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김기덕은 한국영화 평단에서 무시당해왔으나 그의 영화 <피에타>로 결국 승리했다. 김기덕의 <피에타>가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직후 대다수 한국 매체가 그와 같은 논지의 기사를 실었다. 이것이 비록 비평의 영역이 아니며 이미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일이라 해도 짚고 넘어가야 할 하나의 전제는 될 것이다. 몇 가지 간단한 사실만으로도 이 의견들은 반박이 가능하다. 그가 작품을 내놓을 때마다 전문 영화 저널과 주요한 저널리스트들이 그를 특별히 주목하기 시작한 일은 이미 오래되었고 한해의 중요한 영화를 선정하는 자리에서 김기덕의 영화는 자주 선정되거나 적어도 후보에 올랐다. 더군다나 그는 동세대 한국 감독 중 온전히 감독 개인 한 사람의 영화 세계에 관한 비평 연구서를 헌정받은 드문 예에 속한다(<김기덕, 야생 혹은 속죄양>, 정성일 엮음, 행복한 책읽기 펴냄). 그러니 그가 받았다는 한국 영화 평단에서의 냉대란 어디서 받은 것이며 <피에타>의 수상은 그로써 누구를 무색하게 하는 것인가.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하려다 보니 앞의 말을 쓰는 게 불가피했다. <피에타>의 수상은 축하할 일이고 김기덕은 높은 인정을 받아온 뛰어난 감독이며 개인적으로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한 평자로서 김기덕의 작품 <피에타>에 전적으로 공감이 가지는 않는다.
수상에 따른 과장된 세리머니가 지나고 경청할 만한 논평들이 차례로 등장했는데 읽어본 글들 중에서는 비교적 정신분석학적 해석과 기독교의 성서적 해석이 주를 이루었고 지지가 많았으며 아주 드물게 비판이 있었다. 다만 여기에 언급되지 않고 있는 국면이 하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관객의 자리가 빠져 있다. 영화시장에서 말하는 소비자로서의 관객이 아니라 영화의 텍스트에 동참하게 되는 경험자로서의 관객의 자리가 빠져 있다. <피에타>는 우리의 자리 즉 관객의 자리를 입회시킨 이후에야 제대로 언급할 수 있는 영화라는 생각을 나는 갖고 있다. <피에타>에 관한 논평이라면, 이미 주어진 설정에 따르는 해석에 그치지 않아야 하고, 김기덕이 그의 인물들을 온전히 어떻게 다루었는가 하는 데서 그치지 않은 채 김기덕이 관객인 우리까지 어떻게 함께 다루었는가 하는 점을 포함해야 하며, 나아가 영화의 설정 그 자체에 질문을 던지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점을 본격적으로 말하기 이전에 이미 제기된 비판론에 간단하게 몇 마디를 첨언해야 할 것 같다. 드물게 쓰인 비판론 중 “빈약한 대사와 감정과잉의 연기로 구축한 플롯”, “이야기 전개를 위해 준수해야 할 최소한의 개연성 무시”를 지적하며 “김기덕이 지향하는 확정된 결론에 대사연기 플롯을 모두 종속시킨 결과가 빚은 참극”이라고 <피에타>를 설명한 반이정의 평(<씨네 21> 875호)을 나름대로 요약하자면, <피에타>는 작위적이다, 라는 말 정도가 될 것 같다. 공감한다. 흔히 어떤 창작물의 표현을 두고 작위적이다, 라고 할 때 그걸 현실 모사성에 기준할 때 오해가 생기기 십상이다. 김기덕의 초반 영화들이 실은 그런 오해에 시달렸다. 하지만 작위적이라고 할 때 그것은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희박하거나 현실을 모사하는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는 것이 아니다. 창작물이 작동시키는, 그러니까 영화에서라면 영화적으로 조화를 잃고 억지스러운데도 불구하고 아닌 척할 때 그 창작물이 작위적이다. 우리는 초현실주의 영화를 두고 작위적이라고 하지 않으며 홍상수의 영화가 현실적 가능성을 수차례 이탈하는 데도 불구하고 작위적이라고 규정하지 않는다. 작위성은 창작물의 표현이 현실과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빤한 창작의 상투성과 창작물의 표현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가의 문제에 의해 판단된다.
<피에타>에서는 두 가지 예를 들 수 있다. 첫번째 돈과 자본주의에 관한 호소다. 김기덕의 말처럼 돈과 자본주의가 실제로 한국사회를 망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라 할지라도 “돈이 시작과 끝”이라는 무용한 대사나 돈 때문에 발생하지만 이미 빤하게 예상되는 누군가의 죽음은 영화적으로 상투적이고 억지스럽기 때문에 작위의 혐의를 벗기 어렵다. 김기덕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서 죄를 지은 남자가 그를 잡으러 온 형사들에게 하룻밤만 기다려달라고 말했을 때 형사들은 정말 기다린다. 남자가 작은 암자 앞마당에 밤새 속죄의 판각을 새기고 날이 밝아 형사들에게 끌려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말이 안되는 일이지만 그때 그 장면은 영화적으로 슬프고 장엄하다. 돈과 자본주의는 <피에타>의 핵심이 될 수 없고 그러고 싶었다 해도 호소로 그친다.
