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인간에 희망을 걸 수 있을까? 과연?
2012-08-14
글 : 이영진
생체실험 대상이 되어버린 침팬지 다룬 다큐멘터리 <프로젝트 님>

<프로젝트 님>은 인간의 품에서 유년기를 보낸 침팬지 님(NIM)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오클라호마의 한 연구소에서 태어난 지 2주 만에 한 미국 가정에 입양된 님은 수화로 인간과 대화하는 법을 깨우친 영특한 영장류 동물이다. 하지만 인간과의 행복한(?) 시간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말하는 유인원이라고 각광받았던 님은 얼마 뒤 백신 개발을 위한 생체실험 대상이 되고 만다. 지난해 선댄스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고, 영국 아카데미(BAFTA)상 후보에 올랐던 <프로젝트 님>의 감독은 <맨 온 와이어>를 연출한 제임스 마시. 가만 들여다보면, 그의 카메라는 침팬지 님을 보여주는 동시에 어리석은 실험을 자행한 인간들을 도마 위에 올려두고 비웃는다. 말 못하는 침팬지 님의 입장에서 <프로젝트 님>에 등장한 인물들을 한명씩 심문해보자.

1973년 11월 미국 뉴욕주 어퍼웨스트사이드

스테파니 라파지는 기어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새끼 침팬지 님(NIM)을 인간 아이처럼 키워달라는 허버트 테레스 교수의 부탁을 무턱대고 받아들인 것이다. 그녀는 가족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았다. 남편 위어가 아내의 급작스러운 결정을 사전에 알았다고 막을 수 있었을까. 대학에서 정신분석을 전공한 스테파니는 침팬지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인간과 동물이 언어를 공유함을 증명하고 싶어 하는 허버트의 실험에 강한 흥미를 느꼈다. 스테파니는 자신이 낳은 아이와 똑같이 님에게 젖을 물리기로 맘먹는다.

“원래 내가 태어난 곳은 뉴욕이 아니라 오클라호마주에 위치한 한 영장류 연구소였다네. 나를 낳은 친엄마는 캐롤린이라는 이름을 가진 침팬지였지. 엄마 얼굴은 조금도 기억이 나지 않아. 우리 침팬지들은 시신경이 발달하지 않은 상태로 세상에 나오거든. 게다가 스테파니의 집에 갔을 때 난 고작 생후 2주밖에 안된 새끼였어. 다행히 스테파니 식구들은 나를 가족처럼 따뜻하게 대해줬지. 난 밀림의 침팬지처럼 두리안 열매를 찾기 위해 4km씩 헤매거나, 나뭇가지를 다듬어 흰개미 단지를 쑤셔댈 필요는 없었어. 인간들은 내게 식량을 무한정 공급해줬거든. 다만 이상한 조건이 하나 있었지. 바나나와 요거트를 먹으려면, 약속한 손짓을 보여주어야만 했어. 음료수를 마시고 싶을 때도 마찬가지였지. 수화가 어려운 건 아니야. 하나씩 외우면 되는 거니까. 숫자 기억력 테스트를 해보면, 1부터 9까지 숫자를 처음 배운 어린 침팬지들이 웬만한 성인보다 더 낫다잖아. 침팬지와 인간의 유전자 염기 서열이 96% 이상 일치한다는 게 밝혀진 건 그닥 오래되지 않았지. 침팬지가 고릴라보다 인간과 더 가깝다는 걸 말하기 위해 굳이 현대과학의 힘을 빌릴 필요까진 없어. 많은 동물 중에 왜 하필 치타가 타잔 곁에 있었겠어. 안 그래? 인간과 수화로 의사소통한 유인원이 내가 최초는 아니야. 1967년엔가. 미국 네바다대학의 앨런 가드너와 비트릭스 가드너 교수는 ‘와슈’라는 침팬지가 250종의 수화를 사용할 줄 안다고 발표했어. 와슈는 ‘열다’, ‘먹이’, ‘마시다’라는 세 가지 수화를 동원해 ‘냉장고’라는 단어를 말할 줄 알았지. 뇌 용적이 침팬지보다 조금 더 큰 고릴라도 수화실험 대상이었지. 그중에선 암컷 저지대 고릴라인 ‘코코’가 가장 유명해. 코코는 1971년생이니까 나보다 두살 위구먼.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코코는 25년 동안 1천개의 수화, 2천개의 영어단어를 습득했다고 해. 단어 합성 능력 역시 와슈보다 코코가 한수 위였던 것 같아. 손가락과 팔찌라는 수화를 붙여서 반지를 말했을 정도니까. 잠깐, 퀴즈 하나 풀어보자고. 자네 눈앞에서 코코가 물과 새를 뜻하는 수화를 연속으로 보여줬어. 코코가 뭘 말하는 것 같은가. 물새? 흐흐흐. 자넨 나와 대화하기가 좀 어렵겠구먼. 정답은 백조라네, 백조.”

