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2012-10-18
글 : 송경원
시간여행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라이언 존슨의 <루퍼>

들려오는 이야기가 심상치 않다. 연일 평론가들의 호평이 쏟아지고 평점은 고공행진 중이며 북미 박스오피스도 상큼하게 출발했다. 라이언 존슨 감독의 신작 <루퍼>는 3천만달러의 비교적 적은 제작비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내가 대결한다는 기발한 컨셉으로 제작 전부터 SF팬들의 주목을 받았다. <브릭>에 이은 라이언 존슨과 조셉 고든 레빗의 재결합 소식은 기대를 더욱 부풀렸고 성급한 팬들은 벌써부터 <인셉션>과 비교 중이다. 간만에 나온 단단하고 똑똑한 SF영화 <루퍼>가 시간여행이란 까다로운 소재를 어떻게 풀어나가는지 살펴보자.

시간여행은 불가능하다. 1895년 H. G. 웰스는 최초의 시간여행 소설인 <타임머신>을 통해 시간여행에 대한 과학적인 증명을 시도했다. 한 물체의 위치를 확정하는 데 필요한 3가지 축, 가로, 세로, 그리고 높이에 시간의 축을 더해 4차원이란 개념을 내놓은 것이다. 우리가 동서남북 위치 좌표를 마음대로 옮길 수 있다면 시간 좌표도 옮길 수 있지 않을까. 이같은 착상은 당시 상당한 설득력을 얻었지만 곧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의해 불가능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시간여행에 대한 이야기들은 끊임없이 등장했다. 왜? 불가능하다고 놓아버리기엔 너무 재미있으니까. 어차피 소설이란 허구와 가능성의 놀이 아닌가. 가상현실이란 개념을 처음 등장시켰던 <뉴로맨서>의 작가 윌리엄 깁슨은 심지어 컴맹이었지만 그가 상상했던 세계는 오늘날 버젓이 현실이 되었다. 시간여행 역시 불가능 앞에 ‘아직은’이란 단서가 붙어 있다. 이 매혹적인 소재는 언젠가 새로운 물리법칙이 발견되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함께 늘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해왔지만 흥미로운 만큼 다루기도 어렵다. 개념에 집중하다간 자칫 장황하고 어려운 설명이 되기 쉽고 그렇다고 마냥 쉽게 가자니 이미 익숙한 상상력이라 밋밋해지기 십상이다. 소재로 삼긴 쉽지만 그 자체의 맛을 살리긴 만만치 않은 고급 재료. 게다가 영화 역시 근본적으로는 시간을 조작하고 만지는 놀이라는 걸 떠올려보면 문제는 좀더 복잡해진다.

라이언 존슨이 <루퍼>를 만든다는 소식에 기대와 걱정이 함께 모아진 까닭도 여기에 있다. <브릭>(2005)에서의 재기발랄함을 떠올리며 기대하는 사람들과 <블룸형제 사기단>(2008)의 안일함을 떠올리며 걱정하는 목소리가 함께 터져나왔다. 시간여행이 불법으로 규정된 2074년의 캔자스, 범죄조직들은 제거 대상들을 처리하기 위해 과거로 보낸다. 2044년에 사는 통칭 ‘루퍼’들은 미래의 범죄조직들에 고용되어 살인에서 시체처리까지 해결한다. 모든 루퍼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 하나 있는데 언젠가는 미래의 자신을 스스로 죽여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조직에서는 루퍼를 해고할 때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2044년의 루퍼들에게 미래의 자신을 보내고 루퍼들은 30년 뒤의 자신을 죽이는 대가로 현재의 안락함을 보장받는다. 현재를 위해 30년 뒤의 미래를 포기한 30년 시한부 인생, 그들이 바로 ‘루퍼’다. 그러던 어느 날 루퍼 조(조셉 고든 레빗) 앞에 2074년의 조(브루스 윌리스)가 나타난다. 미래의 조는 ‘레인메이커’에 의해 살해당한 아내를 되살리기 위해 과거로 왔고, 각자의 ‘현재’를 지키기 위해 2044년의 나와 2074년의 내가 대립한다. SF 거장 필립 K. 딕의 소설에서 영감을 얻어 구상한 이야기인 <루퍼>의 설정은 그 영향인지 명작 SF단편소설을 연상시킨다.

