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떻게 보셨어요?” 초조하고 불안한 눈빛으로 계속 물어온다. 이상한 풍경이다. 신인배우라면 그럴 법하지만 눈앞에서 간절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을 기다리는 사람은 무려 ‘소간지’, 소지섭 아닌가. 으레 하는 좋았다는 말로는 성에 차지 않나보다. 꼼꼼하게 장면 하나하나 물어보더니 회사원의 고충을 잘 담아낸 것 같단 말을 듣고야 표정이 밝아진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그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나도 덩달아 마음이 놓인다.
<회사원>을 통해 살인청부업자가 되어 돌아온 소지섭은 여전히 슈트가 잘 어울리는 간지남이지만 재미있다는 말보다 영화의 의도가 제대로 전달되었는지를 먼저 신경 쓰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신인배우의 그것이다. 이제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작품마다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는 이 성실한 17년차 배우의 한 걸음 한 걸음에는 신중함과 진지함이 가득하고, 그래서 여전히 성장 중인 신인배우다.
-부산영화제 무대인사에서 배우 곽도원과 함께 ‘트윙클’ 춤추신 것 잘 보았다.
=(민망한 듯 고개를 숙이며) 잠깐, 아주 잠깐 췄다. 팬 서비스 차원에서. 곽도원 선배가 워낙 밝고 분위기 띄우는 걸 잘한다. <회사원>에 이어 <유령>에서도 호흡을 맞춘 터라 그런 부추김이 익숙하기도 했고, 우리를 보러온 분들께 뭔가 즐거움을 드리고 싶은 마음에 그만. (웃음)
-<회사원>은 설정이 선명하고 독특한 영화다.
=이 작품에 출연하기로 마음먹었던 것도 바로 그 점 때문이었다. <회사원>이라는 제목부터 마음에 들었다. 살인청부업자지만 결국 직장인의 이야기란 소재가 흥미로웠다. 액션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회사원으로서의 비애나 서글픔이 더 중요한 영화다. 연기를 할 때도 그 점을 표현하려 애썼다. 출근길의 지친 모습이라든지 일에 대한 회의에 시달리는 부분 같은.
-확실히 액션보다 직장인에 관한 드라마가 훨씬 강한 느낌이다.
=(표정이 밝아지며) 그렇다면 다행이다. 아직 영화를 보지 못해 어떤 느낌으로 정리되었는지 궁금하다.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머릿속에 그려진 그림들이 있었는데 부디 그런 장면들이 잘 살았으면 좋겠다.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시나리오를 받자마자 한번에 읽었고 시나리오를 덮자마자 출연을 결정했다. 작품을 고를 땐 항상 시나리오가 중심이다. 그렇다고 역할을 미리 정해놓고 찾는 건 아니다. 들어오는 시나리오는 가능하면 다 읽어보려 노력한다. 읽다보면 느낌이 오는 이야기들이 있다. 감이라고 부르기는 뭣하지만 이건 한번 해보고 싶다는 느낌. 그런 게 오면 크게 고민하지 않고 바로 그 자리에서 결정하는 편이다. 가끔 너무 과감하다며 주변에서 걱정하기도 하지만, 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작품이라면 자잘한 건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회사원>을 두고 벌써부터 <아저씨>와 비교 중이다. 아저씨의 정의를 바꿔놓은 원빈의 꽃미남 아저씨처럼 회사원 같지 않은 소지섭의 멋진 회사원.
=글쎄. 기본적으로 비교는 될 것 같지만 <아저씨>와는 다른 영화라고 생각한다. <회사원>은 일에 대한 회의와 일상의 피곤에 찌든 직장인들의 초상을 그린 영화다. 물론 살인청부업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만큼 멋진 액션도 중요한 요소지만 첫 번째 목표는 회사원들의 심정을 얼마나 잘 표현해내고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영화는 영화다> <오직 그대만>에 이어 이번에도 몸을 많이 쓴다.
=몸 쓰는 걸 싫어하진 않는다. 그러나 굳이 액션만 고집하는 건 아니다. 지금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작품들을 선택하다보니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것뿐이다. 게다가 사실은 정말 몸치다. 그래서 연습과 준비를 정말 많이 해야 한다. 이번에도 꼬박 두달 정도 무술연습을 했다. 처음 봤을 땐 너무 많은 동작이 들어가 있는 실전 무술이라 이걸 내가 다 외울 수 있을까 싶었다. 나중에는 합을 맞추기 전에 몸이 저절로 반응하더라. 실제로 많이 맞기도 하고 때리기도 했다. 육체적으론 고되지만 그런 장면들이 나중에 실감이 나더라.
-특히 여성인 서 대리와 일대일로 격투를 벌이는 장면이 이채롭다.
