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섯살 생일을 3일 앞둔 어느 날, 낮에 아버지와 여동생을 살해하고, 저녁에 같은 학교 친구들을 학살한 케빈, 그 아이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고 이 영화는 말한다. 그 요청에 나대로 응해보려고 한다. 우선 케빈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한 사람들의 말을 들어봐야 할 것이다. 원작 소설 <케빈에 대하여> 한국어판의 뒤표지에는 케빈을 규정하는 두개의 단어가 적혀 있다. 하나는 ‘소시오패스’이고 다른 하나는 ‘괴물’이다. 둘 중 앞의 것은 대단히 부적절하게 선택된 단어로 보인다. 우리가 어떤 서사의 등장인물을 소시오패스니 사이코패스니 하며 ‘규정’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그리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지하생활자의 수기>의 ‘나’와 <이방인>의 ‘뫼르소’ 등을 소시오패스라 규정한다고 해서 그 소설의 비밀이 풀리지는 않는다. 좋은 서사란 대체로 그런 식의 거친 규정을 무너뜨리기 위해 고안된 정교한 발파장치다. 케빈을 소시오패스라고 규정해버리면 이 이야기는 ‘낳고 보니 아들이 소시오패스인’ 한 불행한 엄마의 이야기가 되고 만다. 그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공포와 연민의 감정뿐이다.
게다가 그 규정은 사실에 부합하지도 않는다. 적어도 영화에 보이는 바대로라면 케빈은 ‘반사회적 인격장애자’로 분류될 만한 아이가 아니다. 영화가 제시하는 정보 안에서 판단하건대 케빈의 가정생활과 학교생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가 곤란을 겪고 있는 대상 혹은 유일하게 집착하는 대상은 가족이나 학교 같은 ‘사회’가 아니라 특정한 한 사람, 오로지 엄마(에바)뿐이다. 차라리 이 영화는 ‘한 여자와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문제가 있다면 하필 그들이 모자관계로 만나야 했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이 만남에서 누가 더 불행해졌는가를 묻는다면 에바라고 답할 사람들이 많겠지만, 이 영화는 엄마를 일방적인 피해자 혹은 희생자로 그리지 않는다. 간절하게 아이를 기다려왔고 숭고한 모성애를 발휘할 준비가 돼 있는 엄마에게 불운하게도 특별한 아이가 태어났다면 출산은 신의 저주가 되고 엄마는 극복의 주체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에바는 그렇지 않았다. 원하지 않는 아이를 낳아야 했고 그래서 그 아이를 사랑할 수 없었다. 도덕적으로 단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는 것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이 서사에서는 저주와 극복의 주체가 불안정하게 엉킨다. 낳아보니 자식이 케빈이라는 것은 에바에게 저주였다고 주장할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태어나보니 엄마가 에바였다는 것은 케빈에게도 불운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에바가 케빈을 극복해야 했던 것처럼 케빈도 에바를 극복해야 했다. 이 영화의 제목은 <에바에 대하여>가 아니라 <케빈에 대하여>이지만, 우리는 에바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라면 케빈에 대해서도 침묵해야 할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앞서 기각한 ‘소시오패스’라는 표현과는 달리) ‘괴물’이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소시오패스는 ‘절대적인’ 진단명이지만 괴물은 ‘상대적인’ 규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체로 소시오패스가 아니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누군가에게나 언제든지 괴물이 될 수는 있다. 이런 의미에서 괴물이라는 규정이 상대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케빈과 에바에게도 (다시 말하지만, 도덕적 단죄 없이)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케빈은 괴물로 태어난 것인가 아니면 괴물로 길러진 것인가. 그가 괴물로 길러진 것이라면 괴물을 기른 존재는 괴 물인가 아닌가.
나는 지금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1818)을 염두에 두고 있다. 광기어린 열정으로 생명을 창조한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뒤늦게 후회하며 피조물을 혐오했고, 피조물은 자신이 태어났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해 고통받다가 정말로 괴물이 돼버렸다. “나는 불행하기 때문에 사악하다. (…) 인간이 나를 동정하지 않는데 내가 왜 인간을 동정해야 하는지 말해달라.” 오랜 세월 동안 대중들이 이 소설에서 창조주와 피조물의 이름을 혼동해온 것은 징후적이다. 누가 괴물인가. 누가 진짜 괴물인지를 가려내자는 뜻이 아니다. 어느 두 존재가 만나 거기서 하나의 괴물이 탄생했다면 그것은 어느 한 사람만의 책임은 아닐 것이라는 말이다. 에바가 케빈을 출산하는 장면에서 린 램지 감독은 영상을 일그러뜨려서 피사체가 흡사 괴물처럼 보이도록 했다. 그 화면에 찍힌 것이 침대에 누운 에바인지 자궁 밖으로 나오고 있는 케빈인지 나는 모른다. 두 사람 중 하나가 괴물인 것이 아니라, 둘 중 누구도 원하지 않은 그 관계 자체에 ‘괴물성’이 있지는 않은가. 본래 괴물이 아니었으나 둘이 만나서 함께 괴물을 탄생시킨 두 사람의 역사를 살피자.