모방이 아닌 재창작

이 영화가 세간의, 정확히는 SF팬들의 주목을 받은 첫 번째 이유는 ‘미래의 나와 과거의 내가 서로 대결한다’는 한줄 아이디어가 주는 참신함 때문이었다. 대개 SF적 상상력이란 간단할수록 빛을 발하는 법이다. 두 번째로는 SF 장르 자체에 대한 우려가 섞여 있었다. 쉽게 만들면 유치하고 생각없는 영화, 어렵게 만들면 마니아만 즐기는 영화 취급받는 것이 SF다. 얼마 전 참담한 모습으로 돌아온 <토탈 리콜>을 확인한 팬들 입장에서는 재능있는 감독의 오리지널 각본으로 제작된, 제법 괜찮아 보이기까지 한 영화가 실망스러웠을 때의 후폭풍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 <루퍼>는 장르 팬을 넘어 모두를 만족시킬 만한 결과물로 완성되었다. 할리우드 메이저영화 최초로 37회 토론토국제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선정되어 호평을 이끌어냈을 때까지만 해도 반신반의했지만 뒤이은 평론가들의 계속된 상찬에 기대는 점차 확신으로 바뀌었고 IMDb나 로튼토마토에서 고공행진 중인 평점은 기대를 더욱 증폭시켰다. 결과적으로 침체기인 북미 박스오피스에서 2위를 기록하며 대중성마저 검증되었으니 완성도와 재미,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셈이다. <인셉션>과 비교하며 라이언 존슨 감독을 두고 차세대 크리스토퍼 놀란이라 치켜세우는 것은 그저 단순한 수사나 과장이 아니다.

<루퍼>에는 라이언 존슨 스타일이라 할 만한 고유의 인장이 새겨져 있다. 이 재기발랄한 감독은 장르를 가지고 놀 줄 안다. 처음부터 그랬다.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하며 전세계의 주목을 받았던 <브릭>은 누아르와 하이틴 장르의 창의적인 융합이 돋보였다. <브릭>에는 미국식 탐정소설의 뼈대 위에 험프리 보가트와 로버트 미첨의 분위기가 뒤섞이면서도 십대 사회의 조직과 위계 같은 지점들을 놓치지 않는 섬세함이 있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분위기를 형성하든 그것이 여전히 캘리포니아를 다룬 십대들의 이야기였다는 점이다. 장르의 분위기를 십분 이용하면서도 장르의 물살에 휩쓸려가지 않았던 <브릭>은 남부 캘리포니아의 따가운 햇살마저 서늘하게 바꾸어놓았다. <루퍼> 역시 2077년과 2044년, 두 미래의 모습 위에 현재의 초상을 겹쳐놓는다. 거기에 더해 허무맹랑한 SF가 아닌 실감나는 배경과 디테일, 상상력만큼 중요한 드라마와 캐릭터의 탄탄함, 간단하게 설명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주제와 결말까지 실로 치밀하고 뛰어난 밸런스가 돋보이는 수작이다. 시간여행을 소재로 했던 기존 영화들의 모티브를 한올 한올 따다 전혀 새로운 옷감을 창조해내는 이 영화에는 <백 투 더 퓨처>부터 <터미네이터>까지 영화 곳곳에 시간여행을 소재로 했던 영화들의 흔적이 묻어 있다. 존슨 감독은 굳이 이를 숨기려 하지 않는데, 이같은 자신감이야말로 여기저기 활용된 익숙한 모티브들을 단순한 참고와 모방이 아닌 재해석으로 느끼게끔하는 원동력이다. 똑같은 블록 조각을 활용했다고 해서 다 같은 모양의 블록이 아닌 것처럼 아이디어의 오리지널리티는 결국 어떤 방식으로 조립하는가에 달려 있다.

영리한 감독의 똑똑한 SF영화

애초에 시간여행이란 그 법칙을 세우고 개념을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제법 까다로운 소재다. 시리즈물이었던 <백 투 더 퓨처>와 <터미네이터>의 경우 편마다 시간여행에 대한 다른 개념과 이론을 활용해왔다. 예를 들어 과거를 바꾸면 미래도 바뀔 수 있다는 <터미네이터2: 심판의 날>의 대전제는 <터미네이터3: 라이즈 오브 더 머신>에서는 과거를 바꿔도 시간의 복원력에 의해 미래는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다는 설정으로 변경되었다. <루퍼>의 시간여행에는 구멍이 많다. 하지만 <루퍼>는 일련의 시간여행영화들의 다양하고도 익숙한 방식들을 활용하며 영화 초반 이를 압축적이고도 효율적으로 설명해낸다. 기본적으로는 과거가 바뀌면 미래도 바뀌는 식의 <백 투 더 퓨처>의 연장선에 있지만 현재의 내가 하는 행동과 일어나는 사건에 따라 미래의 나의 기억이 바뀌는 등의 섬세한 연출을 덧붙인 것이다. 이는 ‘현재의 나’(조셉 고든 레빗)와 ‘미래의 나’(브루스 윌리스)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연결시키는 동시에 정서적으로는 두 인물을 분리한다. 제법 복잡할 수 있었던 이같은 설정을 몇 장면으로 간단하게 풀어낸 뒤 2044년의 나와 2077년의 나 모두 각자의 ‘지금’을 지키려는 존재로 자연스레 대립시키는 것이다. 그 순간 영화는 거대한 음모를 좇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지키려 애쓰는 사람들의 투쟁으로 변모한다. 이것은 선악의 문제도 철학적 질문도 아니다. 다만 소중한 것을 찾고 지키고자 하는 사람의 본성에 관한 드라마다.