1975년 9월 뉴욕주 리버데일

컬럼비아대학 학생이던 18살 소녀 로라 앤 페티토는 연구 보조를 구한다는 게시물을 보고 허버트 교수의 방문을 두드렸다. 허버트 교수의 외모는 보잘것없었지만 그가 제시한 언어 프로젝트는 로라의 마음을 흔들었다. 로라가 보모 역할을 맡으면서 님의 어휘력은 기하급수로 향상됐다. 님이 제멋대로 굴게 내버려뒀던 스테파니 가족과 언어를 가르치기 위해선 체계적인 훈육이 필요하다고 믿는 로라와의 갈등은 예상된 결과였다. 님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스테파니와 로라는 빈번히 부딪쳤고, 결국 허버트 교수는 로라의 손을 들어줬다.

“어렸을 적 스테파니의 남편인 위어의 서재를 엉망으로 만들어놓곤 했어. 위어라는 이 친구, 자신을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불렀는데, 내 눈엔 따분하기 짝이 없는 놈이었지. 내가 젖병을 문 채 잠시 졸면 어느새 스테파니의 어깨에 슬그머니 손을 얹는 엉큼한 놈이기도 했어. 그렇다고 내가 위어를 마냥 미워했던 건 아니야. 내가 태어난 지 3개월쯤 지났을 때일 거야. 침팬지들은 이즈음이면 걸음마를 떼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위어는 좀처럼 나와 놀아주지 않았어. 침팬지도 인간처럼 놀면서 성장한다고. 위어는 겁도 많았지. 내가 한팔을 들어 올리면 슬슬 피했어. 침팬지가 공격 자세를 취한다고 해서 놀랄 필요는 없어. 만약 그때 내가 윗니는 드러내지 않은 채 입술을 양옆으로 쭉 찢은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면, 그건 장난으로 레슬링이나 한판 붙어볼까, 뭐 이런 뜻이라고. 허버트도 위어처럼 눈엣가시였지만 성질을 부리는 대신 좀더 두고보기로 했어. 침팬지는 보노보와 달리 수컷 중심의 부계사회를 이루고 살아. 침팬지 공동체에서는 우두머리를 알파 수컷이라고 부르는데, 가장 싸움을 잘한다고 알파 수컷이 되는 건 아니야. 알파 수컷이 되려면 정치적으로 기민해야 해. 협상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힘만 앞세웠다간 협공을 당하기 일쑤니까 말이야. 내 무리에선 허버트가 알파 수컷처럼 보였지. 스테파니와 로라에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는 유일한 수컷이었으니까 말이야. 폼 잡는 게 밥맛이었지만 하는 수 없이 나도 허버트 앞에선 윗니 아랫니 다 드러내 보이면서 억지웃음을 지어야 했어. 허버트가 나의 수화 과외교사로 로라를 낙점했을 때도 하는 수 없이 따라야 했지. 내게 가끔 술과 대마초를 건네줬던 방임형의 스테파니와 달리 로라는 엄격한 상벌제를 채택했지. 나로선 좀 당황스러운 변화였는데, 수화를 배우는 것만이 아니라 변기 사용법까지 익혀야 했거든. 내가 찬 기저귀로는 내가 싼 똥을 처리할 수 없었다는데 나 원 참. 여튼 로라는 내가 스테파니보다 자신을 더 좋아한다고 여겼지만, 리버데일의 집에 커다란 정원이 없었다면 난 아마 목줄을 끊고 탈출할 결심을 했을지도 몰라.”