두 번째, 오히려 이 영화의 진정한 작동축이 강도와 미선이라는 두 인물의 모자 관계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영화를 본 이들이라면 이제 전부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안으로 들어서기 위한 영화 초반부에 등장하는, 개인적으로는 ‘엄마 시퀀스 혹은 부모 시퀀스’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로 엄마와 부모를 상기시키는 장면들의 나열은, 별도로 설명을 부가할 필요가 없을 만큼 김기덕의 전작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기계적 나열이다. 짧게 말했지만 <피에타>의 작위성은 여러 곳에 있다. 하지만 이 점이 전부라면 비록 공감하지는 못했다고 해도 논평을 제출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피에타>에는 김기덕의 전작과 비교할 때 전에 없이 도전적인 구조가 들어와 있고 그것이 사실은 이 글을 쓰도록 유혹했다.
찰리 채플린의 익살극 게임 방식과 닮은꼴
도입된 그 구조는 게임의 구조다. 특히 관객의 자리를 의식한 게임의 구조다. 영화에서 게임의 구조는 여러 가지일 것이다. 우리는 흔히 스릴러라는 장르에서 서사적 게임을 요청받는데 그것이 이 장르의 쾌락의 요체다. 다른 고도의 게임도 있다. 미하엘 하네케가 관객에게 종종 걸어오는 게임이 곧잘 그런 것이다. <히든>에서는 어느 중산층 가정집 앞에 아무도 보내지 않은 비디오테이프가 매번 도착한다. 감독 하네케는 그것이 주인공들이 보는 화면이자 곧 스크린으로 우리가 보는 화면이 될 때 우리로 하여금 지금 보고 있는 영상은 그들이 보고 있는 실제인가 그들이 보고 있는 영상을 우리가 따라 보고 있는가의 시험에 매번 처하게 한다. 동시에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방식으로 시각적 주체의 위치를 조금씩 조정시키며 영화이론가이자 감독이었던 파졸리니가 그토록 강조한 시적 영화로서의 시각적 자유간접화법이라는 영화언어를 두고 우리와 게임을 벌인다. 영화이론가 토마스 엘새서는 하네케의 그런 게임을 우리의 인지적 능력과 벌이는 게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마인드 게임’이라고 이름 붙였을 것이다.
<피에타>의 게임 방식은 이상의 영화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리고 이 게임 구조가 <피에타>를 또한 자기만의 방식대로 복잡하게 만든다. 그러니 반이정이 <피에타>를 두고 단순회로를 기반으로 한 포르노그래피와 같다고 비판한 점에 대해서는 다르게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피에타>는 포르노그래피처럼 간단치가 않다. 아니 이렇게 말하자. <피에타>가 포르노그래피적인 현혹적 효과를 지녔을 수는 있지만 <피에타>의 작동이 포르노그래피의 작동과 같지는 않다. 고백건대 포르노그래피를 볼 때 나는 한번도 머리를 굴려본 적이 없다. 포르노그래피의 효과는, 성기와 성기의 저 명명백백하게 드러난 결합은, 모든 뇌의 활동을 정지하고 눈앞의 저 현혹의 성기들에게 오감을 쏟아부으라고 명령한다. 때문에 수도 고치러 왔다가 정사만 벌이고 가는 남녀가 있다 해도 우린 그 이야기에 관하여 불평하지 않는다. 모든 시각적인 것은 포르노그래피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문화평론가이자 문학평론가인 프레드릭 제임슨이 영화에 관한 책 <보이는 것의 날인>의 첫 문장으로 적었을 때 그의 말은 시각성이 지닌 가히 막대하고 직접적인 이 현혹의 효과를 다소 과장되게 선언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한마디로 이렇게 물으면 된다. 포르노그래피와 <피에타>의 차이는 무엇인가. 한쪽은 머리를 쓸 필요가 없고 한쪽은 지극히 머리를 쓰게 만든다. 머리를 쓰게 만드는 것, 그중에서도 구체적으로 추론의 있고 없음의 차이가 있다. <피에타>가 게임의 구조라고 말할 때 그 게임의 구조의 정체는 전적으로 추론의 게임이다.
믿기지 않겠지만 <피에타>의 그 게임 방식이 찰리 채플린이 그의 익살극을 작동시키는 게임 방식과 실은 닮아 있다. 김기덕의 영화 <피에타>를 말하는 자리에 찰리 채플린의 희극이라니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이 연계를 접하고 나서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되물을 누군가를 위해 채플린의 어느 단편영화에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먼저 전한다. 한 남자, 그러니까 찰리는 부인에게 버림받았다. 그리고 영화 속 찰리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뒤돌아 있으며 어깨를 몹시 씰룩이고 있다. 그때 그 어깨의 씰룩임을 보고 우리는 추론한다. 아내에게 버림받은 저 남자는 슬픔으로 저토록 흐느끼고 있는 것인가. 그 추론을 믿으려는 찰나에 때마침 주인공이 등을 돌려 우리를 향하면 이제 놀랄 만한 사실을 깨닫고야 만다. 그는 울고 있었던 게 아니라 칵테일을 흔들고 있는 중이다. 아내에게 버림받은 찰리는 슬퍼하기는커녕 지금 축배를 준비 중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앞선 추론은 실패한다.
