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남자를 망가뜨리는 것은 사랑과 암이다”
2012-09-13
글 : 오승욱 (영화감독)
오승욱 감독, 토니 스콧을 추모하다

할리우드의 마지막 남자가 작별을 고했다. 냉전시대의 하드보디와 테크노 블록버스터의 슈퍼히어로들 사이에서 고집스레 아날로그 마초 영웅의 세계를 그려오던 토니 스콧은 자기만의 견고한 성(城)을 구축한 장인이었다. 1990년대 이후 그는 마치 <언스토퍼블>에서 멈추지 않고 달려가는 열차처럼 맹렬한 에너지로 영화를 만들어왔다. 예상치 못한 실패도 의외의 성공도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세계를 결코 벗어나지 않았다. <마지막 보이스카웃>으로 처음 토니 스콧과 만났다는 오승욱 감독이 그의 영화들을 회고한다. 그의 영화에 빠져든 열렬한 팬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영화는 남다른 데가 있었다. 토니 스콧의 필모그래피에서 발견되는 남자들의 불가해하고도 기구한 운명, 그 애증어린 시선으로 토니 스콧의 영화들을 되돌아본다.

토니 스콧(왼쪽) 감독은 2004년작 <맨 온 파이어>부터 <데자뷰> <펠헴 123>과 <언스토퍼블>까지 덴젤 워싱턴(오른쪽)과 협업했다.

내가 처음 토니 스콧의 영화를 본 것은 1990년대 초 사당동에 위치한 동시상영관 사당극장에서였다. 이미 한물가기 시작한 홍콩 누아르가 변신을 거듭하다 태어난 <도성> 또는 <도신> 같은 도박영화 시리즈 중 한편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았다 덤으로 본 영화였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나는 정신이 없었다. 거대한 미식축구장의 야간 게임. 환호. 열광. 치어리더. 브라스 밴드. 땀. 헬멧을 쓴 선수들. 모든 것이 뒤범벅이 되어 있는 열광의 도가니 속에서 흑인 미식축구선수가 공을 받아 터치다운을 하기 위해 달린다. 그를 막는 상대방 선수들을 밀어내고 터치다운 라인을 향해 달리는 흑인 선수. 마지막 라인이 눈앞에 보인다. 필사적으로 그를 막으려 달려드는 상대방 선수들. 공을 쥔 흑인 선수가 갑자기 총을 꺼내든다. 검은 손에 쥔 검은 총에서 불꽃이 튄다. 응원 소리에 총소리가 묻힌다. 관중. 선수들.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 공을 쥔 채 계속 총을 발사하는 선수. 그의 앞을 가로막는 상대방 선수들이 쓰러진다. 한손에 총. 다른 한손에는 공을 쥔 선수가 드디어 터치다운을 한다. 운동장에 죽어 쓰러진 상대방 선수들. 환호가 사라지고 고요함 속에 빗소리만 들린다. 경비대와 선수들 모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자 경악한다. 헬멧을 벗은 흑인 선수는 상대방 선수들을 쏜 총을 들어 자신의 머리에 가져간다. 모두 숨을 죽이고 그를 본다. 발사되는 총. 깜짝 놀란 오프닝이었다. 뭐지?