하지만 시간여행은 이미 소재만으로도 철학적 명제들을 품고 있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단죄하는 것이 옳은가, 나의 미래와 누군가의 생명 중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나를 나로 존재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물론 정답은 없다. SF의 본질은 질문 자체가 유희라는 점에 있다. 잘 만든 SF가 대개 그런 것처럼 기발한 아이디어는 결국 인간에 대한 질문으로 연결된다. 게다가 라이언 존스는 도덕과 계몽에 매달리는 사람이 아니다. 그의 가장 큰 매력은 모든 것을 영화로 환원시키려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이야기의 한계를 잘 알고 있고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풀어낼 줄 안다. 덕분에 <루퍼>의 결말은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하다. 영리한 감독이 빚어낸 똑똑한 SF영화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시간여행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인류는 언제나 시간여행을 해왔다. 과거로부터 전해온 이야기를 들을 때, 추억 속에 앨범을 펼쳐볼 때, 극장에서 또 다른 인생을 체험할 때 우리는 과거의 추억 혹은 미래의 가능성이라는 다른 시간대 속에 속해 있다. 맥 빠지는 이야기 하지 말라고? 단순한 수사나 비유가 아니다. 이야기, 기억, 상상력을 통해 우리는 다른 시간을 체험할 수 있다. 시간여행이 ‘나’라는 존재의 좌표를 다른 축으로 옮기는 작업이라면 우리는 언제나 시간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다. 과거에서 미래로. 현재에서 내일로. 때로는 같은 자리를 맴돌면서. 그런 의미에서 <루퍼>를 본다는 건 타임머신을 타는 것과 진배없다. 조의 과거, 현재, 미래를 오가는 편집은 그가 지나온 인생부터 지날 수도 있었던 인생까지 가능성의 영역을 교차시키며 정교한 이야기를 쌓아나간다. 심지어 쉽고 재미있게. 영화가 본질적으로 시간의 예술이라는 걸 상기해볼 때 분기와 가능성이라는 시간여행의 속성마저 고스란히 영화 문법으로 치환시킨 <루퍼>는 시간여행에 관한 영화를 언급할 때 빠질 수 없는 작품이 될 것이다.

시간여행자들

<루퍼>에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를, 시간여행에 대한 또 다른 상상력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터미네이터
미래는 바뀔 수 있는 것인가. 저항군의 지도자 존 코너를 암살하기 위해 미래로부터 온 살인병기를 그린 <터미네이터>는 시간여행이 역사를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 다양한 실험을 한다. 터미네이터를 막으러 미래에서 온 남자가 거꾸로 존 코너의 아버지가 되는 1편부터 터미네이터를 만들 수 있는 칩을 제거해 미래를 바꾸었다고 믿는 2편, 멸망의 때가 늦춰졌을 뿐 미래는 바뀌지 않는다는 3편까지 원인과 결과가 뒤섞이는 시간여행의 패러독스를 다양한 시점에서 해석했다.

<12 몽키즈>의 제임스 콜(감독 테리 길리엄 출연 브루스 윌리스, 브래드 피트, 1995)
바이러스로 인류의 99%가 전멸하고 황폐해진 미래. 시간여행이 과거에 직접적으로 간섭할 수 없다는 뼈대를 바탕으로 하여 정해진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과거로부터 바이러스의 단서와 백신을 구하기 위해 시간여행이 이루어진다. 시간여행의 오류로 여러 차례 다른 시간대를 오가며 혼란을 겪는 주인공 제임스 콜 역에 <루퍼>의 시간여행자 브루스 윌리스가 열연을 펼친다. 이쯤 되면 시간여행 전문 배우라 불러도 손색이 없지 않을까. SF 판타지의 거장 테리 길리엄의 손으로 빚어진 정교한 구성이 인상적인 영화.

<스위블>의 정비공(<마이너리티 리포트> 필립 K. 딕 지음, 이지선 옮김, 2002)
최근 국내에 소개된 필립 K. 딕의 유명한 단편 모음집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수록된 단편소설. 미래에서 실수로 잘못 배달된 기계 스위블의 정체를 놓고 세계의 석학들이 고민하는 모습을 담아낸 이 소설은 다양성이 말살된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통해 현대인의 자화상을 그린다. 스위블을 찾으러 온 미래의 수리공에게서 스위블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벌어지는 해프닝이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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