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를 배경으로 <왕자의 거지>를 만들어보겠다는 아이디어는 꽤 괜찮다. 수많은 왕이 폐위되고 왕세자들이 수난을 당한 조선왕조를 한번 떠올려보라. 이를테면 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는 어떤가. 만약 자유를 갈망한 사도세자가 정신질환에 걸린 것처럼 가장한 뒤 비슷하게 생긴 백정을 뒤주에 대신 넣어놓고 평양에서 영원히 즐거운 독신남의 삶을 살았다면? 뭐, 말하자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세종을 불러들인다. 세종, 그러니까 충녕대군(주지훈)은 궁에 틀어박혀 책만 읽는 심약한 책벌레다. 그런데 아버지 태종(박영규)은 주색에 빠진 첫째 양녕(백도빈)을 믿을 수 없는 터라 결국 셋째 충녕을 세자에 책봉하고 만다. 왕세자의 자리가 부담스러운 충녕은 궁을 탈출하기로 마음먹고 담을 넘는다. 우연히 그 시간에 왕궁의 담을 넘어오던 남자가 있다. 충녕과 똑같이 생긴 노비 덕칠(주지훈)은 역적의 자손으로 몰려 궁으로 끌려간 아씨(이하늬)를 구하기 위해 술김에 궁궐 담을 넘는다. 호위무사 해구(임원희)와 황구(김수로)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덕칠을 충녕의 자리에 앉혀놓지만 명나라 사신의 방문으로 금세 비밀이 들킬 위기에 처하고, 막상 밖으로 나간 충녕은 끔찍한 노비의 삶에 발목을 잡히고 만다.
당신이 장규성 영화의 팬이라면 <나는 왕이로소이다>가 어떤 영화일지 쉽게 짐작이 갈 것이다. <선생 김봉두>(2003)와 <여선생 VS 여제자>(2004), <이장과 군수>(2007)를 통해 그는 ‘장규성 코미디’라고 할 만한 브랜드를 만들어냈다. 장규성 코미디는 관객을 웃기는 만큼이나 울리고 싶어 하고,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한국사회에 대한 어떤 풍자로 기능한다. <나는 왕이로소이다>에서 장규성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명확하다. 진정한 정치적 지도자가 부재한 시대에 성군의 자질을 다시 한번 짚어보자는 것이다. 주제가 지나치게 명확해서 심지어 촌스러울 정도지만 그건 장규성의 세계에서 큰 흠은 아니다. 다만 상업영화로서 간결한 이야기 구조를 지녔던 전작들에 비해 복잡한 이야기와 긴 상영시간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민초들의 현실을 마주하고 성군의 자질을 갖춰가는 충녕의 이야기와 궁 안에서 정치적 파랑에 휩싸이는 덕칠의 이야기에 동시에 힘을 주다 보니 전체적인 균형이 종종 흔들린다. 하나의 캐릭터에 좀더 집중했더라면 더 간결한 장규성 코미디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과체중으로 유명했던 세종과 어울리는 편은 아니지만 주지훈의 코미디 연기는 적절하게 조율되어 있다. 특히 조연들이 재미나는 영화다. 김수로와 임원희는 오랜만에 맛깔나는 코미디 연기 재능을 과시하고, 세자빈을 연기한 이미도 역시 감초 경력의 절정을 보여준다. 다만 백윤식이 연기한 황희 정승 캐릭터는 조금 더 근사하게 활용해도 좋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