<트루 로맨스>

터프했던, 하지만 멋지지 않았던 브루스 윌리스

그때 나는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가 멋져서 놀랐다기보다는 천하의 할리우드영화에서 홍콩 누아르영화의 흔적 또는 영향을 느꼈기에 놀랐다. 홍콩 누아르에서나 볼 수 있었던 과장되고 장황한 수사들과 과거 할리우드영화가 차마 가지 못한 과도한 감상주의가 영화 속에 있었다. 물론 홍콩 누아르의 기술적 불균질함을 제거한 때깔 좋은 균질한 영화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딸의 인형 속에 숨긴 권총으로 상대방을 제거하는 장면은 주인공의 감추어두었던 필살의 기술로 반전되는 마카로니 웨스턴을 연상케 하였다.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군. 할리우드영화가 홍콩영화를 모방하다니! 홍콩 누아르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고 같이 보았던 홍콩 도박영화의 제목은 기억이 안 나지만 덤으로 본 <라스트 보이스카웃>이라는 영화의 제목만은 기억하게 되었다. 그러나 손에 땀을 쥐는 사건들이 연속되고, 총탄과 화염이 난무하는 대단한 액션영화였지만 멋있는 영화를 보았다는 기분은 전혀 들지 않았다. <라스트 보이스카웃>의 터프한 주인공 브루스 윌리스는 전혀 멋지지 않았다.

중학생 때 보고 싶은 할리우드 액션영화나 홍콩 무협영화가 동네 극장에 들어왔을 때 극장 매표구 앞에 걸려 있었던 “미성년자 관람불가”라는 붉은 글씨가 얼마나 원망스러웠는지 모른다. 뭐 그렇다고 해서 영화를 보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학생지도부 선생들이 들이닥칠까 불안에 떨었다. 빨리 미성년자라는 딱지를 떼고 마음껏 당당하게 저 건너편에서 앞좌석에 다리를 올리고 담배를 뻑뻑 피워대면서 영화를 보는 동네 백수 형들과 아저씨들처럼 영화를 볼 그날을 기다렸었다. 1980년대 초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미성년자 관람불가 간판이 걸린 매표구 앞에서 당당하게 표를 요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학생지도부 선생들의 눈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으며, 호기롭게 앞에 놓인 의자에 다리를 떡 올리고 비스듬히 앉아 담배를 뻐끔뻐끔 피우며 영화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정작 마음대로 당당하게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를 볼 나이가 되었는데, 보고 싶어서 밤잠을 설치고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그런 멋있는 영화들이 없었다. 무협영화들은 민망하기 짝이 없는 짝퉁 이소룡 영화가 끈질기게 버티고 있었고, 홍콩 액션영화들은 성룡표 코미디 액션이 극장가를 점령하고 있었다. 초등학생이었다면 성룡에게 열광했겠지만 난 스무살이 넘은 나이였다. 오랜만에 얼굴을 보인 리 마빈의 <델타 포스>는 참고 보기가 민망할 정도로 시시했고, 실베스터 스탤론의 <람보2>는 보다가 욕이 나왔으며,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코만도>는 액션영화를 보는 것이 이렇게 고통스러울 수도 있구나 하는 새로운 경험을 안겨주었다. 1980년대의 할리우드 액션영화들은 거의 대부분이 유치하고 멋이 없었다. 근육질의 사나이들이 시가를 물고 기관총을 들고 설치는데, 미안하게도 미군 홍보영화 같았다.

한차례 밀물처럼 총을 들고 설치는 무뇌아 근육질 주인공들의 전쟁액션물이 몰려왔다가 사라질 무렵, <다이 하드> <리쎌 웨폰> <프레데터> <로보캅> 같은 새로운 종류의 액션영화들이 나왔는데 나는 불감증에 걸린 것처럼 할리우드 액션영화들이 모두 시시했다. 어린 나이에 용감하게도 영화감독 지망생이었던 한 친구는 <로보캅>을 보고 입에 거품을 물며 영화가 대단하다고 했지만 “나는 이게 왜 대단하지? 10여년 전 영화 <와일드 번치>나 <프렌치 코넥션>의 멋에 반도 못 미치는데” 하며 구시렁거렸다. <라스트 보이스카웃>도 참 멋없는 영화였다. 영화가 시작되고 차 안에서 불편하게 새우잠을 자는 사나이의 등판이 보인다. 동네 꼬마들이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술 냄새 풀풀 풍기며 자고 있는 사나이를 놀리려 죽은 쥐를 배 위에 올려놓는다. 사나이가 깜짝 놀라 허둥거려야 재미있는데 이 무신경한 사나이는 여전히 코를 골며 잘도 잔다. 꼬마들이 사나이를 좀더 놀라게 하려고 접근한다. 벌떡 일어난 사나이가 꼬마 중 하나의 멱살을 잡고 권총을 들이댄다. 기겁하는 꼬마들. ‘어린아이에게 총을 들이댄 이 사나이는 누구지?’ 하면 사나이의 피곤에 전 얼굴이 드러난다. 브루스 윌리스다.