이 예는 내가 아니라 철학자 질 들뢰즈가 제시한 것이다. 그의 저서 <운동-이미지> 중에서도 “행동-이미지: 작은 형식”의 장에서 “이 새로운 행동-이미지를 구성하는 기호는 지표(인덱스, index)이다”라는 전제를 시작으로 “행위 속의 또는 두 행위 사이의 아주 작은 차이는 두 상황 사이의 상당히 큰 거리를 끌어들인다”고 말하는 과정 속에 놓여 있던 하나의 예다. 하지만 나로서는 들뢰즈의 행동-이미지가 아니라 그 일부로 설명된 채플린의 예가 먼저 생각난 것이니 구태여 들뢰즈의 이미지 분류학에 종속될 필요를 느끼지는 못하고 있다.
다만 지금까지 김기덕의 영화에 관하여 잘 지적되지 않은 사항이 한 가지 있기는 하다. 김기덕 영화가 행동-이미지라는 활동 범위 안에 있는 건 사실인 것 같다(송효정도 <씨네21> 871호에서 김기덕 영화에서의 행동의 중요성을 지적했는데 이 글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쓰이는 것 같다. 나는 지금 인물들의 행동을 욕망의 투사가 아니라 추론의 지표로 보고 있다). 따라서 김기덕 영화에서 ‘말’(대사)의 실종이나 복귀를 중요하게 보는 의견들이 있지만 그것이 실종하거나 돌아왔다고 하여 어떤 소통의 의지가 실종하거나 돌아온 것이라고 나는 보지 않는다. 그 말이 무슨 말이며 어떻게 쓰이는 말인지가 더 중요하다고 볼 때 김기덕의 말들은 상투어이거나 메시지이며 혹은 행동을 구축하는 사이마다 쳐진 괄호이거나 행동의 끝에 붙는 느낌표나 물음표 정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에서 말은 윤리나 소통의 문제가 아니라 대개 일정한 작위성 아래 움직이는 기능적 단위에 더 가깝다. 때문에 말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김기덕에게 애초부터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김기덕 영화의 대사가 어색한 것도 실은 그들의 대사가 감정을 실어나르는 단위가 아니라 뜻을 전달하는 단위에 가까워서일 것이다. 뜻의 전달이 주로 목적일 때 그 말은 어색함을 어쩌지 못하거나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런데 말이 뜻을 전하고 있다면 대신 인물들의 행동은 개념을 전 하는 경우들이 많아졌다. 특히나 김기덕 영화가 그가 말하는 반추상의 시기를 지나 추상의 시기로 접어든 이후에 인물들이 비교적 구체적인 인격체가 아니라 개념을 행동으로 운반하는 운반체인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피에타>에서는 초기 김기덕 영화의 회화적 이미지가 거의 소거된 대신 철두철미하게 인물들의 행동을 중심으로 구성됐다는 사실이 눈에 띈다. 채플린의 인물들은 행동으로 웃음이라는 감정을 운반하지만 김기덕의 인물들은 행동을 지표 삼아 어떤 개념을 운반한다.
‘영화를 볼 때’ ‘영화를 복기할 때’의 이중적 추론
이와 같은 전제를 바탕으로 <피에타>의 게임을 나름대로는 ‘지표(인덱스) 게임’이라고 부르고 싶다. 다만 한 가지, 나는 이름을 붙였을 뿐이지 이 게임의 실체는 감독 김기덕이 제안한 것이다. 우리는 지표가 ‘추론의 근거가 되는 기호’라고 알고 있다. 아침나절 어느 집 굴뚝에서 연기가 나고 있다면 그 연기라는 기호는, 아 저 집은 아침밥을 준비하고 있구나, 하는 추론을 가능케 한다. 그렇다면 이것이 게임화되려면 어때야 하는 것일까. 그러니까 한 남자가 시체 옆에서 칼을 들고 있다면 그는 살인을 한 것일까 그저 칼을 빼낸 것일까, 라고 물은 들뢰즈의 가정을 차용하여 우리도 이런 식의 상상을 해보자. 젊은 두 남자가 있다. 한명은 살아 있고 한명은 죽었다. 살아 있는 남자는 피가 묻은 칼을 손에 들고 있고 나머지 남자는 피를 흘린 채 죽어 있다. 정확히 그들의 중간에서 한 중년 여성이 엎드려 땅바닥을 치며 “아이구! 세상에! 내 아들이 어떻게 이런 일을… 아이구! 이 녀석아…”라며 통곡한다면 지금 이 여인은 누구의 엄마일까. 그녀는 칼에 찔려 죽은 아들 때문에 통곡하는 엄마일까 사람을 칼로 찔러 죽인 아들 때문에 통곡하는 엄마일까.
