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콜린 파렐이다. 1990년 당시 할리우드 최고 제작비 기록을 경신하며 만들어진 R등급 블록버스터 <토탈 리콜>이 23년 만에 다시 돌아온다. 콜린 파렐이 연기하는 더글라스 퀘이드는 원하는 기억을 심어주는 회사 ‘리콜’사를 찾았다가 스파이로 몰리고, 지금까지의 인생이 가짜로 두뇌에 심어진 기억일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힌다. 23년 만의 리메이크를 지휘하는 감독은 <다이하드4.0> <언더월드> 시리즈의 렌 와이즈먼이다. 전편보다 더 우울하고 현실적이라는 감독의 비전은 오로지 콜린 파렐을 통해 드러난다. 그러고 보면 그가 천하의 난봉꾼이래도 그의 연기가 우리를 실망시킨 적은 지금껏 한번도 없다.
아일랜드의 명배우들이 대거 출연한 <베로니카 게린>(2003)에 역시 아일랜드 출신인 콜린 파렐도 그 모습을 비춘다. 그가 맥주를 마시며 축구 경기를 보는 장면에서, 카메라가 비추는 인물은 흥미롭게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전설이자 ‘쿵후킥’으로 유명한 에릭 칸토나다. 두 사람 모두 다혈질의 터프가이들 아닌가. 혈기왕성한 콜린 파렐은 데뷔 이래 숱한 스캔들과 사건 사고를 일으키며 쉬지 않고 뉴스를 제공해왔다. 안타깝지만 오래전 비디오 파문도 있었고 파티를 즐기는 성격답게 파파라치에게 시원한 주먹질이 포착된 적도 있으며 안젤리나 졸리, 린제이 로한, 샐마 헤이엑, 공리, 브리트니 스피어스, 리한나 등 무수히 많은 여자 연예인과 염문을 뿌려왔다. 결국 무산되긴 했지만 바람둥이 면모로만 보자면 피어스 브로스넌의 뒤를 이어 ‘007’의 새로운 제임스 본드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스캔들 메이커로서의 행보와 별개로 그는 위대한 아일랜드 배우 계보를 충실히 이어가고 있는 탁월한 연기자다. 게다가 최근에는 익숙한 난봉꾼 이미지도 다소 희석되어 어딘가 마음을 다잡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토탈 리콜>의 원작인 필립 K. 딕의 단편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는 콜린 파렐의 현재 마음을 대변하고 있는 제목일지도 모른다. 지난날의 내 모습은 잊어달라고. 일단 <토탈 리콜>만큼은 그런 스캔들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바로 아내 ‘로리’를 연기한 배우가 감독 렌 와이즈먼의 부인인 케이트 베킨세일이기 때문(폴 버호벤의 1990년작 <토탈 리콜>에서는 샤론 스톤이 연기했다). 물론 또 다른 여자 제시카 비엘이 있긴 하지만.
과거는 잊어줘
<토탈 리콜>의 더글라스 퀘이드(콜린 파렐)는 평범한 노동자다. 1990년 작품에선 주인공이 화성에 가는 환상을 갖고 있는데 이번 영화에서는 화성은 아니지만(화성 대신 이번엔 유럽과 미국이 합쳐진 ‘뉴로메리카’와 ‘뉴상하이’라는 가상공간이다)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꿈을 반복적으로 꾼다. 그렇게 그는 매일 아침 의미를 알 수 없는 악몽에서 깨어나며 괴로워한다. 그러던 어느 날, 완벽한 기억을 심어서 고객이 원하는 환상을 현실로 바꿔준다는 ‘리콜’사를 방문해 자신의 꿈을 체험해보기로 한다. 하지만 기억을 심는 과정에서 의문의 사고가 일어나고 그는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전세계의 운명이 걸린 거대한 음모에 휘말리게 된다. 졸지에 스파이로 몰리게 된 퀘이드는 거대한 세력으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되고, 심지어 사랑하는 아내 로리(케이트 베킨세일)마저 자신을 죽이려 한다. 한편, 갑자기 자신 앞에 나타난 의문의 여인 멜리나(제시카 비엘)는 그에게 적에 맞서 싸우자고 말한다. 현실과 자신에게 심어진 기억의 경계에서 퀘이드는 점점 더 큰 혼란을 겪는다.