이마 위에 피곤이 10t 정도 얹혀 있고, 세상을 비웃는 것 같은 얇은 입술은 무기력을 5t 정도 물고 있는 것 같다. 천천히 일어난 사나이는 집으로 들어간다. 아니 제집 놔두고 왜 차에서 잤지? 이상한 놈이다. 그는 집 안으로 들어가 화장실의 변기 받침대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본다. 이 집 안에 남자는 자기 하나인데, 자기가 없는 새 어떤 남자가 이 집에 와서 변기를 쓴 것일까? 여기까지 이 무기력하고 피곤에 전 남자주인공은 아직 2% 부족하지만 그런대로 멋있다. 바람을 핀 아내. 아버지에게 상소리를 거침없이 해대는 어린 딸. 이 세상에 유일하게 친구라 믿었던 자는 간밤에 아내와 놀아났다. 그리고 그의 앞에 닥친 살인과 음모. 뭐 다 좋았다. 눈썹을 찌푸리고 “남자를 망가뜨리는 것은 사랑과 암이다”라 중얼거릴 때에도 정말 뜬금없고 이해하기가 어려웠지만 폼은 나는군 하고 생각했다. 자신을 해고한 부도덕한 변태 의원의 목숨을 살리려 고군분투하는 그의 모습도 괜찮았다. 사건을 해결하면 춤을 추겠다고 하고 암살범을 해치우고 나서 춤을 추는 모습이 미식축구 경기장의 전광판에 중계될 때에도 뭐 대단한 감동까지는 아니었지만 볼만했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뒤끝이 씁쓸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프랭크 카프라 감독의 1940년대 할리우드영화 <스미스씨 워싱턴 가다>(1939)나 <존 도우를 찾아서>(1941)의 액션영화판을 본 기분이었다. 저 터프하고 자존심에 상처받은 외로운 늑대 같은 사나이 브루스 윌리스는 왜 그렇게 멋이 없었을까?

<맨 온 파이어>

1980년대 액션히어로들의 터프함

1980년대 중반에 나오기 시작한 할리우드 액션영화 속의 거칠고 위협적인 주인공들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70년대 주인공들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던 고난도의 액션을 감당해야 했다. 공처가인지 아니면 아내 혐오증 환자인지 자신보다 잘나가는 아내에게서 어떻게 하면 좀 벗어날까 끊임없이 투덜대는 <다이 하드>의 주인공은 아내를 구하기 위해 맨발로 깨진 유리를 밟는 고생 끝에 잘 훈련된 테러리스트 30여명을 물리친다. 10년 전 그의 선배 형사인 뽀빠이 진 해크먼은 고작 추운 거리에서 덜덜 떨며 다 식어버린 커피를 마시며 따뜻한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악당을 감시하거나 좀 숨차게 달리는 것 정도였으니 <다이 하드>의 주인공 앞에서는 고생이라고 명함도 못 내민다. 그런데 나는 뽀빠이가 더 멋있었다.

