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사랑의 가치가 게임이 되는 시대 <위험한 관계>
2012-10-10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때는 1930년대 일제 점령기 상하이. 하지만 중국 상류사회의 생활은 호화롭기만 하다. 당대의 사교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남자 셰이판(장동건)은 어떤 여인의 마음이건 훔쳐내는 데 어려움이 없다. 이즈음 이상한 게임이 시작된다. 셰이판이 오래전부터 흠모해온 단 한명의 여인이자 사교계의 숨은 실력자인 모지에위(장백지)가 셰이판에게 내기를 제안한다. 셰이판이 정숙하기로 소문난 미망인 뚜펀위(장쯔이)의 마음을 훔쳐낸다면 평소 셰이판이 그토록 원하던 자신의 몸을 허락하겠다는 것이다. 셰이판은 뚜펀위를 유혹하기 위해 덫을 놓지만 그의 여성 편력에 관한 소문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는 뚜펀위는 그를 경계한다. 하지만 셰이판이 접근할수록 뚜펀위는 서서히 셰이판에게 마음을 열어간다. 영화는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이 원작은 미국과 프랑스 그리고 한국에서도 여러 차례 영화화된 소재다. 스티븐 프리어스, 밀로스 포먼 등이 연출을 맡기도 했고 한국에서는 이재용 감독이 조선시대로 시대 배경을 옮겨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를 만들기도 했다. <위험한 관계>는 1930년대 상하이로 무대를 옮겼다.

<위험한 관계>는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 등으로 한국 멜로영화에 새 감성을 심어준 허진호 감독의 신작이다. 전작 <호우시절>에서 중국 배우 고원원과 한국 배우 정우성을 기용하여 한•중의 러브스토리를 그려낸 경력이 있지만 이번에는 전격적으로 중국을 배경으로 해 만들었다는 점이 차이다. 전작에서도 중국어가 다수 사용되기는 했으나 <위험한 관계>는 제작 단계에서부터 출연진까지 중국 바탕의 영화다. 장동건, 장백지, 장쯔이의 대사도 전부 중국어다. 셰이판 역을 맡은 장동건은 근대 중국의 번화한 도시를 활보하는 멋쟁이이자 플레이보이 역할을 해내고 장쯔이는 비련의 주인공이자 순결의 여인이 되며 장백지는 세상의 모든 이를 조종하고 싶어 하는 탐욕의 여인이 된다.

허진호 감독은 원작의 시대 배경이 “프랑스 혁명 이전의 부패하고 화려한 18세기”였다는 점을 상기시키며 1930년대 상하이 역시 “사랑이라는 가치가 게임이 되는 그런 시대”라고 설명한 바 있다. 한편 형식 면에서는 얼마간의 변화가 있다. 감독은 “지금까지 내가 만든 영화들의 모든 컷 수를 전부 합쳐도 이번 영화의 컷 수가 더 많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기존에 성취해낸 허진호적인 것을 중국이라는 새로운 영화산업의 터에서 다시 한번 모험적으로 추진해본 영화라는 느낌은 크게 들지 않는다. 우리가 알고 있던 허진호식 감성을 충족시키는 멜로영화라기보다 지금 당대 중국 대중 멜로영화의 한 모델로 이해하는 게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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