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하루라도 빨리 고향을 뜨고 싶었다. 부모님께 불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손바닥만 한 땅뙈기도 없는 형편에도 중학교까지 마치게 해주셨는데, 불만이라니! 당치 않은 소리다. 나는 다만 이 촌구석이 지긋지긋했을 뿐이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게 마음먹은 대로 되던가? 먼저 떠났던 친구 소식이 마을 전체에 퍼지면서, 상경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YH무역인가 하는 가발 공장에서 일하던 삼숙이가 글쎄, 데모를 하다 경찰에 잡혀갔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그년이 서울 가더니 빨갱이가 되었다”며 혀를 끌끌 찼다. 그리고 내게 고향 바깥으로 나가는 건 아예 꿈도 꾸지 말라고 못박았다. 하긴, 옛날 여순반란사건으로 풍비박산났던 집안 내력을 떠올려보면, 아버지의 반응이 이해가 안되는 것은 아니었다.
지난 추석에 선물꾸러미를 싸들고 내려왔을 때만 해도 삼숙이에게 그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가난한 집구석, 입 하나 덜자고 방배동인가, 먼 친척집으로 식모살이를 떠난 게 벌써 3년 전 일이었다. 삼숙이는 주인집 마나님 눈치 보며 일하기가 웬만한 시집살이 뺨치고, 게다가 여대 다닌다는 그 집 딸년의 비위 맞추기도 영 쉽지 않다고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잔디 정원이 펼쳐진 이층 양옥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부럽기만 했다. 생각해보면, 아마 그때 삼숙이는 이미 식모살이를 그만두기로 작정했던 것 같다.
아무튼, 삼숙이 때문에 나의 상경 길은 막히고 말았다. 차선책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읍내 버스 안내양이 되기로 했던 것이다. 시골 구석구석을 뱅뱅 맴돌 뿐인 버스였지만, 거기에 몸을 실을 수만 있다면, 엄마가 장돌뱅이 팔자라고 놀려대던 내 역마살도 조금 가라앉힐 수 있을 것 같았다. 출근 첫날, 양 갈래로 딴 머리에 자주색 빵모자를 쓰고 국방색 유니폼을 입어보니,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모자와 색깔을 맞춘 장갑, 그리고 허리춤에 찬 검정색 지갑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는 안내양으로 변신한 내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적어도 시골 아낙네들의 촌티로부터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내게 도시 처녀의 세련된 모습을 두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읍내 중학교에 새로 부임한 미술 선생 덕분이었다. 그녀가 시외버스터미널 앞에 서 있는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녀는 한번도 밭일 따윈 해보지 않았을 야윈 어깨에 화구통을 멘 채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후 그녀는 하루에 두번, 출근길과 퇴근길에 우리 버스를 탔고, 그때마다 들뜬 기분으로 중학생 때 읽었던 <소나기>라는 소설을 떠올렸다. 나는 그녀 덕분에 소년이 윤 초시 댁 손녀를 처음 보았을 때 어떤 심정이었는지 실감해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런 설렘의 감정은 이내 사그라지고 말았다. 글쎄, 얼마 뒤 미술 선생이 젊은 총각 한명과 함께 버스에 올랐던 것이다. 나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말들로 대화를 나누는 그들을 보며, 배신감과 질투심, 그 어디에도 마음을 두지 못한 채 바보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조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