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터/액트리스]
[정인기] 단편영화 덕에 다양한 역에 도전할 수 있었다
2012-11-08
글 : 남민영 (객원기자)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연가시> <이웃사람>, 그리고 <가족시네마> 중 <순환선> 출연한 배우 정인기

신수원 감독이 자신감에 차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배우 정인기라면 <순환선>의 실직한 가장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판단이 옳았다. 옴니버스영화 <가족시네마>의 단편 중 하나인 <순환선>은 배우 정인기의 주름 하나, 표정 하나로 실직한 가장의 고민과 히스테리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연극배우로 시작해 영화배우가 되기까지의 세월을 합하면 20년도 훌쩍 넘지만 “언제나 현장이 제일 좋다”는 그의 말과 미소에는 신인배우가 가졌을 법한 결연한 의지와 설렘이 보였다. 문득 푸근한 미소 뒤에 감춘 그의 끈기가 궁금해졌다.

-올여름에 <JURY> 현장에서 봤던 모습과 완전히 달라서 깜짝 놀랐다. 살도 많이 빠진 것 같고. 무엇보다 슈트를 입으니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살이 많이 빠졌다. 원래 정말 편안한 복장으로 다니는데 오늘은 좀 차려입었다. (웃음) 실은 나도 이런 내 모습이 좀 어색하다.

-<순환선>이 속해 있는 <가족시네마>와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명예집행위원장이 직접 연출을 맡은 단편 <JURY> 까지, 두편의 작품이 세상 밖으로 나왔다. 그전에는 <시체가 돌아왔다> <연가시> <두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 <이웃사람>도 있었고.
=올 한해도 어김없이 바빴다. 일단 내년에 개봉할 영화 두편을 찍었다. <협상종결자>와 <미스터 고>. 그리고 지난해 찍었던 김지훈 감독의 <타워>가 12월에 개봉을 앞두고 있다.

-<순환선>의 주인공인 아버지는 실직자의 패배감이나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가장의 중압감이 여실히 드러나는 캐릭터였다.
=일단 시나리오가 재밌었다. 인물도 마찬가지로 흥미로운 구석이 있었고. 작품 준비하면서 시나리오를 분석하는데 주인공이 처한 상황이 내가 가장으로서 느꼈던 지점들과 상통하는 부분이 많았다. 나를 치고 올라가는 후배들을 바라보는 심정, 직장 내 인간관계, 일자리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모습, 아이 하나도 힘든데 둘째를 가진 아내를 바라보며 과연 이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 고민하는 모습들. <순환선>은 배우이기에 앞서 딸을 키우는 가장의 입장에서 찍은 작품이었다. 하지만 신수원 감독이 생각한 것만큼 내가 감정선을 잘 뽑아냈는지 걱정스럽다. 아직 영화를 확인하지 못해 조금 긴장해 있는 상태다.

-작품도 워낙 좋았고 배우 정인기의 고민도 캐릭터에 잘 투영돼 <순환선>이 칸영화제 비평가 주간에서 카날플러스상을 받았나보다. (웃음)
=사실 내가 부적 같은 배우다. (웃음) 지난해에는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양효주 감독의 <부서진 밤>이 단편영화 부문 은곰상을 받았는데 그 작품에도 출연했었다. 이번에는 칸에서 상을 받았으니 내가 주연을 맡은 작품이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두번이나 상을 받은 셈이다. 국내에서도 여러 상을 받았고, 단편영화 하는 사람 중에 나만큼 상 많이 받은 사람은 없을 거다. 나는 그저 운이 좋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돌이켜보면 여성감독과 한 작품이 나에게 상을 많이 안겨줬다. 상도 받고 주목도 받고 제작사에서 콜도 받고. 감독과 배우가 서로에게 힘을 주는 상황이지 않았나 싶다. 한편으론 정인기랑 일하면 좋은 일 생긴다는 소문도 났다고 하더라. (웃음) 맡은 배역의 비중에 상관없이 내가 참여했던 상업영화의 승률이 좋았다. 올해만 해도 <연가시> <이웃사람> 모두 잘됐다. <시체가 돌아왔다>는 좀 아쉬웠지만. 이런 부적 배우를 캐스팅 안 하면 영화 개봉하는 날까지 찜찜하지 않을까. (웃음)

-이번 작품은 주인공의 환상으로 등장하는 기묘한 장면들이 많다. 임신한 아내의 치마를 들쳐 생닭 한 마리를 꺼내 씹어먹는 주인공의 모습도 그중 하나였다. 신수원 감독은 생닭을 꺼내기만 하려고 했는데, 꺼내서 먹겠다고 직접 제안했다고 들었다.
=맞다. 이왕 하는 거 이걸 먹어보면 어떨까란 생각이 들었다. 생닭을 먹기 전 장면에서 극중 딸의 대사가 “자식을 낳아서 책임지지 못할 거면 차라리 먹어버리는 게 낫다”였다. 우리 영화에서 가장 재밌는 장면으로 꼽고 싶다.