콜린 파렐은 필립 K. 딕 원작의 영화에 이미 출연한 적이 있다. <마이너리티 리포트>(2002)에서 최첨단 치안 시스템 프리크라임에 대한 감사를 위해 연방정보국에서 파견된 요원으로 나와 존 앤더튼(톰 크루즈)과 사사건건 대립했었다. 10여년이 흘러 이번에는 콜린 파렐이 그때 톰 크루즈가 연기했던 ‘쫓기는 남자’가 됐다. 그렇게 경찰과 정체 모를 반란군에 쫓기며 더글라스 퀘이드는 자신이 누군지 알 수 없게 된다. 어디까지가 꿈인지, 자신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게임에 내던져진 것이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2010년 작품에서 더글라스 퀘이드를 연기했던 아놀드 슈워제네거와의 비교로 나아간다. 영화의 성격 자체를 바꿀 수 있다 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두 사람의 퍼스낼러티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또한 그것은 2010년 작품과 비교해 가장 궁금증을 자아내는 요소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콜린 파렐은 별 부담감을 느끼지 않는 듯 보인다. “폴 버호벤이 만든 <토탈 리콜>의 열혈 팬일뿐더러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출연했던 <레드 히트> <코만도> <터미네이터> 등은 어렸을 적 내가 가장 좋아했던 영화들”이라는 그는 “그의 작품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가 맡았던 역할을 연기하는 것에 대해 솔직히 아무런 부담감이 없었다. 나중에 <프레데터>가 다시 만들어지면 또 출연하고 싶다”며 웃는다.
온갖 장르를 가로지르며
절대 아무도 믿지 말라! 이것은 <리크루트> (2003)에서 콜린 파렐이 절실하게 느꼈던 얘기일 것이고 <토탈 리콜>에서도 적용되는 말이기도 하다. <리크루트>에서 그가 고문을 당하면서도 얼마나 오랫동안 참으며 정보를 발설하지 않는가를 시험당하던 훈련장면은, 어딘가 리콜사의 의자에 앉아 있는 지금의 그의 모습과 닮았다. 예기치 않은 운명에 맞닥뜨려 그 스스로 헤쳐나간다고나 할까. 그것은 한편으로 맹렬한 작업속도로 자신의 위치를 탐색하고 있는 그의 현재 고민과도 닮아 있다. <토탈 리콜>은 그가 출연한 작품들 중 <알렉산더>(2004)와는 좀 다른 의미에서 여러모로 본격적인 상업적 대작 느낌이 강하다. “앞으로 남은 배우 인생 동안 블록버스터든 저예산영화든 가리지 않고 모두 참여하고 싶다. 완벽하게 여러 장르의 영화를 아우르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게 그의 얘기다.
그러고 보면 지난 몇년간 콜린 파렐은 배우로서의 진지한 모색의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느껴진다. 30대 중반을 넘어서며 어딘가 눈빛도 많이 누그러진 느낌이다. 가슴에 레닌과 스탈린의 문신을 하고는 완벽한 러시아 억양을 구사하며 수용소의 음지의 대장으로 군림했던 <웨이백>(2010), 범죄조직에서 벗어나 새 출발을 꿈꾸는 카리스마 넘치는 보디가드로 나온 <런던 블러바드>(2010), 기존 이미지를 완전히 산산조각내버린 ‘병신 같은 마약쟁이’이자 달팽이 모양의 대머리 분장 자체가 충격이었던 <스트레스를 부르는 그 이름 직장상사>(2011), 섹시한 뱀파이어 캐릭터가 절묘하게 어울렸던 <프라이트 나이트>(2011) 등은 <세상 끝의 집>(2004), <킬러들의 도시>(2008) 등에서 느꼈던 ‘원석’과도 같은 이 배우의 자질이 무한대로 확장하는 느낌을 줬다. <토탈 리콜>은 배우로서 여러 장르를 아우르고 싶다는 그의 욕망이 가장 극대화되는 지점일 것이다.
이제는 <킬러들의 도시>를 함께했던 마틴 맥도나 감독의 <세븐 사이코패스>의 촬영을 마쳤고, 스웨덴에서 <밀레니엄> 시리즈를 만들었던 닐스 아르덴 오플레브 감독의 <데드 맨 다운>을 촬영 중이다. <데드 맨 다운>에서는 가족을 잃고 복수를 위해 갱단에 잠입하는 헝가리 이민자로 나온다. 혈기왕성했던 시절을 지나 콜린 파렐의 배우인생 2막은 이제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