1977년 9월 오클라호마주 영장류연구소

이 무렵 허버트 교수는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로라가 떠났기 때문이 아니었다. 님 곁에는 빌 티난, 조이스 버틀러 등 로라만큼 유능하고 의욕 넘치는 교사들이 아직 남아 있었다. 5년이 지났지만, 아직 유의미한 실험 결과를 도출하지 못했다는 것이 진짜 문제였다. 지원금마저 끊긴 데다 성인 남자 5명의 힘과 맞먹는 괴력을 지닌 님을 통제할 방법도 없었다.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동물을 어떻게 사람처럼 키우죠?” 님에게 폭행을 당한 로라가 남긴 말은 허버트를 끊임없이 괴롭혔고, 결국 허버트는 실험 중단을 선언한다.

“그날 난 잠시나마 착각을 했었지. 아침 일찍부터 깨우길래 그랜드캐니언으로 야유회라도 가는 줄 알았지 뭔가. 피치 못할 사고가 몇건 있었던 터라 단합을 꾀하나보다 싶었다네. 노란 칫솔로 이를 닦고, 아껴둔 줄무니 바지도 꺼내 입었지. 비행기에 올라탄 것까진 모든 게 완벽했어. 허버트가 주사를 놓을 때도 얌전히 있었지. 멀미 예방 주사라고 생각했으니까. 우∼우∼. 끔찍하네. 그날 이후 15년은 정말이지 생각도 하기 싫구먼. 오클라호마의 연구소는 정말이지 거대한 감옥이었어. 허버트는 태어난 곳으로 나를 되돌려보내는 것이 가장 안정적일 것이라고 말했지만 새빨간 거짓말이었지. 용도 폐기된 나를 가장 간편하게 처리할 수 있는 곳이었다고 솔직히 말했다면 차라리 맘이 편했을지도 모를 일이야. 내가 컬럼비아대학의 비좁은 실험실을 얼마나 싫어했는지는 자네도 알걸세. 오클라호마 연구소의 우리는 최소한의 빛마저 없었다네. 맘껏 뛰놀지도 못했지. 연구소 주변엔 전기가 흐르는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었고, 연구소 직원들은 가벼운 일탈행동에도 전기봉을 휘둘러댔거든. 그보다 더 참을 수 없었던 건 내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지. 인간이 아니라면 난 뭔가. 허버트 일행이 내게 침팬지 ‘맥’을 소개해줬을 때 난 벌벌 떨었다네. 침팬지를 본 건 처음이었거든. 웃기는 일이지. 그럼에도 난 허버트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았지. 아니, 그러지 못했어. 1년 뒤 허버트가 날 찾아와 수화를 건넸을 때만 해도 난 사력을 다해 응답했지. 하지만 그는 1시간도 채 되지 않아 돌아가버렸지. TV에 얼굴 한번 들이밀려고 날 이용하다니. 며칠 동안 난 인간이 주는 음식을 거부했어. 그러곤 곰곰이 벽을 긁으며 생각했지. 침팬지가 인간이 될 수 없는 건 지능의 차이 때문인가. 지능이 월등하기 때문에 인간이 우리를 이렇게 다뤄도 되는가. 그렇다면 뇌가 손상된 인간이나 갓난아이, 노인 등을 동물처럼 다뤄도 되는 것 아닌가. 그제야 난 인간의 도덕이 근거없는 오만과 허울좋은 기만임을 깨달았지. 만약 자네가 책임질 수 없는 문제 때문에 자네의 권리가 제약된다면 어떨 것 같나. 그런 사회를 도덕적 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나?”

