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부터 96년까지 10년 동안, 두 남녀의 우연한 만남과 필연적 사랑을 그려가는 영화 <첨밀밀>의 시간은, 중국 본토에서는 등소평의 이른바 `흑묘 백묘론'이 부활해 판을 친 때이고, 홍콩은 본토 반환을 1년 앞둔 시점이다. 공산주의의 대해를 넘어 자본주의의 섬을 선택한 남녀의 연애담이랄 이 영화를 보면서 내가 개인적으로 궁금했던 점은 여소군(여명)의 본토 애인과 이교(장만옥)의 조폭 애인이 우리의 주인공들의 사랑에 어떻게 반응할까 하는 거였다. 본토 애인이 등려군의 뽕짝풍의 노래처럼 여소군의 발목을 붙들고 늘어진달지, 조폭 애인이 이교에게 ‘개깡’을 부리지나 않을까? 이 두 가지 은근한 서스펜스 속에 이교는 ‘우연히’ 자동차 클랙슨을 울림으로써 여소군과 마침내 ‘필연적’ 사랑에 도달한다. 그리고 이교는 여소군에게 말한다. 여소군 동지! 우린 어떡해?
홍콩 멜로영화의 대명사처럼 알려진 <첨밀밀>의 한가운데 던져진 “동지”라는 호칭이 오랫동안 뇌리에 남는다. 행색과 애인이 베이징의 무슨 발레단에 있다는 정황으로 봐서 여소군과 이교는 제대로 중국 본토의 공산주의 교육을 받은 “동무”들이지 싶다. 공산주의 교육의 틀 속에서 잔뼈가 굵어 자본주의의 바다에 던져진 두 사람은 앨런 톰에 열광하는 홍콩 팬들에게 등려군의 뽕짝을 팔려다 심각한 손해를 보고, 외환투자를 했다 치명적인 환차손을 당한다. 그래서 <첨밀밀>이라는 멜로영화의 바닥은 공산주의 “동무”들의 자본주의 세계에 대한 일종의 적응기라 할 수 있겠는데….
연초에 북한지도자들이 등소평이 만든 중국의 경제특구들을 잠행했다. 중국의 경제특구는 말하자면 공산주의의 바다에 떠 있는 자본주의의 섬 같다는 생각을 한다. 러시아가 보드카를 마시듯 자본주의를 ‘원샷’으로 들이키다 폐인이 된 점에 교훈을 얻은 덕분인가? 중국은 그들의 긴 식사시간만큼 자본주의를 음미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방송사의 베이징특파원을 지낸 어떤 선배에게 들은 말인데 중국인의 세 가지 모토 가운데 제1번이 자유자재란다. 우리가 쓰는 뜻과는 조금 다르게 모든 것은 스스로로부터 유래하고 자신 속에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과연 중국은 유장한 그들의 역사 속에서 자본주의의 역사를 발견했음일까?
몇년 전에 캐나다 토론토에서 드라마 촬영을 한 적이 있는데 그 도시의 차이나타운의 장대한 규모가 놀라웠다. 중국은 뉴욕이나 LA가 아니더라도 세계 속에 수많은 차이나타운을 가지고 있는 나라다. 공산주의 본토에 자본주의 섬들을 가지고 있듯, 자본주의 국가들 속에 중국인의 섬들을…. 미래학자들에 의하면 수십년 뒤에는 세계는 미국과 중국의 양극체제로 간다는데…, 그리고 결국에는 중국 유일체제가 된다는 설도 있는데…. 아무튼 여소군은 공산주의도 자본주의도 아닌, 뉴욕의 차이나타운의 요식업계에 투신함으로써 자본주의 사회에 연착륙한다.
멜로영화 <첨밀밀>을 놓고 아주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는 나는, 근 10년을 방송사 소속의 봉급 생활자로 드라마 연출을 하다 올 초 프리랜서로 독립한 사람이다. 요즘의 나에게 어떤 중국인이 한·중 합작 드라마나 영화의 모델을 열심히 제의하는 중이다. 그는 우리로 치면 무슨무슨 공사의 책임자쯤 되는 사람인데, 아시아권의 영화나 드라마, 에니메이션 등 소프트웨어의 합작을 전담한다고 한다. 이 이의 말을 듣고 있자면- 용서하시라! 이왕 시작한 김에!!- 등소평은 그의 뼈가 바다에 뿌려지기 전에, 단순히 지역적인 경제특구뿐만이 아니라, 말하자면 소프트웨어의 경제특구까지 그림을 그려두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자본주의에 대한 체제방어적 경제특구뿐만 아니라 세계에 대한 중국인의 빨치산적 경제특구 말이다.
<첨밀밀>에서 여소군과 이교는 결국, 자본주의의 본고장 미국 땅에 섬처럼 떠 있는 차이나타운에서 행복한 결말을 맞는다. <첨밀밀>의 10년 동안 이 땅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디에도 이국 땅에서의 차이나타운 같은 건 없었다. 80년대에 이념적 동지로서 결혼했다 90년대에 들어서자 이혼하고만 수많은 가슴아픈 연인들이 있을 뿐이다.
여담으로, 이 영화의 주인공인 여명은 내가 만들었던 드라마 <내 마음을 뺏어봐>의 주제곡을 불렀던 배우이다. 조국이 IMF를 겪으며 국제적인 망신을 당하고 있던 시기에, 국민 누구나가 단돈 몇푼이라도 외화를 벌어들이는 게 애국이던 시절, 결론적으로 말하면 나는 애국하지 못하고 말았다. 1998년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