어떤 만남의 역사
첫 번째 장면. 자지러지게 울고 있는 케빈과 어쩔 줄 몰라 하는 에바의 모습이 보인다. 이어서 케빈을 유모차에 태운 에바가 거리를 걸어가는데 이때도 케빈은 동네가 떠나가라 괴성을 지른다. 이 두 장면을 보고 케빈이 처음부터 이상한 아이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려면 처음부터 에바에게도 문제가 있었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앞의 장면에서 자지러지게 울고 있는 케빈을 에바는 ‘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들고’ 있다. 그리고 에바는 케빈을 ‘야’(Hey)라고 부른다. 이 장면만 따로 떼놓고 본다면 두 사람을 ‘일반적인’ 모자관계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에바는 이웃집 아이를 돌보느라 진땀을 흘리는 미혼여성처럼 보인다. 뒤의 장면에서 에바는 케빈이 지르는 괴성을 견디다 못해 공사장 근처에 유모차를 세운다. 케빈의 괴성을 더 큰 소음으로 덮어버리기 위해서다. 케빈이 공사장의 소음에 물리적 충격을 받을 수도 있다는 위험을 에바는 잊었거나 무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에바를 이해할 수 있지만 그녀에게 동의할 수는 없다. 에바는 미숙했다. 물론 ‘좋은 엄마’가 아니라고 해서 ‘나쁜 여자’인 것은 아니다.
두 번째 장면. 이제 말을 시작할 법한 나이가 되었음에도 케빈은 침묵을 고집한다. 에바는 케빈에게 ‘엄마’나 ‘공’ 따위의 말을 가르친다. 이 장면에서 에바는 케빈을 2~3m 정도 떨어진 곳에 혼자 앉혀놓고 ‘공’이라는 말을 가르치기 위해서 케빈에게 공을 굴려 보낸다. 자기에게로 굴러온 공을 보고 케빈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첫 번째는 무반응, 두 번째는 반응, 세 번째는 다시 무반응이다. 왜 이런 변화를 보이는가. 케빈은 자신이 공에 반응하지 않다가 문득 반응하면, 그 변화에 엄마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을 것이다. 그래서 두 번째로 굴러온 공에 반응했다. 에바는 박수를 치며 케빈을 칭찬하지만 이는 지진아를 격려하는 교사의 모습이지 아들을 자랑스러워하는 엄마의 모습이 아니다. 어쩌면 케빈은 엄마가 안아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가 좌절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세 번째에 다시 무반응으로 돌아섰을 것이다. 이 장면은 겉보기와는 달리 사실상 아들이 엄마를 테스트하는 장면에 가깝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에바는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말을 케빈에게 하고 만다. “엄마는 네가 태어나기 전에 더 행복했어.”
세 번째 장면. 에바에게 출산이란, 비유컨대, 기적 같은 선물을 가져다주는 산타클로스가 아니라 가압류 딱지를 붙이러 온 집달리(執達吏)다. 그래서 그녀는 모험가로 세계를 누비는 동안 수집한 각종 세계지도와 애장품들로 자신만의 방을 꾸민다. 이 행위의 의미를 궁금해하는 케빈에게 에바는 말한다. 누구나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내게는 나의 공간이, 네게는 너의 공간이. 에바가 케빈에게 친절한 교사가 되려고 할 때마다 그녀는 차가운 엄마가 돼버린다. 케빈이 원한 것은 ‘둘의 공간’이었을 것이나 그 기대는 또 한번 좌절되었다. 엄마는 언제든 이국의 땅으로 떠날 수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케빈에게 자신이 언제든 버림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뜻할 뿐이다. (뒤에 둘이 함께 차를 타고 집로 돌아오는 장면에서 케빈이 에바가 틀어놓은 제3세계 음악에 불만을 토로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먼 이국의 땅을 생각하게 하는 그 음악은 엄마의 꿈이 지금 여기에 있지 않다는 것을 케빈에게 암시했을 것이다.) 케빈이 할 수 있는 일은 어쩌면 하나뿐이다. 엄마가 떠날 수 없게 그 세계를 파괴하는 것. 그리고 케빈은 그 일을 했다.
