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전영객잔]
[신 전영객잔] 아이맥스가 시네마를 구해낼 수 있을까
2012-08-09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아이맥스로 보고 크리스토퍼 놀란의 미학적 태도를 생각함
<다크 나이트 라이즈>

X에게

친구, 네가 그토록 열광하는 영화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나도 드디어 보았어. 주말 아침 9시에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간편한 옷을 입고 집 근처 멀티플렉스 상영관으로 달려가 몇장 남지 않은 티켓 중 하나를 겨우 구해 보았어. 물론 나도 영화를 보기 전날에는 무슨 행사라도 되는 것처럼 흥에 겨워 전작 <다크 나이트>를 보며 복습했지만, 스포일러가 두려워 며칠 동안이나 인터넷조차 끊었다는 너 정도의 설렘은 아니어서인지 하여간에 엄청난 흥분보다는 약간의 기대를 안고 극장에 들어갔어.

사실 좀 싱겁게 들릴 게 빤하지만, 영화에 관한 솔직한 감상을 말하자면 나는 <다크 나이트라이즈>가 <다크 나이트>를 뛰어넘지 못했을뿐 아니라 훨씬 못 미치는 영화라는 평가에 공감하는 편이야. 이 시리즈의 시작이었던 <배트맨 비긴즈>를 본 이후에 <다크 나이트>를 보았을 때 어떻게 전자의 그 엉성했던 영화가 이토록 흥미진진한 영화가 되었는가 놀랐던 것처럼 <다크 나이트>를 본 다음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본 지금은 그 눈부신 영화가 어떻게 다시 이렇게 평범한 후속작을 낳은 것인지 놀랐다고 말하는 게 차라리 솔직한 표현일 거야.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악당 베인이 <다크 나이트>의 조커에 비할 바가 못된다고들 말해. 한마디로 캐릭터의 매력이 떨어진다는 뜻인데, 그런 것 같아. 조커에게는 감당키 어려운 미지의 존재감이 있었지만 베인에게는 목적에 따른 강력한 수행능력만 있어 보이기 때문일 거야. 조커는 어느 편도 아닌 아이러니한 미치광이 같은데 베인은 편을 잘못 먹은 성실한 군인 같아. 인물들 사이의 느슨함 혹은 서사의 느슨함도 한몫한 것 같아. 로빈이 될 블레이크와 캣우먼에게 할당된 장면들 그리고 우스꽝스럽게 느껴진 반전 설정은 배트맨-조커-하비 덴트의 삼각구조의 팽팽한 긴장감을 되살리지 못했어. 하지만 친구, 이런 이야기는 여기까지야.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보던 나를 진짜 호기심에 빠뜨린 건 그런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야. 불쑥 내 머릿속에는 다른 호기심이 생겨났어. 실은 그것에 관해 말하려고 해. 그래서 좀 이상한 샛길에서부터 시작해볼게.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한 여행 프로그램을 보았어. 김훈이라는 소설가가 한 사진가와 여행을 하고 있었어. 프라하의 어느 다리 위에서였을 거야. 평생 한번도 카메라를 잡아본 적이 없다는 이 소설가는 어쩌다 상대방을 찍어주어야하는 처지에 놓이자 카메라를 들고는 이 물건 참 번잡스럽다는 표정으로 문득 이렇게 말했어. “내가 앞으로 이걸 찍지는 않을 것 같아. 이걸로 들여다보는 세상하고 눈으로 보는 세상은 전혀 다른 세상이구먼. 이 세상은 뷰파인더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사각형의 틀 안에 갇힐 리가 없는 거지.” 사진가가 얼른 지지 않고 말했어. “하지만 그만큼만 독립될 수는 있지요.” 다시 김훈이 말했어. “그만큼만 끊어서 셔터로 고정시키는 거야.” 사진가는 또 지지 않고 말했어. “영원히 남기는 거지요.” 김훈이 또 말했어. “하지만 인간의 시간은 고정되는 것이 아니고 항상 흘러가는 거지.”