=그때는 정말 도망치고 싶었다. 차라리 내가 맞는 건 괜찮지만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여자를 때리려니. (고개를 저으며) 서 대리 역의 신인배우가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래도 대단한 게 금방 이를 앙다물고 촬영하려고 하더라. 참 고맙고 너무 미안했다.
-직장생활을 직접 경험한 건 아닌데 그 고충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운동을 해서 단체생활에는 익숙하다. 짧게 출퇴근도 해봤고. (웃음) 사회생활은 다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크게 봤을 땐 지금 하고 있는 일도 직장이니까. 이 일을 하면서도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하고, 사람에 시달리기도 하고, 다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매일 보는 주변 친구들이 다 중년의 회사원이다. (웃음) 구겨진 셔츠 입고 일 끝나면 술 먹고 피곤에 찌든.
-에필로그에서 입사지원서를 들고 미소를 연습하는 장면이 영화 내내 흐르는 정서를 잘 설명해준다.
=<회사원>은 직장생활의 애환을 액션으로 풀어내고 비유한 영화다. 원래 시나리오에서는 지형도 과장이 죽기로 되어 있었는데 아무리 몸부림쳐도 결국 비극으로 끝나는 것 같아 싫었다. 직장인들에게 뭔가 여운과 희망을 남겨주고 싶어 감독님과 상의 끝에 에필로그를 추가로 촬영했다. 결과적으로 그런 감정들이 잘 전달된 것 같아 다행이다.
-배우도 직장생활이라면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 있고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일이 있을 텐데.
=기본적으로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건 정말 즐겁고 하고 싶어서 하는 거고 싫어도 해야 하는 건 나머지 전부 다? 이를테면 지금 이런 인터뷰 같은? (웃음)
-그런 것 치고는 <무한도전> 등 예능 프로그램에서의 모습을 보면 주체할 수 없는 끼가 넘쳐흐르는 것 같다.
=전혀 그렇지 않다. 다 편집을 잘하고 잘 만들어줘서 그런 거다. 원래 내성적이고 낯을 많이 가린다. 오랜 시간을 두고 사람을 만나는 편이라 동료들과 교류의 폭도 그리 넓지 않다.
-그럼 가수활동을 한 건.
=그건 정말 재미있을 것 같아서 했다. 팬 서비스 차원이기도 했고. 잘해서가 아니라 즐거워서 했다. 다행히 결과물도 부담스럽지 않게 재미를 느끼기에 충분했던 것 같다.
-밥벌이로서의 배우라는 직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솔직히 9년차 정도까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정말 즐겁고 행복해서 연기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관객의 공감을 얻어내기 힘들지 않을까. 단순한 대사와 정보 전달을 넘어 감정을 전하려면 연기를 하는 내가 완전히 역할에 몰입해서 즐겨야 한다. 행복한 영화를 찍을 땐 내가 정말 행복해지고 사랑을 할 땐 인간 소지섭이 아니라 작품 속 역할이 되어 정말로 사랑을 느낀다. 이제는 자연인 소지섭과 배우 소지섭으로서의 감정을 어느 정도 분리할 수 있다. 제일 무서운 건 관객이다. 관객은 눈을 통해 진심인지 거짓인지 전부 알아보더라.
-<회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치고 달리는 역할이었는데 부담은 없었나.
=당연히 어깨가 무거웠다. 데뷔 17년차지만 영화에서는 아직 배우는 입장이라 긴장된다. 첫 영화를 하고 나서 스크린으로 내 얼굴을 봤을 때 아직 영화를 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직 자신감이라고 말하긴 많이 모자라지만 그런 감정에 발목 잡히지 않을 정도의 여유는 생긴 것 같다. 두려운 건 마찬가지지만 연기라는 게 또 그래서 즐겁기도 하다. 그동안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건 거의 다 보여준 것 같고 하고 싶은 것도 거의 다 해본 것 같다. 이제는 과연 대중이 내게서 뭘 보고 싶어 하는지가 궁금하다. 억지로 변해야 할 필요는 없지만 지금은 자연스럽게 그런 고민이 찾아오는 시기가 아닌가 싶다.
-앞으로 특별히 도전해보고 싶은 역할이 있나.
=미리 역할을 정해놓고 억지로 맞추고 싶진 않다. 다만 그동안 지켜보고 억누르는 역할을 주로 맡았던 터라 정반대의 역할을 해보고 싶긴 하다. 감정 표현도 세게 하고 생동감있는 날것 같은 연기. 예를 들면 하정우씨나 류승범씨 같은 연기는 일부러라도 한번 해보고 싶다.
-차기작 계획은.
=연말까진 일정이 꽉 차 있다. 지금 열심히 시나리오를 보고 있는 중이다. 어떤 제의가 들어올진 모르지만 아직까진 작품 고를 때 제일 중요한 건 시나리오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고 이거다 싶은 이야기가 발견될 때까지 찬찬히 살펴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