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인터뷰 시간에 좀 늦으셨네요. 일이 많으신가봐요.
=죄송합니다. 아까 출근카드에 도장 찍는 걸 깜빡해서요.
-뭐 죄송할 것까진 없고요. 그럴 수도 있죠 뭐.
=죄송합니다.
-왜 계속 죄송하다는 말씀만 하시는지. 괜찮다니까요.
=우리 회사가 겉으로 보기에는 금속제조회사지만 사실 살인청부업을 하고 있거든요. 다들 철저한 회사원 오리엔테이션 교육을 받아서 그냥 할 말 없을 때 ‘죄송합니다’라고만 하면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딱 봐도 매우 간지가 좋으시지만, 오늘만큼은 좀 넥타이도 확 푸시고 다리 쭉 뻗고 편히 계셔도 됩니다.
=또 죄송하지만 그게 잘 안되네요. 청바지 입고서 회사에 가도 깔끔하기만 하면 괜찮을 텐데 복장 제약도 너무 많아요. 우리 모두 다들 회사 다니는 죄죠. 매달 사장님 돈을 뺏어가서 죄송하고, 일하느라 전기 써서 죄송하고, 다이어트 겸 굶어도 되는데 꼬박꼬박 밥 먹어서 죄송하고….
-무슨 밥 먹는 것까지 그러시나요.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정말 회사가 해도해도 너무하네요.
=전에 대리일 때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회사 이사님께 “밥 먹을래? 나랑 뽀뽀할래? 밥 먹을래? 나랑 잘래? 밥 먹을래? 나랑 사귈래?”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가 바로 잘릴 뻔했어요. 그럴 바에 그냥 같이 죽재요. 우리 이사님이 전에 검사도 하셨던 분이거든요. 제가 지금은 살인청부회사 영업2부 과장이지만 하마터면 대리로 인생 쫑날 뻔했어요. 아직 주택청약예금도 1순위가 못 됐는데.
-그렇게 뼈빠지게 10년 동안 일했는데 회사는 여전히 희생만 요구하죠.
=한국의 주당 평균 노동시간이 44.6시간으로 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인 거 아시죠? 반면, 연평균 실질임금은 OECD 국가 가운데 중간 정도밖에 안돼요. 근속연수 또한 가장 짧고 노동생산성도 23번째죠. 왜 집에 안 보내주는지 모르겠어요. 우리 킬러들은 그보다 더 심합니다. 심해도 너무 심해요. 죽여야 할 인간이 회사에서 밤샘하면 같이 기다려야 돼요. 그렇게 기다렸다 죽이고 뒤처리까지 해야 하니 이거 뭐 하루에 서너 시간밖에 못 자는 것 같아요.
-그럼 나름 터득하신 생활의 지혜가 있다면요?
=식사 시간만큼은 꼬박꼬박 챙기려고요. 죽이러 쫓아가다가도 12시 되면 그만두고, 7시에는 칼퇴근하려고 해요. 킬러도 저녁이 있는 삶이 필요합니다. 오늘 해야 할 ‘킬’을 내일로 미루는 거지만 쉴 때 쉬어줘야 죽일 때 잘 죽여요.
-어쨌건 킬러도 회사원인데 저녁이 있는 삶을 찾길 눈물나게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