 송이에 눈길을 빼앗기기도 하는 ‘여행’이자 휴식이다.
올해로 벌써 제14회를 맞는 정동진독립영화제에는 여름밤의 낭만과 흥취가 있다. 다가오는 8월3일부터 5일까지 강원도 정동진 정동초등학교에서 열리는 이 작지만 꽉 찬 영화제의 가장 큰 즐거움은 모든 영화가 야외에서 무료 상영된다는 점이다. 초등학교 운동장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영화를 보노라면 마치 내가 영화 속 한 장면에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질 만하다. 게다가 쉽게 접하기 힘든 보석 같은 독립영화를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으니 올여름엔 망설이지 말고 ‘별이 지는 하늘 영화가 뜨는 바다’로 여행을 떠나도 좋다.
야외상영이기 때문에 오후 8시 이후에야 겨우 영화를 볼 수 있지만 그만큼 알차고 엄선된 영화가 준비되어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 최아름 감독의 <영아>(2012)에서는 <은교>로 얼굴을 알린 배우 김고은의 새로운 얼굴을 만날 수 있다. 장례식장에서 나온 소년과 소녀의 데이트를 따라가는 영화는 그녀의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 가슴 한구석을 아련하게 뒤흔든다. 단순하지만 짧고 깊은 여운이 인상적인 이야기다. 제목부터 ‘효녀 심청’이 떠오르는 김정인 감독의 <청이>(2012)는 시각장애인 아빠와 어리지만 의젓한 딸의 가슴 따뜻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영특하고 귀여운 주인공 소녀 홍이를 보고 있노라면 입가에 절로 훈훈한 미소를 띠게 될 것이다. 반면 슬프고 서러운 소녀도 있다. 김준기 감독의 <소녀이야기>(2011)는 일제강점기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정서운 할머니의 인터뷰를 극화한 애니메이션이다. 소녀 정서운이 위안부로 전장에 끌려가게 된 이유와 일본군의 만행을 담담하게 고발하는 이 영화는 그 어떤 다큐멘터리보다 묵직한 울림을 지닌 채 진실이 세상에 널리 퍼지길 호소한다. 무겁고 슬프지만 외면할 수 없는 애니메이션이다.
2012년 미쟝센단편영화제 희극지왕 부문 최우수 작품상을 거머쥔 한승훈 감독의 <이기는 기분>(2011)은 집단따돌림과 폭력에 지친 두 학생의 소박한 바람을 기발한 상상력으로 풀어낸다. 자칫 심각할 수 있는 문제를 액션, 드라마, 뮤지컬 등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경쾌하게 풀어가는 자유분방함에서 영화적 상상력의 힘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홍석재 감독의 <Keep Quiet>(2011) 역시 대학과 기업의 유착 비리처럼 가볍지 않은 주제를 장르적으로 매끈하게 풀어가는 영화다. 도서관에서 주운 휴대폰 때문에 위기에 몰린 남자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건과 음모가 웬만한 스릴러영화 못지않은 완성도로 긴장감있게 펼쳐진다. 올해 전주영화제 한국경쟁 부문에 올랐던 최시형 감독의 <경복>(2012)은 비루하지만 왠지 웃음이 나는 씁쓸한 청춘들의 이야기다. 스무살을 앞둔 형근과 동환은 어디론가 막연히 떠나고 싶어 무작정 자취 생활을 계획하고 우연히 알게 된 학교 선배의 조언에 따라 넓은 세상으로 나갈 마음을 먹는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예상 밖의 전개와 미묘한 지점에서 터지는 공감의 실소, 결정적으로 독립영화답게 창의적인 에너지가 넘실대는 그야말로 신선한 영화다.
그 외에도 모두 휴식과 여행에 어울릴 훈훈하고 즐거운 영화 21편이 관객을 웃고 울리고 감동시킬 준비를 마친 채 바닷바람과 함께 대기 중이다. 별을 보기 위해 꼭 망원경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때론 주변을 어둡게 하는 것만으로도 별은 영롱하게 빛난다. 시골 초등학교에 모여 아기자기하게 빛나는 한국 독립영화의 작은 별들을 발견하는 재미는 올여름 추억의 잊지 못할 한 페이지를 장식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