그러니까 <피에타>에서 미선이 강도의 몽정 속 자위를 도와준 다음 손에 묻은 정액을 보며 눈물을 흘릴 때 그게 강도를 가엾이 여겨 흘리는 눈물이라고 단정짓기 어렵다. 그보다는 강도를 연민하여 흘리는 눈물일까 그를 통해 죽은 아들을 생각하며 흘리는 눈물일까, 묻는 쪽이 이 영화가 요구하는 게임에 응하는 자세가 된다. 혹은 폐건물에서 투신하기 직전에 미선이 “상구야 미안해. 놈도 불쌍해, 강도 불쌍해”라고 하면서 흘리는 그녀의 눈물은 강도 때문에 죽은 자신의 친아들 상구를 생각하는 상구 엄마의 눈물일까 상구를 죽인 강도에게 복수하려다 정말 그의 엄마가 되어버린 강도의 유사 엄마의 눈물일까. <피에타>에서의 눈물이나 웃음은, 더 나아가 어떤 행동들은, 이것일 수도 있고 저것일 수도 있는 방식으로 곧잘 이중적 추론을 가능케 하는 지표가 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것은 영화를 볼 때와 영화를 생각할 때 그 판단이 달라지도록 되어 있는데 그 점에 대해서는 다시 말해야겠다.
먼저 서사를 역순으로 되짚어 생각할 필요가 있다. <피에타>는 강도의 속죄로 종결되는 영화다. 그런데 강도의 속죄의 자세는 어디서 기인했나. 엄마를 잃었기 때문인데 그 엄마가 진짜 엄마가 아닌 걸 알고 그 이유까지 알고 나서다. 그 이유를 알게 된 건 없던 엄마를 얻었다가 잃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없던 엄마는 어떻게 생겨났나. 복수를 하기 위해 미선이 강도를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엄마가 아닌 미선은 엄마가 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했나. 그녀가 강도의 엄마라는 믿음을 주는 행동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피에타>는 어차피 미선이 강도의 엄마인가 아닌가에서 출발하는 게임이다. 실은 여기서부터 <피에타>는 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일견 중반부까지 강도가 서사의 주인공이고 미선이 그 위성인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그 반대다. 미선이 심리적인 전권을 쥐고 게임을 주도하고 있고 강도는 거기 응할 뿐이며,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은 얼마간 우리 관객의 자리도 강도의 자리와 같다. 미선이 강도의 엄마가 아닌 게 판명났을 때에야 비로소 심리적 서사적, 윤리적 추가 모두 강도쪽으로 급격하게 넘어간다. 하지만 우린 이것을 두고 미선이 복수를 위해 강도의 시험을 통과했다, 라고 간단히 축약해서는 안될 것 같다. 그렇게 말하면 이 영화가 조금씩 축적해나간 영화 인지적 경험치를 외면하는 것이고 어떻게 믿게 되었는가의 과정을 건너뛰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다 알고 있는 걸 왜 다시 말하는가, 라고 물으면 안된다. 어떻게 우린 이미 다 알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미선을 엄마로 믿게 하는 강력한 지표가 몇 차례 발생한다. 유명한 두 장면을 말해보자. 영화에서 강도는 “당신이 내 엄마가 맞다면 이걸 먹어”라고 자기의 살을 미선에게 건넨다. 이때 무엇을 먹느냐에 방점을 찍으면 해석을 위한 상징이 되지만 먹느냐 먹지 않느냐에 방점을 찍으면 게임을 이해하는 지표가 된다. 나는 그때 그것이 그의 살인지 피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차피 끔찍한 것일 바에야 그걸 먹을 것이냐 먹지 않을 것이냐를 결정하는 미선의 선택에 따른 행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순간 그 무엇을 먹든 영화는 진전될 수 있지만 먹지 않으면 영화는 여기서 끝이기 때문이다. 망설였지만 마침내 미선은 그걸 씹어 삼킨다. 그러면 그때 우리는, 관객은, 미선의 저 행위의 결정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찰나에 추론하게 된다. 영화가 그 추론을 게임으로서 촉구한 것이다. 대답은 명확해 보인다. 당신이 엄마가 맞다면, 이라는 질문의 가정법하에 저 지독한 걸 먹었으니 미선은 강도의 엄마일 가능성이 커진다.
더 강렬한 장면이 한번 더 등장한다. 강도가 미선을 강간하려는 장면이다. “내가 그 속에서 나왔단 말이지? 그럼 다시 들어가도 되지?”라고 말하며 강도가 미선의 음부를 향해 자기의 성기를 갖다댈 때 미선은 세상에서 가장 비통한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비명을 지른다. 많은 사람들이 차마 이 장면이 보기 어려웠다고 말하는 걸 들었고 개인적으로도 끔찍했다. 왜였을까. 한 남자가 한 여자를 강간하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그 장면은 끔찍했을 것이지만 아들이 엄마를 범하려고 하는 장면이라는 인식이 있었기에 몇배로 더 그러했을 것이다. 엉킨 모자관계의 이 끔찍한 일로 우리의 믿음은 더 굳어진다. 강도에게도 우리에게도 엄마로서의 미선은 자격을 갖춰가는 것 같다.
하지만 여기에 이 지표 게임의 요체이자 반전이 있다. <피에타>에서 인물이 어떤 하나의 행동을 할 때 즉 하나의 동일한 지표가 발생할 때 두개의 거의 정반대되는 다른 상황 및 추론을 동시에 내포하는 경우가 많다는 걸 감지해야 한다. 찰리 채플린의 뒤돌아선 등을 생각하자. 말하자면 <피에타>는 미선이 강도의 친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가 ‘완전히’ 알게 되는 그 순간부터 그 즉시 우리의 머릿속에서 앞 장면들을 모조리 복기시켜 다시 한번 재인식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다. 여기에는 ‘영화를 볼 때’와 ‘영화를 복기할 때’라는 구분이 있고, 그렇게 볼 때 지표가 이끈 추론의 결과가 달라진다. 우리의 의식 속에서 플래시백 효과가 일어나는 것이고 그때 여전히 행위는 변함이 없지만 상황은 재인식되는 것이다. 그 과정을 겪었기에 우린 이 영화의 결과도 아는 것이다.
