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김재환 감독이 연출한 다큐멘터리 <MB의 추억>의 예고편을 봤다면 이런 노랫말이 떠오를 것이다. 이른바 ‘747’ 공약을 앞세워 준비된 경제대통령이라고 자신했던 MB는 집권 기간 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실정을 저질렀다. 이제는 권좌에서 내려와야 할 시간, 그런 MB를 우린 실컷 비웃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MB의 추억>을 관람하기 전에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2007년 선거 유세를 시작으로 지난 5년 동안 계속됐던 MB의 퍼포먼스는 실소와 냉소와 폭소를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우린 어느 지점부터는 더이상 웃을 수 없게 된다. 웃어도 웃는 게 아닌 ‘나’는 다름아닌 바로 유권자, 우리였던 것이다. 김재환 감독이 ‘MB의 관점에서 유권자 바라보기’를 시도하는 동안 웃지만 말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되묻게 된다. 전작 <트루맛쇼>의 카메라가 권력 잡는 덫이었다면, <MB의 추억>의 카메라는 거울인 셈이다. 우리의 치부까지 낱낱이 까발리는 거울.
-지난해 <트루맛쇼>로 각종 송사에 시달렸다.
=상영금지가처분은 기각됐고 명예훼손과 업무방해건은 무혐의 처리됐다. 사전에 준비를 하고 공개를 했기 때문에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이번에도 성가시게 굴 것 같나.
=개봉은 하되 인터뷰는 하지 말고 어디로 그냥 도망갈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트루맛쇼> 때는 GV(관객과의 대화)나 라디오 방송 인터뷰 발언까지 문제삼아서 트집을 잡으니까 정말 피곤하더라. 각오하고 선택한 길이니 고통이 덜하지 않느냐고들 하는데, 권투선수라고 해도 시합 나가서 맞으면 아프지 안 아프겠나.
-이전 인터뷰에서 두 번째 역지사지 프로젝트는 극영화라고 했다.
=정확히는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섞어보려고 시도했다. 역지사지 프로젝트로 동시에 준비하던 아이템이 다섯개쯤 된다. 적어도 3개는 만들자는 마음이었는데 <MB의 추억>도 그중 하나였다. 지금이 적기일 것 같아 지난해 가을까지 편집해서 먼저 내놓게 됐다. 정치적이고 시사적인 영화는 어떤 시점에 관객을 만나느냐가 중요하다. 게다가 대선 후보들이 이미지 전쟁을 벌이고 있는 시기다. 2007년에 우리는 MB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가, 또 MB는 우리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가를 돌아보기에 적절한 때다.
-‘MB의 관점에서 유권자를 바라보기’라는 식으로 구성하자는 아이디어는 어떻게 얻었나.
=<트루맛쇼>에서 음식 칼럼니스트 황교익씨는 우리가 그 정도 방송밖에 못 보고 그 정도 음식밖에 못 먹는 건 시청자 수준이 딱 그 수준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트루맛쇼>가 천박한 시청자에 관한 이야기라면, <MB의 추억>은 탐욕스러운 유권자에 관한 이야기다. 탐욕스런 우리가 탐욕스런 대통령을 가진 것이다. MB는 우리가 가장 듣고 싶어 했던 말만 던져줬을 뿐인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MB는 거울이다. MB를 보면 우리가 보인다.
-올해 전주영화제 상영 때는 MB 목소리를 흉내낸 내레이션이 따로 없었다고 하던데.
=첫 장면에 ‘MB의 관점에서 유권자를 바라보기’라는 자막만 넣었다. 그렇게만 해도 저 사람 눈에는 우리가 저렇게 보이는구나 하고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상영을 하고 보니까 내 의도와 달리 그런 관점이 좀 흔들린다는 의견이 있었다. MB 나쁜 놈, MB 거짓말쟁이, 뭐 이런 식으로 돌만 던지고 끝나버리면 안될 것 같아서 MB 입장의 1인칭 내레이션을 따로 만들어넣었다.
-MB 목소리를 흉내낸 내레이션은 전문 성우가 했나.
=누가 했는지 한번 맞혀봐라. (웃음) OOO씨다. 본인은 이름을 밝혀도 상관없다고 했는데 혹시 불이익이 갈까봐 누가 물어봐도 그분 아니라고 잡아떼겠다고 했다.
-똑같이 성대모사를 할 수 있는 이를 캐스팅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럼 완전 코미디가 된다. MB스러우면서도 때론 단호하고 확신에 찬 목소리를 내야 해서 그분께 부탁드렸다. 하시겠다는 말씀 듣자마자 출연료는 바로 입금시켰다. 혹시 맘이 바뀔까봐. (웃음)
-<MB의 추억>에서 유권자들은 피해자인 동시에 공범이다. 표면적으로는 대의민주주의의 아이러니 때문인 것 같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진실을 외면한 미디어의 책임이 크다.
=2004년 총선 때 <MBC 스페셜>에 방영할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근혜 후보를 한달 동안 쫓아다닌 적이 있다. 정치가 말의 전쟁이고, 이미지의 전쟁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허망한 말과 가짜 이미지들을 생산하고 유포시켜서 대중의 선택을 이끌어가려고 하는 미디어를 지켜보면서 이를 꼭 다뤄야겠다고 생각했다.