이 대화를 나는 좀 오래 생각했어. 다름 아니라 소설가가 부정한 바로 그것 ‘사각형의 틀’이라는 말에 내 생각이 붙잡혔기 때문이야. 그는 사진의 사각형의 틀을 말했지만 나는 영화의 사각형 틀을 떠올렸어. 사진은 스스로가 세계 그 자체가 될 수 있다고 우기지는 않아. 대신 저 사진가가 항변한 것처럼 세계를 기록한다고 말하지. 회화도 사각의 틀 안에 세계를 담지만 그 세계는 모사이거나 모방이거나 그로 인한 무궁무진한 관념적인 연상의 창이기에 아름다운 것이지 그 자체가 세계의 일부라고 나서지는 않아. 오로지 영화만이 활동함을 근거로 스스로가 세계의 반영이자 일부라고 주장해왔어. 거기엔 물론 운동과 시간이 있기 때문에 그럴 거야. 사각의 틀이라는 한계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한계가 있다는 걸 업으로 창작의 수많은 방법들을 만들어낸 다음, 내가 바로 세계요 하고 주장하는 영화를 이 소설가는 인정치 않겠구나, 하고 그때 생각했던 것 같아. 나는 그의 말을 이렇게 바꾸어서 생각했던 거야. 사각의 틀, 그건 우리가 말하는 영화의 ‘프레임’이야.

“스크린에는 날개가 없다.” 앙드레 바쟁이 한 그 말 기억하지? 영화의 스크린이란 실은 필름 프레임의 확장이잖아. 바쟁의 말에는 물론 더 복잡한 이론적 함의가 있지만 무엇보다 거기에는 영화가 사각의 틀로 세상을 오려내되 그 한계 때문에라도 영화만의 미학이 함께 잠재한다는 인정이 담겨 있어. 프레임이 만드는 그런 영화의 미학은 곳곳에 있어. 올해 초에 나는 누군가에게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의 한 장면을 참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어. 꼬마들이 기차 건널목 앞에서 소원을 비는 연습을 하는 장면 기억날 거야. 그때 건널목에는 할머니 한분이 서 있었는데 기차가 쑤웅 하고 지나가자 1~2초 만에 그 할머니는 사라져버려. 아이들은 놀라 그걸 기적이라고 말하지. 하지만 할머니는 사라진 게 아니라 화면 바깥에 있는 거야. 영화에서는 인물이 화면 바깥으로 한 걸음만 빠져나가도 그렇게 존재의 소멸이라는 의미가 생겨날 수가 있어.

그 장면이 좋다고 한 사람에게 나는 그게 바로 영화의 프레임이라는 한계 때문에 생겨날 수 있는 역설적 아름다움이라고 말하면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거울> 이야기를 들려준 것 같아. <거울>이라는 영화의 도입부에 보면 저 멀리 후경에서부터 전경으로 아득한 바람이 불어와 갈대숲을 흔드는 장면이 두번 나오잖아. 기막히게 아름다운 그 장면, 그게 소망하거나 기다려서 얻어진 게 아니고 헬기 두대를 착륙시켜 일으킨 프레임 바깥의 조작된 바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 옛날의 어느 날 나는 얼마나 놀랐었는지. 프레임이라는 안팎의 경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아름다움인 거야. 그러니 영화감독보다는 영화의 사상가로 더 존중할 만한 피터 그리너웨이가 영화의 해방을 외치며 꾸준히 영화에서 걷어치워야 할 것으로 프레임을 지적하는 건 역으로 그게 바로 전통적 영화의 변치 않을 가장 원초적인 단위라는 확신이 있어서일 거야.

아이맥스란 거대한 프레임의 영화적 체험이야

모르긴 해도 너는 지금쯤 조바심이 났을 거야. 혹은 화가 났을지도 모르지. <다크 나이트 라이즈> 이야기는 제쳐두고 프레임 운운하는 이런 이야기를 왜 늘어놓고 있는지 궁금해할 수도 있겠지. 그렇다면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만들면서 “읽는 형식의 이야기가 아니라 움직이는 프레임을 가진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려고 노력했다”고 한 크리스토퍼 놀란의 말을 기억해주면 좋겠어. 이제 솔직히 말할게. 나도 너처럼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두번 보았어. 한번은 처음 말했던 그날 일반 상영관에서 보았고 또 한번은 며칠 뒤 왕십리CGV 아이맥스관에서 보았어. 이유는 하나였어. 잊지 않았겠지? <다크 나이트 라이즈> 예고편에는 마치 계시처럼 이런 말이 있었잖아. “아이맥스로 경험하라!”