예컨대 미선이 강도가 내준 살덩어리를 씹어 먹는 장면에 관한 미선의 심리적 상황에 관하여 앞서 우리가 적어놓은 추론은 틀렸다. 볼 때는 그렇게 추론했지만 복기해본 결과 미선은 강도의 엄마가 아니므로 미선은 그때 자식을 버린 모성의 죄의식으로 그 살덩어리를 기어코 먹은 것이 아니라 복수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를 거치는 독한 마음으로 그걸 먹었다고 추론된다. 강간장면에 대한 해석도 다르게 도출된다. 그 비명은 어미를 범하려는 아들 앞에서 어미가 지은 울음이 아니라 자식을 죽게 한 원수의 능욕에 치욕스러워 지른 비명이었을 것이다. 두 장면을 예로 들었지만 실은 많은 장면에 이와 같이 작동한다.
많은 이들이 엄마를 얻었다가 잃는다는 대서사적 반전 상황에 관심을 기울이지만 그보다는 인물들의 부분적인 소행동의 이중성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대서사를 좇으면 이 영화를 해석하게 되지만 소행동을 좇으면 이 영화를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필요한 건 정신분석학적 또는 성서적 해석이 아니라 육체 혹은 뇌라는 인지 과정이다. 찰리 채플린이 찰나에 벌인 지표 게임의 구조를 김기덕은 시간차를 두고 여러 차례 반복하며 복잡하게 확장해간다. 그러므로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저 유명한 말은 실은 인생에 관한 격언인 동시에 처음 보면 엄마, 다시 생각해보면 엄마가 아닌 이 영화의 지표 게임에 관한 원초적 메타 논평으로도 적절하다. 이렇게 보면 이 지표 게임은 흥미롭기만 하다. 그런데 과연 흥미롭기만 한 것인가.
지표 게임 아래 오작동하는 잉여들
영화평론가 김지미는 “우리는 미선이 스스로를 ‘엄마’라고 칭하기 이전에 그녀와 강도 사이의 육체적 친연성을 본다”라고 말하면서 미선이 강도의 집을 찾아온 첫날 강도가 그녀를 쫓아내기 위해 문으로 내려치는데도 끄떡없이 버티는 미선을 상기시킨다. 이 육체적 친연성으로 “강도가 미선에게 쉽게 빠져드는 성급한 서사를 어느 정도 용인하게 된다”고 지적한다(<씨네21> 871호). 강도가 부부 채무자의 철공소를 찾았을 때 같은 상황이 벌어지는데 강도도 그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부분에 관한 김지미의 관찰은 정확했다.
이 유사성을 이어받는 장면이 있다. 노모와 함께 사는 철공소 남자의 돈을 받아내기 위해 강도가 그를 폐건물로 데려가 건물에서 떨어뜨린다. 미선도 그들 주변에 서성이고 있다. 떨어졌으나 다리가 부러지지 않은 남자의 다리를 강도가 한번 더 짓밟아 부러뜨리자 남자가 강도에게 악담을 퍼붓는다. 그때 미선이 순식간에 달려가 남자의 다리를 짓밟으며 말한다. “내 아들한테 함부로 말하지 마!” 미선은 이전까지 자신이 엄마라는 뉘앙스를 주기는 했지만 엄마라고 스스로 지시한 적이 없는데 “내 아들”이라고 이때 처음으로 발설함으로써 자기가 엄마임을 확실히 전한다. 그런데 엄마임을 알리는 최초의 순간에 그 남자의 다리를 짓밟고 있다. 그 행동을 보는 순간 우리는 두 가지 추론을 피해가기 어렵다. 자기의 아들을 욕하는 저 남자에게 저토록 화를 참지 못하는 걸 보니 저 여자가 정말 엄마구나, 라고 이해한다. 하지만 발설하기 어려운 또 다른 뉘앙스가 그녀를 더욱 엄마로 생각하게 하는 핵심이다. 저 둘은 어쩌면 똑같이 불같은 폭력성의 피를 지녔구나. 문에 찧고도 고통을 감내하는 육체적 친연성 이후에 불같은 가학의 폭력적 친연성이 문득 던져진다.
하지만 앞서 제기한 지표 게임의 프로그램을 거쳐 이 장면을 다시 생각하게 될 때에는 어떻게 될까. 그녀의 폭력은 정녕 유용했던 것일까. 이젠 답하기 어렵다. 미선은 강도의 엄마가 아니므로 결과적으로는 자신과는 무관한 죄없는 사람의 다리를 뭉갠 것이다. 이 장면은 어떤 현명한 판단 이전에 그 행동에 대한 단순한 세속적 질문부터 묻게 한다. <피에타>가 속죄와 대속을 전하는 영화라고들 한다. 그렇다면 만약 누군가가 이 장면을 두고 저 미약한 남자에게는 가혹해도 되고 주인공인 강도만 대속의 인물로 승화되어도 괜찮은 것인가 묻는다면 대답은 무엇이어야 할까. 혹시라도, 영화적 대의를 위하여 그 정도 일부의 희생은 괜찮다는 대답을 내놓는다면, 이 장면은 김기덕이 그토록 비판하고 싶어 했던 자본주의적 속성, 중심을 위해서는 가장자리는 훼손되어도 괜찮다는 속성과 일치될 위험에 처한다.