-전반부에 나오는 MB의 길거리 유세장면은 어느 교회의 부흥회처럼 보인다. 태안 기름 유출 사고 현장에서 우연히 마주친 정치인들은 흡사 세 싸움 벌이는 조폭 무리 같다. 카메라가 어디에 서 있는가에 따라 언젠가 접했을 법한 익숙한 풍경들이 다른 의미로 읽힌다.
=선거 유세는 리얼리티 쇼다. 리얼한 것처럼 사람들을 속이는 쇼다. 후보자는 대중이 좋아할 것 같은 캐릭터를 연기하고, 대본에 맞는 역할들을 성실하게 수행해야 한다. 후보자 입장에서는 찍어야 할 장면이 많다 보니 태안에 가서 빨리 삽질 한번 하고 다음 장소로 쫙 빠져나가는 거다. 그저 배경화면으로만 기능했던, 남은 사람들의 자괴감을 접하면서 선거라는 리얼리티 쇼의 이면을 찍어야겠다고, 이면을 찍으려면 똑같이 바라보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후보자의 동선을 뒤쫓는 1분40초짜리 방송 뉴스는 표 계산밖에 모르는 정치인들의 동선만을 중계할 수 있을 뿐이다.
-MB에게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몰려든 카메라들과 달리 촛불집회 때 빌딩 옥상에 모인 수많은 카메라들은 숨어서 훔쳐보는 듯한 느낌으로 찍혀 있다.
=촬영할 때는 그런 의도로 찍은 것이 아닌데도 막상 시간이 지나 다시 확인하다 보면 다른 느낌을 주는 장면들이 많았다. 그 장면도 그렇다.
-MB의 2007년 대선 유세 대부분은 먹는 장면으로 채워져 있다. 간혹 음식 앞에서 머뭇거리는 상대 후보와 달리 MB는 한번에 국수 두 그릇을 해치운다.
=선거에 나선 후보자는 리액션이 중요하다. (웃음) 어떤 리액션을 하느냐에 따라서 이미지가 달라진다. 기본적인 표정 연기는 물론 잘해야 하고, 돌발적으로 벌어지는 주변의 액션에 대한 적절한 반응도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MB는 탁월한 연기력의 소유자다. <트루맛쇼>에서는 특별출연이었는데 이번엔 원톱 주연이다. 봉준호 감독에게 송강호가 있다면 내겐 MB가 있다. (웃음)
-군부대를 방문한 MB가 군가를 마지못해 들으면서도 끝까지 미역국을 우적대는 클로즈업은 그야말로 촌철(寸鐵)이다.
=되묻고 싶기도 했다. MB의 친서민 코스프레를 우리가 즐겼던 것은 아닌가. 우리가 강요했던 것은 아닌가 하고. 계속 먹이려 들고, 잘 먹으면 좋아하고. 우리의 관심은 어쩌면 대통령 후보가 시장통의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싶어 했던 것뿐이었는지도 모른다.
-욕쟁이 할머니 광고 촬영 장면은 어떻게 구한 것인가.
=처음엔 광고 메이킹 영상을 뿌려서 홍보를 할 계획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욕쟁이 할머니가 연기자였다는 것이 밝혀진 뒤) 논란이 불거지자 뿌렸던 것을 다 거둬갔다. MB가 대통령이 된 다음에도 청와대에서 나와서 남은 것까지 다 가져갔다고 하더라. 이번에 쓴 건 남아 있던 몇 장면이다. 당시 이 영상을 만들었던 광고제작사는 없어졌고, 광고 발주자였던 한나라당도 없어졌고. 이런 상황에서 새누리당이 소유권 운운하며 시비를 걸 것 같진 않다.
-유권자들의 정치 불신을 더 자극하는 것 아닌가 하는 지점에서 김제동이 등장한다. 연예인이 되고 싶어 하는 정치인들과는 정반대의 캐릭터다.
=어떤 관객은 <광해, 왕이 된 남자>를 떠올렸다고 하더라.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진짜 왕을 대신해 광대가 정치를 하잖나. 함께 행복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그의 말은 지도자가 갖춰야 할 덕목이고 마인드다.
-서울 상영관은 인디스페이스, 아트하우스 모모 두곳뿐이라고 들었다.
=농담처럼 그런다. 현직 대통령이 기획부터 주연까지 도맡은 영화인데도 관을 안 내주는 건 뭐냐고. 그러다 세무조사 당하면 어쩌려고 그러냐고. (웃음) <트루맛쇼> 때도 방송사에서 전화하는 바람에 서울에선 대학로 70석짜리 극장밖에 없었다. 상영횟수도 하루 한두번. 아침 9시, 밤 10시 반 이렇게. <MB의 추억>은 방송 환경이 지금 같지 않았으면 방영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최근 정치영화가 많이 나오는데 그 이유는 방송이 제 역할을 못해서다. 한편 이런 기대도 한다. <트루맛쇼>로 직격탄을 날리자 꿈쩍하지 않던 슈퍼미디어도 움찔했다. 우리를 몰래 찍는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게 된 거다. <MB의 추억>도 선례가 됐으면 한다. 내가 하는 말이 언젠가 나를 공격하는 말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정치인들이 가졌으면 좋겠다. 이렇게 한번 던져놨으니, <근혜의 추억> <재인의 추억> <철수의 추억>이 나올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