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환상을 꿈꾸는 인간의 욕망 <라폴로니드: 관용의 집>
2012-09-19
글 : 김태훈 (영화평론가)

세기가 바뀌는 1899년에서 1900년, 프랑스의 고급 매음굴인 ‘라폴로니드’에는 몸을 파는 여성들이 외부와 격리된 채 살아가고 있다. 보석으로 청혼받는 꿈을 꾼 마들랜(엘리스 바놀)은 내심 그 남자가 청혼하기를 바라지만 남자는 마들랜에게 칼로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힌다. 마들랜에게 결혼은 허황된 꿈일 뿐이다. 마들랜은 다른 여성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며 라폴로니드에서 살아간다. 폴린은 15살의 어린 나이에 돈을 벌기 위해 이곳에 왔다. 레아는 손님들을 끌기 위해 인형 흉내를 내고, 도도했던 쥴리는 매독에 걸려 죽음을 맞이하며, 크로필드는 마약에 의존하다 결국 마약 중독자가 된다. 이 공간을 이끌어가는 사장인 마리(노에미 르보브스키)도 이 공간을 지키기 위해 임대료를 올리려는 주인과 맞서 싸우며 노력한다.

이렇듯 영화는 마들랜의 이야기가 영화의 초반과 후반에 등장하며 구심점을 만들긴 하지만 영화의 주인공은 어느 한 인물이 아니라 많은 여성들이 숨쉬고 있는 공간 ‘라폴로니드’다. 영화는 여자들이 소풍을 나가는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제외하고 러닝타임의 대부분이 라폴로니드라는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은 외부와 완전히 격리되어 있으며 그 공간은 사교가 이루어지는 화려한 살롱과 섹스가 이루어지는 위층의 침실, 그리고 생활 공간인 주방과 욕실로 명확히 구분되어 있다. 사건은 일어나지만 어느 한 여인의 이야기가 중심이 아닌 서사 구조의 특징상 그 사건들은 영화 전체에 큰 파장을 일으키지 못하며 영화는 그 공간에서의 삶의 모습과 일상을 그려내는 데 집착한다. 눈부시도록 화려한 의상과 지독하리만큼 나른함이 지배하는 살롱, 무료한 반복만이 일어나는 침실, 온통 무채색의 욕실과 주방, 이렇듯 감독은 분할화면까지 써가며 단절된 공간을 보여주며 폐쇄 공간에서의 일상을 강조한다.

공간 못지않게 시간도 이 영화에서 중요하게 작용한다. 영화는 세기가 바뀌는 1899년과 1900년을 자막으로 넣어 시간적 배경으로 설정한다. 시간이 죽어버린 듯한 이 공간에서 세기라는 시간의 기준은 무효하다. 라폴로니드로 찾아온 손님들을 통해 급변하는 바깥 공간의 시간의 흐름을 던져주지만 이 공간은 블랙홀처럼 그 시간들을 빨아들인다. 영화에서의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의 직선적인 시간이 지배하지 않는다. 마들랜의 현실과 환상, 기억과 지각은 뒤섞이며 편집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뒤섞어 보여준다.

<라폴로니드: 관용의 집>은 매춘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임권택 감독의 <노는 계집 창>이나 김기덕 감독의 <나쁜 남자>, 아니면 우리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여느 사창가의 모습을 그린 영화와는 사뭇 다르다. 우중충한 뒷골목의 정서가 아니라 마네나 모네 등을 연상시키는 서양 명화 속을 거니는 느낌을 준다. 또 질곡 가득한 한 여인의 삶의 애환이나 사랑, 인생사를 그려내거나 혹은 그러한 사회의 시스템에 대한 비판에 무게중심을 맞추지 않는다. 여성들의 일상에 초점을 맞추지만 한 인물에 맞춰 감정이입시키지 않는다.

화려한 영상과 의상에 대비해 영화가 증폭하려는 것은 아름다움의 이면에 꿈틀거리고 끊임없이 환상을 좇는 인간의 욕망이다. 남자와 여자는 옷을 다 벗고 섹스하지 않는다. 여자는 기모노를 입거나 인형 흉내를 낸다. 영화에는 지속적으로 가면과 거울의 이미지가 등장한다. 마지막엔 아예 가면을 쓰고 섹스를 한다. 카메라가 담아내는 것은 남녀의 섹스가 아니라 옷을 입고, 가면을 쓰고, 또 다른 환상을 꿈꾸는 인간의 욕망이다. 라폴로니드를 찾은 남자들은 현실을 벗어날 환상을 꿈꾸고 그들을 맞는 여자들은 그들을 통해 그 현실을 벗어날 환상을 꿈꾼다. 영화는 공간과 시간을 집약시키고 그 공간 속 인간 군상의 일상을 통해 그들의 욕망의 모습들을 집요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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