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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방배동 골목길 월담기
2012-09-21
글 : 박해천 (디자인 연구자)
<오래된 정원>

오늘따라 이상하게 동네는 한산했다. 학교 수업을 마친 아이들 몇몇이 골목을 서성이다가 눈이 맞았고, 딱지치기나 구슬 따먹기를 할 요량으로 어른들 눈에 잘 띄지 않는 뒷골목으로 향했다. 그런데 길모퉁이에 막 자리를 잡으려던 찰나, 바로 그 형이 나타났다. 피로에 찌든 얼굴에 군용 더플 백을 멘 초라한 행색이었지만, 나는 한눈에 그 형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 형은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이 사방을 둘러보더니, 우리를 보며 씨익 웃고선 재빨리 자기 집 담을 넘었다.

불과 몇년 전만 해도 그 형은 동네 유명 인사였다. 고등학교 다닐 때는 일등을 한번도 놓치지 않았고 명문대도 어렵지 않게 들어갔다고 했다. 그 형의 엄마는 동네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았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그 집을 바라보는 어른들의 시선이 싸늘하게 식기 시작했다. 그 형이 간첩 혐의로 수배되었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그 집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라고 했다. 한달 전, 학교 대표로 반공포스터 대회에 나갔다가 그림을 망친 것도 따지고 보면 그 형 때문이었다. 늑대 얼굴을 한 북한 괴뢰 도당을 그리려고 했는데, 글쎄, 자꾸 그 형 얼굴이 떠오르지 뭔가.

사실 나는 그 형의 공부 실력보다는 담타기 실력을 더 부러워했다. 1년 전인가, 나는 아이들과 동네 큰길에서 놀다가, 요령 없이 배트를 휘둘러 야구공을 남의 집 담장 너머로 넘기고 말았다. 또래 친구의 집이라면 초인종을 누른 뒤 사정을 설명하고선 공을 찾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허공 위로 솟아오른 공은 엉뚱한 곳을 착지점으로 선택했다. 창문이 언제나 굳게 닫혀져 있던 빨간 벽돌 이층집의 안마당에 떨어졌던 것이다. 집주인인 노인 부부는 아이들에게 절대로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둘 중 하나였다. 공을 넘긴 사람이 찾아온다는 불문율에 따라 담을 넘거나, 꾸중 들을 각오로 엄마한테 사정을 말해서 공을 변상하는 것. 그런데 전자를 택하기엔 그 집 담장이 유난히 높았다. 게다가 쇠창살까지 나서서 화살표 모양의 조막손들을 높이 치켜든 채, 월담하려는 시도를 사전에 봉쇄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따라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후자뿐이었다.

엄마의 화난 얼굴이 떠올라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그때, 그 형이 우리 앞에 나타났다. 길을 지나가다가, 골목 구석에 모여 있는 우리를 보더니 무슨 일인지 물었던 것이다. 사정을 들은 형은 나를 보며 씨익 웃었다. 그러고선 그 집 대문 옆의 쓰레기통을 딛고 올라 쇠창살의 밑동을 잡고선 담 위로 쓰윽 올라갔다. 형은 폭이 좁은 담 위에 두발을 디딘 뒤 몸을 세우고 약간 머뭇거리다가,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몇초가 지났을까? 대문이 찰칵 하고 열렸다. 형이 활짝 웃는 얼굴로 공을 들고 나왔고, 아이들은 ‘우와’ 하며 환호성을 터트렸다.

그렇게 내 마음속에 영웅으로 자리잡았던 그 형이 방금 전 사람들의 눈을 피해 자기 집 담을 넘어갔다. 나는 우연히 주운 전단을 신고해 연필 한 타를 받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파출소로 달려갈까도 잠깐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침묵으로 의리를 지키기로 했다. 사나이들끼리의 의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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