-듣고보니 연기하기가 만만치 않았겠다. 다작하는 건 힘들지 않았나. 일년에 최고 몇편까지 해봤나.
=15편이다. 그런데 늘 많았던 것은 아니다. 2008년에 나홍진 감독의 <추격자>에서 형사 역할을 맡아 주목받으면서 본격적으로 바쁘게 뛰어보자고 마음먹었었는데 그때가 한국영화 제작편수가 제일 적은 때였다. 어쩜 이럴 수가 있나 싶더라. 운이 없는 배우가 아닌가라는 생각도 했다. 내가 배우여도 한 집안의 가장인데 한 작품 만으로 가족을 책임질 수 있을까라는 고민도 정말 많이 했다. 결국 내가 연기를 잘하는 것보다는 가족을 책임지는 가장이기 때문에 다작을 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너무 많이 출연하는 거 아니냐” 이런 얘기도 듣고 “너는 나보다 연기를 잘하는 것도 아닌데 작품을 많이 하냐”란 소리도 들어봤다. (웃음)

-그렇게 많은 작품에서 만날 수 있는 배우였음에도 아직 배우 정인기를 드라마 <시크릿가든>의 길라임 아빠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연기 경력이 벌써 20년이 훌쩍 지났는데 길라임 아빠라고 기억되면 조금 서운하기도 하겠다.
=예전엔 그게 신경 쓰이긴 했다. 어떤 배우든 한 가지 이미지로 고정될까봐 염려하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국민드라마라고 불리는 작품에서 비중은 작지만 중요한 역할을 맡게 돼 이름을 빨리 알릴 수 있었으니까. 한편으론 ‘아 이게 드라마의 힘이구나’라는 것도 느꼈고. 그 드라마에서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장면이 내가 엘리베이터에서 현빈을 구하는 장면이었던 걸로 알고 있다. 그 이후에 아빠 역이 많이 들어왔다. <시체가 돌아왔다>에서는 김옥빈의 아빠 역도 했다. 알다시피 <7광구>와 <시크릿가든>에서는 모두 하지원의 아버지였고. (웃음) 어쨌든 좋은 작품에 출연해서 쉬지 않고 일할 수 있게 됐다. 나한테는 모두 감사한 작품이다.

-다작을 하는 배우지만 주로 악역이나 아버지, 형사 역할이 많이 주어졌다. 까놓고 말해서 중년의 배우들이 맡을 수 있는 역할이 한정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배우로서 갈증을 많이 느낄 것 같다. 필모그래피에 단편영화나 독립영화가 많은 것이 그런 갈증을 해소하기 위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장편 상업영화에서 보이는 내 모습은 형사, 의사가 많았다. 요즘에는 국정원 요원도 하고. 반면에 단편영화에서는 사기꾼도 됐다가 뻥뛰기 장수도 됐었다. 그런 작품들이 영화 연기에 스펙트럼을 넓혀줬던 것 같다. 학생들이 만드는 단편영화뿐만 아니라 시간이 되고 충분히 같이 할 수 있는 작업이면 직접 전화도 건다. 마음을 움직이는 작품이면 시간을 빼서라도 하고 싶다. 악역을 많이 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악역을 할 수 있는 비주얼을 가진 배우는 많다. 그런데 그렇게 생기지 않은 배우가 악역을 할 때 보는 관객의 즐거움은 배가된다. 나에겐 악역이 변신의 기회였다. 그런데 평소에 정인기는 밝은데 우울하고 비열하게 나오니까 “이상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그런 사악한 마음이 있는데 숨기고 산 거 아니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웃음) 내 연기를 보고 평상시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하면 일단은 대성공 아니겠나.

-개봉을 앞둔 <타워>에서는 어떤 캐릭터인가.
=최첨단 쌍둥이 빌딩을 관리하는 실장이다. 책임자인데도 건물에 불이 난 상황에서 혼자만 빠져나가려고 하는 이기적인 인물이다.

-<타워> 뒤로도 배우 정인기를 만날 수 있는 작품이 많다. 가끔 지치기도 할 텐데.
=아무래도 가장이다 보니 더 열심히 하는 것도 있지만 그보단 같이 작업한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 크다. 나에겐 노력하는 게 삶의 힘이 되는 것 같다. 아직도 나는 현장에서 제일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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