더 큰 쟁점은 이것이 다름 아니라 위악적 제스처가 남긴 잉여라는 점이다. 우리는 이제 미선이 강도의 엄마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그렇다면 자기의 복수를 위해서는 강도가 자신을 믿게 하는 게 필요하고 따라서 강도에게 내가 네 엄마라는 걸 믿게 하는 제스처가 필요했기 때문에 미선은 그렇게 했던 것일까. 이 순간 미선의 그 행위가 미선에게는 절실했을지 몰라도 생각해보니 그 남자에게는 가혹했고 우리에게는 위악적으로 보이므로 이것의 용도가 의심스러워 잉여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나는 지금 정신분석에서 흔히 가리키는 잉여가 아니라 말 그대로 쓸 걸 다 사용하고 나서 별 소용없이 남아 있는 부산물이라는 말뜻 그대로로서의 잉여를 말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게임이 연쇄되며 몇몇 장면마다 잉여를 남기는 한, 문제는 가중된다. 잉여에 잉여가 더해지기 때문이다. 유사한 행동을 미선은 한번 더 한다. 강도와 함께 시내로 놀러갔다가 강도가 면류관처럼 생긴 풍선을 머리에 쓰는 걸 보고 한 남자가 비웃자 미선은 그때도 달려가 그 남자의 따귀를 때린다. 영화를 보는 순간에는 의심이 없던 장면이다. 미선이 엄마이니 그의 아들을 비웃는 저 남자를 때리는 것이리라. 하지만 복기하면 미선의 행동은 이상하다. 어쩌면 앞 장면과는 다른 뜻일지도 모른다. 이미 강도가 엄마로 인정한 다음의 일이므로 이건 미선 스스로 정말 엄마라고 착각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막 복수에 성공하기 위한 발판에 도달했을 뿐인데, 미선에게 이미 강도에 대한 그토록 강한 허구적 부모애가 생겨버린 것인가. 영화를 볼 때는 이해된 것 같았지만 복기해보니 그때의 행동 역시 근거가 희박하여 오히려 이 행동은 잉여가 된다.
그런데 그 사건을 계기로 다른 인물이 아니라 미선에게 다리가 밟힌 바로 그 남자가 미선과 강도를 우연히 보게 되고 강도와 미선을 찾아와 미선을 인질로 잡고 칼로 협박한다. 자기가 죽겠다며 몸에 휘발유를 붓는 강도를 향해 미선은 그러지 말라고 소리친다. 이 만남 자체가 우연을 가장한 작위적 구성이 아니겠느냐고 지적하는 건 차치하고라도, 미선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몸에 기름을 붓는 강도를 미선은 왜 말렸던 것일까, 묻게 되는 걸 피할 수 없다. 그 순간 강도에 대한 무의식의 부모애가 미선에게서 발동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부모애가 형성됐다는 근거는 여전히 희박하다. 애정이 깃들었다면 언제,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깃든 것인가. 이 문제를 사소하게 보면 안된다. 이것이 이 영화가 영화적 경험치를 쌓아가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지금 김기덕이 설치한 지표 게임 프로그램은 개념의 진척에 관한 한 정상 작동하는데 영화적 감정이나 관계 그리고 인격에 관한 한 오작동 중이다.
문제의 수음장면에 이르러 강도가 잠이 들어 몽정을 하려 하자 미선은 그의 자위를 돕는다. 지표 게임의 프로그램에 따라, 볼 때와 생각할 때, 두개의 질문이 따로 형성된다. 우리가 영화를 볼 때 이 순간이 얼마간 미선을 강도의 엄마로 인정한 이후의 시점이라는 걸 기억하자. 보는 순간의 질문은 왜 엄마가 아들의 자위를 돕는가이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잘못된 질문이다. 미선이 강도의 엄마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장면을 생각할 때는 그녀가 엄마가 아니므로 강도의 성적 결핍을 채워주는 것일 거라는 해석으로 자연스럽게 이끌리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다시 또 묻게 된다. 그의 부모가 아니고 그를 연민한다고 해서 다른 것이 아니라 그의 결핍된 성욕을 채워주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금까지 지표 게임 아래 오작동하는 잉여들의 예를 들었다. 지표의 이중성을 기반으로 하되 게임 과정에서 이렇게 저렇게 풀어보아도 의심을 남기는 것들이다. 위악적 제스처가 남긴 잉여라고 앞서 쓰기도 했다. 이 제스처들은 관객에게 강력하게 호소하고는 싶어 하지만 구체가 사라진 자리에 들어선 것들이어서 개념적으로는 받아들일 수 있으나 따지고 들면 위악적이거나 작위적으로 몰린다. 대체로 이 장면들이 인물들 사이가 아니라 바깥에 있는 우리를 향해 던져지는 걸 더 중요하게 상정하고 구상된 제스처들이라고 생각한다. 제스처라는 말이 중요하다. 그러니 이 제스처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적어도 한 가지 동의가 필요해 보인다. 앞서 김기덕의 인물들이 행동을 지표 삼아 어떤 개념을 운반한다, 고 말했던 걸 기억해주면 좋겠다. 우리는 <피에타>를 보면서 어떤 장면들이 구체적으로는 희박할지라도, 때문에 역으로 잉여적이라 할지라도, 개념적으로는 공고하다는 걸 받아들여야만 이 잉여의 장면들을 이해하고 해석할 의지를 갖게 된다. 여기에는 그러므로 이 제스처의 개념을 긍정적으로 받을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우리의 선택의 문제가 있다. 그런데 이 영화가 각각의 구체가 소멸한 신의 자리에 특정한 지표들만을 심어놓고 잉여들을 남기면서까지 그걸 통해 개념적으로 진전하는 방식을 이해하라고 요청할 때, 거기에 개인적으로는 응답하기가 어렵다.