네 번째 장면과 다섯 번째 장면. 지금까지의 흐름을 바꾸는 두번의 계기가 등장한다. 대소변을 가리지 않는 케빈의 행위에 담겨 있는 메시지를 추론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에바는 그 의미를 모르거나 모른 척한다. 엄마는 아들과 시종일관 ‘대결’의 자세를 취한다. 아들이 공격하면 엄마는 반격한다. 그 반격의 와중에 케빈은 부상을 입는데 이를 계기로 팽팽한 균형은 무너진다. 이후 케빈이 대소변을 가리기 시작한 것은 화해의 제스처가 아니라, 에바가 자신에게 죄책감을 품게 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자신도 공격 카드 하나를 내려놓은 것일 뿐이다. 케빈에게 진정한 변화가 찾아오게 되는 계기는 에바의 임신이다. 비록 케빈이 갓 태어난 여동생의 얼굴에 어항의 물을 뿌리면서 저항하기는 하지만(이 장면은 이후 화학약품으로 여동생의 한쪽 눈을 멀게 하는 사건의 예고처럼 보인다), 그 방법이 무익하다는 것을 깨닫고, 여동생보다 더 사랑스러워지는 쪽을 선택한다. 동화책을 읽어주는 에바에게 케빈은 말한다. “미안해, 엄마.” 그러나 여기서도 에바가 케빈을 안는 것이 아니라 케빈이 에바에게 안긴다.
케빈이 띄운 마지막 편지
두 사람이 함께 등장하는 거의 모든 장면을 위와 같이 분석해볼 수 있을 것이다. 케빈은 끊임없이 에바에게 편지를 보내고, 에바는 그 편지를 받지 못하거나 거꾸로 읽는다. 에바는 (적어도 영화가 보여주는 화면 안에서는) 한번도 진심으로 케빈을 안아준 적이 없고, 케빈이 다쳤을 때 거의 유일하게 “사랑해, 아들”이라고 말하지만 아들의 날선 반응 앞에서 두말없이 방을 나와버렸다. 이런 상황이 16년 동안 반복되면서 케빈은 불가피하게 하나의 태도를 습득하게 된다. 그것은 자신이 엄마에게 사랑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견뎌내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사랑받지 못하는 게 당연한 존재로 만드는 일이다. 엄마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비참한 아들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엄마에게 지독하게 구는 나쁜 아들이 되는 것이 더 견딜 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이제 에바는 케빈에게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었다. 자신의 악행을 지켜보는 유일한 관객인 에바가 존재해야만 케빈의 연기는 계속될 수 있고, 그러는 동안에만 그는 버림받은 아들이 아닐 수 있는 것이다. 이것도 균형이라면 균형이지만 그 균형도 곧 깨어진다.
그 계기는 부모의 이혼이다. 케빈과 실리아의 양육권이 각각 아빠와 엄마에게 귀속된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이 결정만큼 케빈에게 충격적인 것은 없었을 것이다. 16년 동안 케빈을 지배해온 것은 엄마가 자신을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었는데 이제 그것이 실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일을 계기로 케빈은 에바에게 마지막 편지를 띄우기로 결심한다. 그것은 16년 동안 답장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복수’의 편지이고, 그 많은 편지들에 적혀 있었던 단 한마디인 “나를 사랑해주세요!”를 다시 한번 피로 적어 띄우는 마지막 ‘구애’의 편지다. 그러나 케빈은 자신의 편지가 복수라고만 생각할 뿐 한편으로는 구애이기도 하다는 것을 모른다. 그는 그것을 감옥에서 2년을 보낸 뒤에야 알게 될 것이다. “이제는 들어야겠어, 왜지?”(I want you to tell me, why?) 에바의 물음에 케빈은 답한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잘 모르겠어.”(I used to think I knew, but now I’m not so sure.)