80년대 중반에 등장한 새로운 액션영화를 만들었던 감독들이 있었다. 존 맥티어넌, 스티븐 홉킨스, 레니 할린이 그들이다. 당시 토니 스콧은 그다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감독은 아니었다. 2000년대가 되면서 달도 차면 기운다고 존 맥티어넌, 스티븐 홉킨스, 레니 할린의 이름은 새로운 세대들에게 밀려났다. 그런데 토니 스콧만은 건재했다. 매년 꾸준하게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영화들을 만들어냈다. 아니 점점 더 손에 땀을 쥐는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와 그에 걸맞은 완성도를 자랑하는 영화들을 만들어냈다. 80년대에 등장한 할리우드 액션영화의 감독 중 그는 최후의 승자였다. 대단한 일이다. 그런데 나는 <트루 로맨스> 단 한편을 제외하고 토니 스콧의 영화를 보고 멋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두편의 대단한 기차영화 <펠햄 123>과 <언스토퍼블>을 보고도 어마어마하게 잘 만든 영화라는 생각은 했지만 멋있는 영화라는 생각은 안 들었다. 덴젤 워싱턴이 과묵한 보디가드로 나오는 <맨 온 파이어>도 대단하고 재미는 있지만 멋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스파이 게임>의 숨막히는 오프닝이 대단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브래드 피트가 멋있다는 생각은 별로 안 들었다.

토니 스콧 영화의 주인공들은 대개 보통 사람들이다. <라스트 보이스카웃>에서 탐정 브루스 윌리스가 사는 집을 본 전직 미식축구선수 지미는 “와우 이거 정말 보통 사람들이 사는 이제는 남아 있지 않은 보통 사람의 집이다”라고 감탄한다. <펠햄 123>의 덴젤 위싱턴 역시 전철의 기관사 보조로 출발해서 미국의 보통 남자들이 거치는 고생을 하면서 차근차근 승진하여 그 노력과 충성에 걸맞은 위치에 오른 보통 사람이다. <언스토퍼블>의 덴젤 워싱턴 역시 마찬가지. 청교도적인 근면 성실함을 가진 보통 사람들인 주인공들이 사건을 만나고 상식적인 윤리감을 가지고 옳은 일을 하려고 고군분투한다. <펠햄 123>에서 전철 안의 인질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뇌물수수 혐의을 고백하는 덴젤 워싱턴은 감동적이다. <언스토퍼블>에서 30년간 철도원으로 근무하며 잔뼈가 굵었으나 결국엔 정리해고를 당한 덴젤 워싱턴이 마지막까지 자신의 기술과 경험으로 위기에 처한 도시를 구해내는 과정을 과장과 치장 없이 소박하게 표현한 연출도 감동적이었다.

그런데 두 영화의 라스트에 이르러 존 트래볼타를 쫓아가는 워싱턴과 열차의 연결부로 가서 총알처럼 쏟아지는 밀 알갱이를 맞으며 기차를 세우려는 장면에서 그의 아내와 두딸의 반응이 이상하고 왠지 마음에 걸린다. 그녀들은 목숨이 위태로운 무모한 아버지, 남편의 행동을 보고 파이팅을 외친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처음에는 저런 위험한 일에 뛰어든 남편과 아버지에 대해 혼란스러워하거나 고통스러워할 법도 한데 그녀들은 아버지가 실패를 하든 성공을 하든 영웅으로 거듭났다는 사실에만 주목한다. 그리고 라스트에는 그들의 갈등이 무엇이었건 간에 화해하고 포옹하고, 영웅이 된 아버지와 남편에게 축하를 보낸다. 그들은 진정한 미국의 보통 사람 영웅인 것이다. <라스트 보이스카웃>의 브루스 윌리스와 그의 딸, 아내 역시 윌리스의 영웅적 행위로 인해 라스트에서 눈녹듯 증오와 갈등이 사라지고 화해하고 포옹한다. 뭔가 영웅을 만들려는 과도한 집착과 강박이 있어 그것을 해치는 작은 갈등조차 용납을 안 하고 제거해버린 느낌이었다. 왜 토니 스콧은 저렇게까지 영웅을 만들려 하는가?