물론 김기덕의 영화가 추상적 개념에 의존한 것은 오래된 일이며 그때 그와 같은 개념의 연쇄는 나름의 미를 갖추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다만, 차이가 생겼다면, 지금 <피에타>는 그 추상적 개념의 연쇄를 지표 게임이라는 구조로 작동시키면서 어떤 승부와 승복을 거쳐 미리 정해둔 목적지에 도달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지표 게임의 용도는 결국 정해진 목적지에 어떻게 드라마틱하게 닿는가 하는 것으로 설계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기억해보니 김기덕이 지금까지 자기의 영화에서 개념을 앞세운다고 해서 게임의 프로그래머까지 함께 자처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지표 게임을 거치며 남겨진 이 사태가 생각보다는 영화에 더 악영향을 끼친다. 단지 몇 군데에서 오작동이 일어난 것이 문제의 핵심은 아닌 것 같다. 오작동을 일으키는 잉여들이 발생하는데도 ‘불구하고’ 그걸 바탕으로 게임이 가속화되고 지속된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잉여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잉여가 수단화되는 것에 두려움이 없는 이 영화의 공고한 목적론이 문제라는 뜻이다. 한편의 영화가 영화 스스로 어느 철학적 윤리를 내포하고 지향해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 철학적 윤리를 성취해내기 위해 경험케 하는 영화적 작동에도 윤리가 있다는 데 만약 동의한다면, 전자가 아니라 후자야말로 더 존중해야 할 영화의 윤리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 그 개념적 테마가 무자비와 자비이건 복수와 구원이건, 이 윤리에 감복을 하기가 어렵다.
좋은 창작물의 간절함이란 한숨도 쉬지 않고 목적지로 강력하게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불현듯 닿아보니 그곳이 목적지였음을 깨닫게 되나, 그럼에도 정말 최종 목적지인지 의심케 만드는 그런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므로 김기덕의 영화에 관한 한 내가 가장 신뢰하는 평자 정성일이 <피에타>에 관한 글(<경향신문>)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피에타>가 김기덕의 가장 좋은 영화는 아니지만 이제까지 그가 만든 영화 중에서 가장 성숙한 영화인 것만은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해도 나는 고백건대 <피에타>에서 다른 인상을 받았다는 걸 숨기지 않으려고 한다. 차이를 강조하기 위해 실례를 무릅쓰고 그의 명쾌한 문장의 구조를 빌려오자면 나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피에타>가 김기덕의 가장 나쁜 영화는 아니지만 이제까지 그가 만든 영화 중에서 가장 교조적인 영화인 것만은 사실이다.
자학하는 구도자에서 설교하는 제사장으로
교조란 무엇일까. 종교라면 교리, 창작물이라면 그 내용이나 형식이 지향하는 목적을 상정한 다음 기계적으로 믿고 받아들이도록 유도한다면 그것이 교조적이다. 대체로 종교는 상식과 무관한 믿음의 문제가 앞서기 때문에 어떤 교리는 때로 상식을 뛰어넘어 교조적이 되기도 할 것이다. 교조란 믿게 만들도록 하기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령 어떤 믿음의 증폭을 위해서 한 영화에 다음과 같은 것들이 도입되었다고 치자. 크고 작은 작위가 도입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믿음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게임의 구조가 도입되었는데 그 게임의 작동축의 일부인 톱니바퀴가 어긋나 오작동을 일으키는데도 불구하고 이미 정해둔 목적을 깰 수는 없으므로 믿음은 강경하게 설파되어 어느 악인의 속죄와 대속이라는 숭고함의 드라마라는 지점까지 닿았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건 테마로서, 개념으로서 옳다 해도 교조적 영화의 위험을 갖게 되지 않을까. <나쁜 남자> <파란 대문> <활> <숨>, 아니 더 많은 작품들로 보여준 것처럼 김기덕의 영화에서는 역설됨으로써 공평해지는 순간들이 있고 공평의 상태 혹은 영점의 상태는 늘 그 역설을 동반한 이후에 찾아와서 서늘한 숭고함을 남겼다. <피에타>가 그와 같은 또 하나의 역설의 프로젝트, 또 하나의 숭고함의 프로젝트라는 걸 의심하지는 않지만 이런 교조적 영화를 김기덕 영화에서 처음 마주하게 된 것에 관하여 우리는 칭송보다는 우려를 앞세우게 된다.