자랑할 일도 부끄러운 일도 아니지만 나는 성인이 된 다음 아이맥스 극장을 찾은 게 이번이 처음이야. 게다가 나는 아이맥스의 복잡다단한 기술적 공정에 대해 잘 알지 못할 뿐 아니라 관심도 없어. 기초적인 상식 정도가 있을 뿐이야. 다만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 관련해서라면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가 최초로 27분가량을 아이맥스 카메라로 촬영했고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55분을 촬영했다는 정도는 들어서 알고 있어. 그러니까 영화의 3분의 1을 아이맥스로 촬영한 이 영화는 영화사에 전무후무한 최초의 아이맥스 극영화로 기록될 가능성이 높아. 그리고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볼 계획이거나 본 이들은 거의 빠짐없이 부정이건 긍정이건 아이맥스에 관해 말하고 있어.

당신은 왜 아이맥스 카메라로 영화를 찍었느냐는 질문에 놀란은 이렇게 말했어. “아이맥스 기술로 액션 신을 찍는 것은 이야기를 그려나갈 엄청나게 큰 캔버스를 얻은 것과 같다.” 그는 캔버스라고 말했지만 우리는 그가 캔버스라고 말한 것이 프레임이라는 걸 알고 있어. “스크린은 영화를 유지하는 기초가 되는 필름 프레임의 투사”(스티븐 히스)라는 것도 말이야. 그러니 극장에서 볼 수 있는 아이맥스 스크린이 곧 거대한 캔버스이자 프레임이야. 따라서 아이맥스 카메라로 촬영한 영화를 아이맥스 상영관에서 상영할 때, 즉 좀더 큰 프레임을 지닌 필름으로 촬영하여 좀더 큰 프레임을 지닌 스크린에 투사하여 그것이 선명하고 크다고 할 때, 아이맥스로 경험하라, 라는 명령에 담긴 함의는 무엇일까. 그건 더도 덜도 아니고 이런 말이 될 거야.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반드시 최대한 크고 깊고 선명하며 어마어마하게 큰 프레임으로 경험하라! 그러므로 아이맥스란 거대한 프레임의 영화적 체험이나 진배없다고 나는 생각해. 이게 바로 내가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아이맥스를 말하기에 앞서 프레임에 관한 단상을 늘어놓은 이유야.

그렇게 나는 아이맥스관에서 영화를 다시 보았어. 그리고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됐어. 전에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체험해보니 확실히 알게 된 그런 사실, 하지만 그 누구도 내게 그 체험의 느낌에 관해서는 자세히 들려준 적이 없는 그런 종류의 것. 내가 조커는 아니지만 퀴즈를 하나 내볼게. 내가 경험하고 너도 경험했을 그것에 관해서 말이야. 이렇게 물어볼게. 캣우먼은 배트맨과 공모할 것처럼 하면서 그를 유인하여 베인의 무리가 있는 지하소굴로 데리고 들어가. 그렇게 배트맨과 베인의 첫 격투 신이 성사되지. 배트맨은 거기서 가면이 찢기고 허리가 꺾이게 되잖아. 그런데 이때 이들의 격투 신의 시작을 알리는 영화적 신호 같은 것이 있어. 그러니까 배트맨을 가두기 위해 내리 꽂히는 그 철창과 함께 벌어지는 일이 있어. 그건 무엇이었을까.

그 숏을 시작으로 이 신의 스크린 화면비율이 2.35:1에서 1.44:1로 바뀐다는 사실을 우린 느껴야 해. 그건 액션의 시작이기 때문이야. 물론 이 영화가 1.44:1의 풀 스크린 비율(아이맥스 카메라로 촬영한 장면)과 스크린의 아래위에 레터 박스가 쳐진 2.35:1의 화면비율(일반 35mm 카메라로 촬영한 장면) 두 가지 버전이 섞여 상영된다는 걸 몰랐던 건 아니야. 하지만 그 느낌에 대한 설명을 들어보지 못했다는 걸 나는 말하고 싶은 거야. 그때 나는 극장의 자리에 앉아 생각했어. 이것이 아이맥스를 보는 체험의 중요한 일부가 될 터인데, 그렇다면 왜 아무도 여기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가 하고 말이야. 말하자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어.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보는 동안 극장에 있는 스크린이라는 프레임은 변하지 않아. 하지만 스크린을 채우는 화면비율이라는 프레임은 시시각각 두 가지 버전을 오가는 거야. 우리는 그때 스크린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프레임을 응시하고 있지만 동시에 두개의 화면비라는 서로 다른 프레임을 체험하고 있는 거야.

