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낮에 대로에서 아이를 안은 여자가 울고 있다. 영화 속에서 배우 안내상은 말한다. 남자인 자신은 100년이 가도 그녀를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어쩌면 직접적 표현일 수 있겠다. <청포도 사탕: 17년 전의 약속>(이하 <청포도 사탕>)은 여자의 마음을 담은 영화다. 2007년 <열세살, 수아>로 데뷔한 김희정이 연출했으며, 2010년 칸영화제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선정돼 파리에서 시나리오를 완성했다고 한다. 한 여자를 둘러싸고 다른 두명의 기억이 조합되는데, 이 과정에서 과거는 청명해지고 동시에 마음속 상처는 치유된다. 선주(박진희)는 지훈(최원영)과의 결혼을 앞두고 나타난 여중 동창 소라(박지윤) 때문에 혼란에 빠진다. 잊고 지내던 17년 전의 기억을 그녀가 가지고 나타난 것이다. 이렇게 기억을 지운 여자와 진실을 찾으려는 또 다른 이의 여정이 시작된다. 그들은 일을 핑계로 부산에 사는, 죽은 동창 여은의 언니인 정은(김정난)과 만난다. 이렇게 공통된 아픔을 지닌 세 여자가 어우러져 엇갈렸던 기억은 제자리를 찾아간다. 아파서 피하고 싶지만, 이를 견디는 것이 약이 될 것이란 걸 주인공인 선주도 안다. 영화 속의 대사처럼 새집에 곰팡이가 피는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다. 벽지를 덧씌운다고 마르지 않은 벽이 영원히 가려지진 않는다. 그러니 선주의 가슴에도 이제 햇볕을 쬐어줄 때가 됐다.
현실에서 결혼을 앞두고 고민하는 친구들을 한번쯤은 보았다. 학창 시절 단짝친구의 관심이 딴 아이에게 옮겨져 불안했던 적도 있다. <청포도 사탕>은 한국에서 여학교를 거치며 성장한 이들이라면 누구나 느꼈을 법한 감정의 흐름을 모아서 만든 ‘30대의 성장드라마’이다. 하나의 사건 때문에 아무것도 아니었던 일상의 감정들이 모여서 폭발하는데, 이는 그 자체로 위협이 될 법하다. 때문에 기억이 무섭다고 영화는 말한다. 그 상처, 혹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마주보아야 하는 내면의 아픔은 우리의 자화상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영화의 후반부, 카메라의 정면을 응시하는 선주의 시선은 막 상처를 뚫고 나온 승자의 것처럼 보인다. 마치 베르테르인 양 상처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들에게 영화는, 단번에 아픔을 걷어내기보다는 한겹씩 떼어내서 치료하는 편이 나을 거라고 이른다. 무미한 줄 알았던 상처는 의외로 강하고, 이를 치료하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아픔은 감수해야 한다고 말이다. ‘청포도 사탕’이 소품으로 등장한다. 이는 현재와 과거를 잇는 다리, 때론 청명한 식감을 드러내며 인물들의 감각을 이끄는 역할을 한다. 이처럼 애틋한 소품이나 꼼꼼한 비유가 담긴 대사, 화면의 구성력 등 살필 요소가 많은 영화이다. 다만 관객의 주위를 끌 만한 흥미로운 스토리 부재는 아쉽다. 성수대교 붕괴라는 파급력 있는 소재가 이를 모두 덮진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