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리포트]
[추모] 당신의 키스를 기억합니다
2012-08-28
글 : 이영진
향년 89살, 8월20일 타계한 원로배우 윤인자

“그 사람 누가 욕할까. 언제 봐도 반가운 사람이었는데….” 원로배우 윤인자가 8월20일 노환으로 타계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김수용 감독의 안타까운 탄식은 그리움으로 가득했다. 향년 89살. 서구적인 마스크, 범상치 않은 카리스마, 그리고 무엇보다 탄탄한 연기력을 갖춘 고인은 1950, 60년대를 대표하는 성격파 배우였다. 1923년 황해도 사리원에서 태어난 고인은 악극단에서 연기를 시작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예술극회, 신협 등에서 활동하며 연극 무대에 섰다. 한국영화 최초의 키스장면이 등장하는 한형모 감독의 <운명의 손>(1954)은 고인의 배우 인생에 있어 특별한 전환점이었다. 미모의 북한 스파이 마가렛 역할로 주목받았던 고인은 <구원의 정화>(1956), <옥단춘>(1956), <전후파>(1957), <그 여자의 일생>(1957) 등에서 연거푸 주인공을 맡는다. 영화평론가 김종원은 “<운명의 손>의 키스 신이 화제가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운명의 손> <전후파>에서 윤인자가 맡았던 역할들이 선구 격의 악녀 캐릭터라 회자되는 <지옥화>(1958)의 양공주 소냐(최은희)보다 앞서 있다는 점을 잊어선 안된다”고 말한다.

‘윤인자의 시대’는 그만큼 강렬했지만 동시에 짧았다. 서른 너머 영화에 데뷔했던 고인은 1950년대 후반 들어 문정숙, 김지미 등에게 번번이 주역을 빼앗겼다. 하지만 이는 수모가 아니라 또 다른 기회였다. 전후 세대엔 <노다지>(1961), <마부>(1961), <빨간 마후라>(1964), <명동아줌마>(1964) 등에서 고인이 되살려낸 “박력과 열정이 넘치는” 캐릭터들이 더 인상적일 것이다. <춘향>(1968)에서 마지막으로 고인과 작업했다는 김수용 감독 역시 “아무리 봐도 그 많은 월매 중 윤인자의 월매가 최고다. 윤인자라는 인물 자체가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재주가 있다”고 평한다. 고인 역시 ‘조연’이라는 딱지를 그다지 의식하지 않았던 듯하다. 생전의 고인은 “톡 튀는 역할이면 좋았다”고 밝힌 적이 있다. ‘성적 매력이 넘쳐나는 배우’라는 당시 평가에 대한 답변 역시 기막히게 호탕하다. “그거 아무나 할 수 없는 거야. 요부 끼는 자연히 풍겨야지. 그거 몸에 배지 않았는데 막 그냥 억지로 그러면 그거 역겹지. 그거 구역질난다고. 아주 머리에 지진 나는 일이야.”

죽음을 맞이하기 전 고인은 이미 세상을 한 차례 등진 일이 있다. 1976년 돌연 출가해 비구니가 된 것이다. 은막을 두르는 대신 법복을 입은 까닭은 뭘까. 이혼으로 끝난 두번의 결혼? 사업 실패로 인한 재정적 곤란? 아니면 배우로서 설 자리를 찾을 수 없다는 자괴감? 2년 뒤 파계하고 환속했을 때 고인에겐 신산한 삶을 견뎌낼 면역력이 없었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김기영 감독의 <바보사냥>(1984), 임권택 감독의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 신승수 감독의 <수탉>(1990) 등에 출연했지만 재기의 의지를 불사르기에 그녀의 육체는 너무 쇠잔했다. 평전 <나는 대한의 꽃이었다>에는 늘그막의 고인에 관한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의정부의 철거촌에서 기거하며 일용직 노동자들의 빨래를 대신 해주는 할머니가 있었다. 할머니의 마음 씀씀이에 끌린 노동자들이 하루는 소주를 건넸다. “난 소주 안 마셔!” 맥주를 방에서 꺼내와 마시던 그녀는 계속되는 추궁에도 끝내 자신이 ‘배우 윤인자’라고 밝히지 않았다. 다만, 남정네들의 구릿빛 근육을 응시하며 젊은 날의 로맨스를 떠올렸다고 한다. 그때 고인이 마음으로 보았던 건 영화(映畵)일까. 영화(榮華)일까.

참조 <한국영화를 말한다>(한국영상자료원),<나는 대한의 꽃이었다>(해맞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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