1983년 4월 텍사스주 머치슨

오클라호마 연구소의 애송이 연구원 밥 잉거솔은 인간에게 버림받은 님의 유일한 친구였다. 시간이 날 때마다 밥은 님을 우리에서 빼내 함께 산책했다. 허버트 교수가 못다 이룬 실험을 완수해서 유명세를 얻고 싶었던 마음 따윈 추호도 없었다. 밥은 님이 문장을 구사하지 못해도 님과 소통할 수 있었다. 님은 자신이 발견한 나무와 열매를 밥에게 일러줬고, 밥은 님에게 대마초를 제공하는 것으로 보답했다. 얼마 뒤 님은 뉴욕대 영장류의학실험연구소로 팔려갔지만, 밥은 허버트 일행처럼 님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둘 사이엔 계약이 아니라 우정이 있었다.

“생체실험 마루타가 될 줄 누가 알았겠나. 두 팔과 두 다리가 묶이고 난 뒤에야 인간에 대한 한줌의 희망마저 사라지더구먼.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윤리라는 건 따지고 보면 아전인수야. 유인원은 사람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사람을 대신할 피험자로 선택되곤 하는데, 이건 모순 아닌가. 사실 사람과 비슷하기 때문에 유인원을 피험자로 선택해선 안되는 것 아닌가. 20세기 말까지 미국의 7개 연구소에서 실험에 동원된 유인원이 모두 1만8300마리나 된다네. 사람이 살려면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고? 그건 변명이 아니라 폭력이네. 열등한 존재는 모두 처분해도 된다는 무지막지한 발상은 도대체 어디서 온 건가. 2007년 침팬지를 피험자로 한 논문 749편을 조사한 연구결과를 잠시 들려줌세. 결론은 간단하네. ‘인간의 질병 치료법을 개발하는 데 침팬지를 활용한 연구가 중대한 기여를 하지 않을뿐더러 반드시 필요하지도 않음이 입증됐다.’ 우리 침팬지만의 불평불만은 아니야. 인간이 실험실에서 아무렇지 않게 자행하는 끔찍한 폭력 몇 가지만 열거할 테니 들어보겠나. 혹시 뇌 손상과 안구운동의 효과를 측정하기 위한 붉은원숭이 실험에 대해 들어본 적 있나. 세개의 모터를 장착한 회전실험 전에 인간은 원숭이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두개골에 나사못을 박아넣는다네. 대만에선 무거운 물체를 떨어뜨려 쥐의 척추를 손상시키는데, 인간이 이 실험을 통해 얻어낸 사실이 뭔 줄 아나. 물체를 높은 데서 떨어뜨리면 부상 정도가 크다는 사실이 고작이야. 널리 사용되는 독성검사로 LD-50 검사라는 게 있지. 이건 어떤 물질이 주어진 동물 집단의 50% 이상을 죽이기 위해 어느 정도 양이 필요한지를 알아보는 테스트야. 이 테스트에서 살아남아도 얼마 되지 않아 죽어. 왜냐하면 오염된 실험대상이니까. 그들의 죽음으로 인간이 얻어낸 건 별반 다르지 않은, 그러나 각기 다른 이름을 단 주방세정제, 립스틱, 표백제, 샴푸 정도야. 조언은 그만하고, 밥이 내게 각별한 인간이었던 이유를 하나 일러주지. 나를 소유하고 싶어 했던 텍사스의 농장주이자 동물보호론자였던 에이로미도 밥의 배려를 이해하지 못했지. 그게 뭐냐하면 말이야. 그는 침팬지가 인간을 닮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다만 그는 인간이 침팬지를 닮았다고 생각했을 뿐이지. 내 보기엔 <프로젝트 님>의 주인공은 그러니까 밥이야. 내가 죽을 때까지 말하지 못했던 진실을 그가 행동으로 보여주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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