<마지막 보이스카웃>

무모함과 광기의 에너지

이쯤에서 1970년대에 만들어진 <택시 드라이버>가 겹친다. <택시 드라이버>의 주인공이 저지른 대학살이 오해로 미화되거나 아니면 시스템에 의해 의도적으로 곡해되어 미치광이는 영웅으로 탄생되고 영화를 보는 관객은 아메리칸 히어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레이건 정부는 이런 비뚤어진 시선들을 지닌 나약하고 콤플렉스가 가득한 영화가 아니라 강한 정신과 몸을 지니고 단순하면서도 소박한 삶을 사는 남성에 대한 의도적 찬양의 시대다. 그런 남성들 앞에서 여성들의 갈등과 오해는 씻은 듯 날아가고 그녀들은 양처럼 순해지며 기꺼이 멋진 남성에게 포옹한다. 60, 70년대 터프한 남성주인공들은 이해받지 못하고 그 스스로가 자신의 행동이 혹시 광기가 아니었을까를 의심하며 혼자 남겨진다. 그들의 강건함은 삐뚤어지고 나약한 마음을 감추기 위한 갑옷이 아니었을까 의심하게 된다.

존 포드 영화 <수색자>의 주인공 존 웨인은 인디언이 된 조카를 구해냈지만 그것이 광기였는지 가족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는지 혼란스럽다. 그가 한 대부분의 행동은 정의감이 아니라 광기에 가깝다. 그래서 그는 문을 열고 한쪽 어깨가 축 늘어져 황야를 향해 쓸쓸하게 걸어간다. 60년대의 가장 터프한 마초 주인공인 <더티 하리>의 칼라한 역시 범인을 잡고 나서 폐허 위에 혼자 남겨진다. 동료들 누구 하나 그의 옆으로 다가서지 않는다. 그는 위험한 인물이다. <프렌치 커넥션>의 ‘마초 킹’ 진 해크먼은 범인을 잡으려다 자신의 광기에 휩싸여 동료를 쏴죽이고 어두운 터널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속편에서는 범죄자들에게 납치된 해크먼이 마약중독자가 되어 범죄자와 형사간의 경계가 무너지고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진다. 하지만 토니 스콧의 주인공들은 80년대가 지나 강한 미국의 대통령 레이건이 치매에 걸리고 죽은 이후에도 아내가 사오라고 한 1갤런짜리 우유를 사들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집으로 돌아와 그들의 뜨거운 포옹을 받는 남자들이다.

80년대 마초 주인공들과 토니 스콧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무모함과 광기를 의심할 새가 없다. 그 틈은 언제나 가족들의 따뜻한 포옹으로 메워진다. 남성들의 광기, 히스테리는 영화에서 절대 새어나올 수가 없다. 토니 스콧이 항상 이야기하는 사내들은 대개 강건한 정신과 몸을 지니고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목표로 하는 자들이다. 그들의 세계는 약간의 갈등은 있지만 히스테리 같은 불균질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들은 강등되거나, 잘리거나, 버림받지만, <라스트 보이스카웃>에서 브루스 윌리스가 자신에게 다짐을 하듯 던진 대사, ‘남자를 망가뜨리는 사랑과 암’ 이외의 그 무엇도 그들을 꺾을 수는 없다. 아마도 이런 것이 토니 스콧 영화 속 남자주인공들의 정신세계일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고 세상을 움직이는 시스템 역시 단순하지 않다.

얼마 전, 강건한 몸과 정신,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사는 남자주인공만을 20여년간 이야기하던 감독이 죽었다. 그는 프랭크 카프라 감독 이후 미국 보이스카우트 남자들의 승리를 이야기하던 희귀한 감독이었다. 그것이 대단히 매력적이거나 멋있지는 않았지만 늘 가슴 한구석을 건드렸다. 그렇게 할리우드에서 ‘남자’들은 사라지고 이제 돈 많고 옷맵시 좋은 슈퍼히어로들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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