일단의 정서 때문에 아이맥스 카메라를 쓴 것 같아

이게 특기할 만한 일이냐고? 물론이야. 전통적으로 본다면 스크린과 화면비율이란 서로 별개가 될 수 없는 것이었어. 혹은 한 영화를 두개의 화면비율로 영사한다는 건 없었거나 흔치 않은 일이었어. 너도 알다시피 화면비율이라는 건 어떤 창작자들의 경우에 컬러나 사운드의 문제만큼이나 중요한 영화적 요소잖아. 시네마스코프가 나왔을 때를 생각해보자고. 반대도 심했지만 환호도 열렬했지. 시네마스코프에 관한 가장 냉소적인 발언은 프리츠 랑이 했잖아. 시네마스코프는 장례식이나 뱀을 보여줄 때를 제외하고는 쓸모가 없는 비율이라고 그는 말했어. 장 르누아르도 시네마스코프를 반대했어. 이유는 확실했지. 좌우로 그렇게 화면이 길어지면 사람의 얼굴을 담는 클로즈업 숏의 미감을 해치게 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어. 그는 그러한 비율로 얼굴 옆에 기다란 허공이 생기는 걸 마뜩잖아 한 것 같아.

반면에 영화의 성격도 다르고 창조적 관점도 달랐지만 니콜라스 레이와 스탠리 큐브릭 영화의 특징을 우리는 지금도 시네마스코프의 화면 안에서 느끼게 돼. 그들은 그 화면비율을 선호했지. 혹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요짐보>를 보며 시네마스코프가 없었으면 어쩔 뻔했나 생각했던 적도 있거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야. 시네마스코프의 비율에 반대하거나 환호하는 입장 차이가 있었지만 그들 사이에는 화면비율이 불변이어야 한다는 공약이 있었다는 거야. 그 말은 곧 프레임이 영화의 가장 기본 단위임을 인정하고 그걸 중시한다는 태도였지. 예외가 있다면 에이젠슈테인 정도였는데 그는 스크린의 가장 이상적인 비율을 정사각형으로 보았어. 마스킹을 통해 아주 여러 가지의 직사각형을 창출할 수 있다면서 역동적 정사각형이라 부르며 혼자 상상하며 좋아했던 거야.

나는 처음에 이 문제를 조금 단순하게 상상했어. 두개의 화면비가 쓰인다? 그렇다면 액션 신에만 아이맥스 카메라가 쓰여서 액션장면들만 1.44:1 풀 사이즈로 나오는 건 아닐까 하고. 하지만 실제로 보니 그렇지 않았어. 물론 대부분은 액션 신에 많이 쓰였지. 악당 베인이 비행기에서 탈출하는 장면이나 베인이 증권거래소를 터는 장면이나 베인과 배트맨이 두 번째 격투를 벌이는 장면 등이 대표적일 거야. 혹은 도시 전경을 보여주는 공중 인서트 숏은 예외없이 아이맥스 카메라로 찍었어.

하지만 아이맥스가 쓰인 장면이 실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은 금방 알게 됐어. 심지어 아주 의아하게 쓰인 장면들도 있어. 집사인 알프레드가 브루스 웨인에게 당신이 없는 동안 나는 피렌체에 기거하며 당신이 가족을 이루는 걸 상상했다고 말하는 장면 기억나지? 그 장면은 특별한 액션 신도 아닌데 아이맥스로 촬영됐어. 혹은 캣우먼이 감옥에 들어가는 짧은 장면도 말이야. 액션을 위해서 아이맥스로 촬영했다고 하지만 다른 것을 위해서도 아이맥스가 사용된다는 뜻인 것 같아. 이를테면 배트맨의 퇴장에서부터 로빈의 출현까지를 다루는 영화의 종반부는 특별한 액션 신이 없는데도 아이맥스 카메라로 촬영해서 풀 사이즈로 나오고 있어. 액션장면은 아니지만 어딘가 웅장한 서사시적 분위기가 필요하다면 그때에도 쓰이고 있는 거야. 놀란은 아이맥스 카메라를 일단의 정서를 위해서도 쓴 것 같아.