<피에타>는 친아들 상구의 철공소로 다시 찾아들어 오열하는 엄마 미선을 기점으로 보자면 ‘1부, 엄마 되기 게임’과 ‘2부, 깨달음의 시간’이라는 구조로 되어 있는데 상영시간의 분량으로 본다면 큰 차이가 나지 않지만 1부는 조금씩 알아가거나 길게 오해를 반복하는 게임을 통한 과정인 반면에 2부는 그 게임의 봉인 해제를 전제로 하여 이후부터는 속전속결로 깨우침을 향해 간다. 2부는 1부가 있었기에 교조적 상태를 굳히는 단계에 불과하다. 미선이 엄마가 아닌 것으로 판정난 다음 그녀의 납치 자작극이 속개되고 그에 따라 강도가 과거에 악행을 저질렀던 사람들을 찾는 죄책감 순례기가 이어지고 미선은 투신하고 그에 따라 강도의 속죄는 결론부로 빠르게 이어진다. 1부에서 게임은 그 역할을 다했으므로 2부에서는 받아들이는 것만 남은 것처럼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 영화의 초반부에 등장했던 나열의 작위성이 다시 한번 고개를 드는 한편(강도의 죄책감 순례 과정이 그렇다) 미선이 폐건물에서 뛰어내릴 때에는 난데없이 아들을 강도에게 잃은 노파까지 등장하여 미선을 밀치려다 실패한다. 노파의 그 등장은 실패하기 위해 등장한 것인데, 말하자면 실패함으로써 미선이 자의로 뛰어내리는 걸 더 강조하게 된다. 노파의 실패한 행동은 <피에타>의 테마와 개념에 복무하기 위해 거기 있는 어쩌면 또 하나의 잉여다. 그렇게 하여 죽은 상구와 미선과 아직은 살아 있는 강도가 함께 땅에 누워 있는 이른바 김기덕식 영점 상태의 이미지에 이르면, 문득 <빈집>의 그 이미지가 지금 자기 복제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게 되고, 강도가 스스로 쇠사슬을 두르고 죽어가며 속죄할 때 울려 퍼지는 찬송가를 듣게 되면 <나쁜 남자>에도 찬송가가 흘렀다는 걸 기억하게 된다. 하지만 <나쁜 남자>에서는 찬송가가 흐를 때 환상인지 아닌지 불분명한 반면 지금의 찬송가는 대속의 숭고함을 의심해서는 안된다는 것처럼 성스럽고 엄중하게 울려 퍼지고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는 유치해 보여도 감동적인 장면이 있다. <아리랑>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맷돌을 끌고 실제로 거친 산을 오르는 구도자로 출연한 김기덕의 출연장면은 그 행위가 자기 연출의 퍼포먼스에 불과하다고 누군가가 비난할 수는 있을지언정, 간절함이라는 정서를 길어내 이 영화를 구도의 영화로 인정하고 싶게 만든다. 지금까지 많은 영화에서 김기덕은 자학하는 구도자였으나 <피에타>에서 그는 어쩐지 설교하는 제사장과 같다. 구도자와 제사장 둘 다 종교적 숭고함을 추구할 수는 있을 것이다. 다만 구도자가 홀로 외롭더라도 자기가 믿는 것을 향해 묵묵히 정진하는 이라면, 제사장은 자기의 제단 아래 엎드려 따를 것을 공고히 하는 이에 가깝다. 자학하는 구도자가 만든 영화들을 지지해왔고 지지할 것이지만 설교하는 제사장이 만든 듯한 <피에타>는 염려한다. 과거의 김기덕은 영화를 통해 스스로를 찾고 싶어 하는 데 골몰했는데 지금의 김기덕은 영화를 통해 자기를 믿으라고 호소하는 데 골몰하는 것 같다. 사제가 신에 대한 믿음보다 신도에 대한 관심에 귀를 기울이면 그 사제의 믿음은 위험해진다.
세잔의 일화 하나를 적어보고 싶다. 어떤 아들과 아버지가 저 멀리 들판에서 그림을 그리는 남자를 발견하고는 대화를 나눈다. 아들이 소리친다. “보세요, 아버지. 저기 멀리 들판에서 세잔이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아버지가 묻는다.“그가 세잔이라는 걸 어떻게 아니?” 아들이 대답한다. “왜냐하면 그가 세잔의 그림을 그리고 있거든요!” 세잔의 그림을 아꼈던 화상 앙브루아즈 블라르가 전하는 책 안에 적힌 말인데 저것이 세잔의 그림이므로 우리는 그가 위대한 화가 세잔임을 알아볼 수 있다는 뜻일 거다. 그러니 혹시라도 김기덕이 자신이 김기덕임을 알리기 위해 자신의 예술에 위태로운 변형을 가져올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다. 김기덕이 자신의 불굴의 의지로 성취해낸 불온한 영화적 양상들 그리하여 아무도 자기의 것이라 우길 수 없게 되어 김기덕의 것들로 영원히 남게 된, 때문에 김기덕의 제자들이 그토록 많이 배출되었는데도 아직까지는 그 자신을 그들로부터 우뚝 서서 차이지게 하는 그 차이들을 그 누구도 아닌 스스로가 나서서 흔한 내기의 판돈으로 걸어서는 안될 일이다. 김기덕이 아니라 김기덕의 영화가 김기덕을 존재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