에바가 받은 마지막 편지
당연히 에바를 쏠 수는 없다. 그녀는 그 편지의 유일한 수신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영화는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2003)와 비교될 만한 영화가 아닐 것이다. 이 피의 편지는 사회 전체가 아니라 오로지 한 사람을 위해 쓰인 것이기 때문이다.) 편지를 받은 에바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피의 편지를 받았으므로 그녀는 온통 붉은색이다. 꿈을 꿀 때는 토마토 축제의 붉음 속에 있고, 깨어 있을 때는 붉은 페인트로 더럽혀진 집을 청소한다. 이 색은 에바의 패션(passion, ‘열정’ 혹은 ‘수난’)을 뜻할 것이다. 토마토의 붉은색은 에바의 열정을, 더러운 붉은 페인트는 그녀의 수난을. 그러나 에바의 열정과 수난을 인과관계로 오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열정이 수난을 부른 것이 아니다. 그렇게 읽는 순간 우리는 에바를 단죄하게 된다. 에바에게 죄가 있다면 그녀가 에바라는 죄밖에 없다. 한 여자가 한 남자를 사랑하는 데 실패했다고 해서 그녀를 죄인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비록 그 한 여자가 ‘엄마’이고 그 한 남자가 ‘아들’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케빈이 그럴 수밖에 없었듯이 에바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에바가 그저 ‘자기 자신인’ 채로 멈추는 것은 아니다. 사건 이후에 그녀는 변하기 시작한다. 어린 케빈은 말한 적이 있다. “사랑하는 것과 익숙해지는 것은 달라요. 엄마도 나를 익숙하게 여기기는 하잖아요.” 사랑할 수 없는 존재에게 16년 동안 익숙해졌을 뿐이었던 에바는 자신이 한번도 케빈을 진심으로 이해해보려고 노력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마지막 편지를 받고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에바는 (자신을 상징하는 색인) 붉은 페인트를 지우고, (케빈을 상징하는 색인) 푸른 페인트를 칠한다(케빈의 방이 푸른색이었기 때문이다). 케빈의 옷을 다림질하고 그 옷을 입어보기도 한다. 이제 에바는 케빈을 사랑하게 된 것일까? 아니다. 그녀는 다만 케빈이 보낸 편지를 더듬거리며 읽고 있을 뿐이고 케빈이 되어보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에바는 케빈을 힘껏 안아주지만, 이 장면에서도 에바는 진심으로 케빈을 안고 있다기보다는, 그저 안는다는 행위를 ‘시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에바가 케빈을 안아주는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것은 중요한 변화다.*
이 영화는 여기에 괴물이 있다면 둘 중 누가 괴물이냐고 묻고, 누가 괴물인지 결정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어느 누구도 괴물이 아니라고 답한다. 이것은 그저 서로를 ‘정상적으로’ 사랑하는 데 실패한 두 사람의 이야기다. 한 사람은 덜 사랑했고, 바로 그랬기 때문에, 다른 한 사람은 너무 사랑했다. 그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둘은 노력했다. 엄마는 아들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하는 척했고, 아들은 엄마를 사랑했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 척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파국이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둘 모두를 기소하는 데 실패한다. 단지 이해하려고 애쓸 뿐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케빈을 소시오패스 살인마로, 에바를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나쁜 엄마로 기소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 두 사람을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은 이 이야기 내부에 있으며, 일단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는 한, 누구도 법적 판단 혹은 도덕적 판단의 기준을 휘두를 수 없게 된다. 기소에 정확한 방식으로 실패하는 것이 좋은 서사의 목표라면, 이 영화는 제 목표를 달성하는 데 성공했다.
*[주석]이런 맥락에서 영화의 곳곳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의 노랫말들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그것들이 케빈의 시점에서 불리고 있기 때문이다. 제라르 주네트의 용어를 빌려오자면 이 영화의 초점화자(focalizer)는 에바이기 때문에 모든 사건은 에바의 인식 지평 위에서 전개된다(원작 소설은 에바의 1인칭 시점으로 쓰였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케빈의 내면을 이해할 수 있는 정보는 그가 하는 ‘대사’를 제외하고는 없다. 게다가 과거와 현재를 번갈아 보여주며 진행되는 이 영화에서 현재 시점의 서사는, 케빈은 감옥에 있으므로, 당연히 에바를 통해서만 진행된다. 그 노래들은 (에바가 케빈의 방을 뒤지는 장면을 제외하고는) 주로 현재 시점의 서사가 진행될 때 흘러나오는데, 그 노랫말들은 이 상황에서 케빈이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하는 궁금증을 얼마간 해결해준다. 그 노래들이 에바의 현재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게 경쾌할 때 그것에는 케빈의 조롱이 담기고, 구슬픈 톤의 노래가 흘러나올 때 거기에는 케빈의 탄식이 담긴다. 이 노래들이 적절한 순간에 삽입돼서 에바와 케빈을 연결하고, 케빈을 더 깊이 이해해보기로 결심한 에바의 변화를 지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