사실 뭐 어디에, 언제 아이맥스 화면이 등장하는지 일일이 열거할 필요는 없을 거야. 방금 말한 건 고정적이지 않다는 걸 짚기 위해서였던 거고, 그보다는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볼 때 다른 영화를 볼 때는 잘 느끼지 못하는 이상한 심리적 미의 기준이 생긴다는 걸 중요하게 말해야 할 것 같아. 말하자면 중요한 장면과 중요하지 않은 장면이 다른 영화들과는 좀 다르게 나뉜다는 거야. 예컨대 우리는 일반적으로 서사의 정점에 이르러 시각적 비전의 중요성도 함께 느끼는 게 일반적이잖아. 그런데 이 영화는 그렇지 않았어. 영화 시작 직후 등장한 고공 비행기 신이 이미 시각적으로는 클라이맥스라고 할까. 혹은 예고편에서 이미 위용을 자랑한 풋볼 경기장 폭파 장면에서는 미처 폭파 장면을 보여주기도 전에 단지 경기장을 보여주었을 뿐인데 몇몇 관객은 마치 클라이맥스를 만난 것처럼 기대감에 차더라고.

<다크 나이트 라이즈>

아이맥스 효과를 위해 전통의 화면비쯤은 포기했지

조금 더 나아가면 이런 가정도 가능해. 놀란은 왜 영화 전체를 아이맥스 카메라로 촬영하지 않은 것일까. 물론 실리적인 공정상의 이유가 크겠지만, 이 영화를 본 사람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그건 아이맥스 화면으로 나올 장면들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기능도 있다는 거야. 말하자면 2.35:1일 때는 프레임의 아래 위가 비어 있다가 어느 장면에 이르면 1.44:1 풀 사이즈가 되면서 상하를 채우게 되는 거잖아. 그때 시각적인 것과 더불어 심리적으로도 무언가 충족된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는 거야. 만약 영화 전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풀 사이즈였다면 그런 충족감은 오히려 무뎌졌겠지. 그 때문에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볼 때는 시종일관 무언가 덜 중요한 것을 보다가 더 중요한 것을 마침내 그 순간 충분히 보게 된다는 그런 인상이 있어. 그러니까 기본적으로는 상실감과 충족감을 번갈아 경험한다고 해야 하나. 그때 충족감이 채워지는 장면을 나는 내 식대로 비전의 클라이맥스라고 불러봤어. 왜 우리가 흔히 말하는 건 서사의 클라이맥스잖아. 이 영화에는 비전의 클라이맥스가 여러 군데 각자의 방식대로 있다는 거지. 하지만 불행한 건 내 눈에는 결국 비전의 클라이맥스와 서사의 클라이맥스가 조화를 이루지 못한 것이 이 영화의 커다란 단점 중 하나로 보인다는 거야. 가령 베인과 배트맨이 격돌한 두 번째 장면은 그 두개의 클라이맥스가 함께하려고 했지만 공히 실패한 장면이야.

두개의 화면비율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건 임의적으로 바뀐다, 신일 때도 있고 숏일 때도 있다, 액션에 주로 헌신하지만 때로는 정서적 웅장함을 위해서도 헌신한다, 비전의 클라이맥스와 서사의 클라이맥스의 분리가 심해지기도 한다, 라고 말한 셈인데, 그래서 뭐가 충격인데? 너는 그렇게 반문할 수도 있어. 맞아, 나도 그게 정말 충격인가 싶어서 주위의 몇 사람에게 물어보았어. 그들은 하나같이 풀 사이즈로 화면이 커질 때는 실감났지만 프레임이 변하는 것에 대해서는 큰 저항감이 없었다고 말해주었어. 실은 나도 고백건대 스크린 화면비가 교차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놀라운 일이었지만 ‘체험’으로서 혼동되어 영화를 못 볼 지경은 아니었거든. 그렇다면 화면비가 바뀐다는 그 ‘사실’자체는 지극히 충격적인데 그걸 체감하는 몸의 ‘놀람’은 그 사실의 강도보다 덜 충격적이라는 건 무엇을 시사하는 걸까.

그러니까 나는 이 사실의 체험과 충격의 강도 사이에서 한 가지 가설을 생각하게 됐어. 우리는 이미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를 본 관객이라는 거야. 3D란 엄연히 2차원적 프레임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욕망의 시도일 거야. 이미 프레임이 깨지는 것에 대한 훈련이 충분히 되어 있다는 거지. 그러니 이 정도의 화면비가 교차하는 건 괜찮다는 일정한 영화적 감각구조가 우리 몸에 이미 갖춰진 것은 아닌지 몰라. 디지털 룩이 처음 등장했을 때의 그 생경함을 생각해봐. 하지만 지금은 그다지 저항없이 보고 있잖아. 실은 놀란도 두개의 화면비를 오가는 것에 애초에는 걱정했던 것 같아. 하지만 의외로 관객이 이 부분에 저항감을 갖지 않는다는 걸 알고 난 뒤에는 안심했다고 말한 적이 있어. 그래서 말인데, 이제 중요한 건 특히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 중요한 건, 놀란 스스로 화면비의 변화에 크게 개의치 않기로 했다는 사실이야. 이 말은 이렇게 바꿀 수 있어. 아이맥스의 효과를 위해서라면 전통의 화면비쯤은 쉽게 포기 또는 희생되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는 거야.

화질과 규모의 문제를 얘기해볼까

아이맥스의 효과라고 나는 말했어. 여기에는 근본적인 두 가지 핵심이 있어. 첫째는 화질. 두 번째는 규모야. 그런데 나는 마치 화면비의 교차를 사람들이 저항감없이 받아들이듯 이 화질과 규모의 문제 또한 평범하게 느낄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어. 나의 경우에는? 그냥 화질이나 규모가 담담하게 느껴졌어. 하지만 이것 때문에 아이맥스로 영화를 보아야 한다고 사람들은 말하고 있어. 그런데 여기에는 실질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어. 전세계에 아이맥스를 필름 상영하는 곳은 제한되어 있고 심지어 요즘 추세는 디지털 리마스터링한 극장에서 디지털 코드로 상영하는 것이고 너와 내가 본 것도 디지털 상영이야. 한마디로 극장에서 보더라도 놀란이 요구한 것만큼의 화질과 규모로는 볼 수 없다는 뜻이야.

놀란이 그걸 모를 리 없어. 그런데도 놀란은 아이맥스 촬영을 고집하고 있어. 그러므로 우린 하나의 잠정적인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어. 놀란의 아이맥스는 실리적인 게 아니라 일종의 미학적 태도라는 거야. 시네마에 대한 새로운 태도. 만약 폴라로이드 화면비를 고집하여 <엘리펀 트>를 찍은 구스 반 산트에게 아이맥스가 화질이 더 좋으니 섞어 찍자고 한다면 그건 불가능한 일 아니겠어? 그러니 이때 놀란의 아이맥스란, 완전한 기술적 구현에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크 나이트 라이즈>라는 영화를 그렇게 만들기로 한 그의 선택에 방점이 있다는 뜻이야.

규모와 화질을 중시하는 자세 말이야. 그리고 그 자세가 목적으로 두고 있는 건 실감일 거야. 놀란은 압도감이라고도 표현해. 많은 이들이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보고 한 말, 야 실감난다, 라고 말할 때의 그 실감이야. 그런데 이 실감이라는 표현은 사실 다른 곳에서도 쓰였어. 아니 정확히 말하면 놀란이 그토록 반대하는 3D를 극찬할 때 실감이라는 말이 많이 쓰였어. 3D는 이차원적 프레임에 대한 변형이자 파괴를 기반으로 해. 그런데 놀란은 이차원적 프레임을 최대한 확장하여 그 프레임의 일부는 희생하되(화면비) 원천적으로는 그 자체를 지켜낸다는 기획으로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만들었잖아. 그런데도 우린 그조차 실감이라는 허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말해야 하는 상황이 된 거야.

영화에서 실감이란 말은 유의해야 할 표현이야. 실감이란 말은 대체로 영상의 규모나 지각의 혼란과 함께 쓰이기 때문이야. 차가 뒤집히는 장면을 아이맥스로 보았을 때 그거 실감난다고 말하는 걸 우린 온전히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아니 그건 실제에 가까운 효과가 아니라 영화가 만들어내는 과장의 효과야. 아무리 놀란이 실제로 무언가를 폭파하고 그것을 찍는다 해도 그게 카메라에 담기는 순간 그건 실감이 아니라 영화적 감각의 공정을 거치는 것이고 실제 감각의 도래가 아니라 영화적 환영의 재강화일 가능성이 크다는 거야. 실감난다는 표현은 그러므로 영화적 감각에 대한 우리의 표현에 그치는 것일 수도 있어. 실감보다는 영화적 감각이 있을 뿐이야.

나는 아이맥스로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본다고 해서 처음 보았을 때보다 더 좋지 않았어. 그러니 문제가 있다면 아이맥스가 성취했다고 말해지는 이 실감이라 불리는 영화적 감각이, 배트맨이 고담시를 지키는 것처럼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지키지는 못한다는 점에 있어. 우리는 아이맥스로 해저의 고기떼를 보는 것과 아이맥스로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보는 것의 차이에 대해서 생각해야만 해. 놀란이 아이맥스에 치중하는 것과 아이맥스가 이 영화를 미적으로 고양시키는 것은 별개로 보아야만 한다는 거야. 무언가에 치중한다고 해서 성공적인 건 아니기 때문이야. 그러니 같은 맥락상, 아이맥스로 본다고 해도 이 영화의 영화적 퀄리티는 놀란이 기대하는 것처럼 높아지지 않아. 이미지 퀄리티가 높아지기는 하지만 영화의 퀄리티가 높아지지는 않는다는 거야. <다크 나이트>를 아이맥스는커녕 그냥 평범한 나의 조그만 아날로그 텔레비전으로 다시 보아도 여전히 재미있다는 사실이 또 하나의 방증이야. 자 이것이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아이맥스는 미학이 아니라 차별적인 환경에 불과한 거야. 성사되면 자극은 되는, 하지만 대체로 성사되지 못하는, 하지만 추구되고 있는 욕망이라고 해도 될 거야.

아이맥스는 시네마틱한 욕망이야. 그것은 욕망이지 결코 영화의 완벽한 이상이 아니라는 뜻이야. 기술이 닿고 싶어 하는 또 하나의 어떤 욕망이야. 3D가 횡행하는 자리에서 2D를 지키려 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실감이라는 허상에 대한 욕망을 함께 끌어안은 사태가 벌어진 거야. 그 때문에 3D가 <아바타>를 구원하지 못한 것처럼 나는 놀란이 아이맥스로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지키지 못했다고 생각해. 그가 말한 압도감이 3D가 추구하는 시각적 외설성에 위험하게 근접해 있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야.

아이맥스 스크린이라는 커다란 프레임, 즉 스크린이라는 프레임에 화질과 규모의 총량을 쏟아부으며 끝내 고수하되 그 안의 화면비율의 고정이라는 프레임은 포기하는 이 아이러니를 보면서 어떤 상상을 했어. 나는 이게 꼭 세계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사회적 프레임은 지켜내지만 그 안에서 자경단원으로서의 자기의 위치와 존재에 대해, 즉 두개의 자의식적 프레임으로서는 흔들리는 배트맨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상상을 해보았어. 영화를 지키기 위해 등장한 아이러니한 시네마의 흑기사라고나 할까.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전철 안에서 휴대기기를 손에 들고 미드를 보는 사람 옆자리에 앉았어. 너도 알다시피 서울은 휴대기기라는 조커가 점령한 고담시야. 거기 저마다 영화가 흘러나오지. 그때 다시 또 아이맥스라는 흑기사를 생각했어. 그 순간 사람은 얼마만큼의 땅을 가져야 하는가라고 물었던 톨스토이의 동화가 생각났어. 영화는 과연 얼마만한 스크린을 가져야 하는 걸까 궁금해졌어. 나는 이렇게 다시 물었어. 아이맥스가 시네마의 흑기사가 될 수 있을까? 친구, 어떻게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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