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x&talk]
[정병길] “만화책 넘기듯, 빠른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2012-11-09
글 : 이화정
사진 : 오계옥
<내가 살인범이다> 정병길 감독

15년의 공소시효가 끝났다. <내가 살인범이다>는 그 끝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참회 자서전으로 스타가 된 연쇄살인범, 그를 잡기 위한 형사의 끈질긴 사투다. <살인의 추억>의 소재에 스릴러가 바탕을 이루고, 각종 액션이 포진하며, 코믹이 끼어들고 반전이 고개를 든다. 자칫 무너질 듯, 아슬아슬한 결합이다. 독립다큐멘터리 <우린 액션배우다> 이후 첫 극영화를 완성한 정병길 감독을 만났다.

-오늘 의상이 정말 멋있다. 평소에도 이런 차림인가.
=웬걸. 평소엔 늘 추리닝 차림이다. 아는 PD님이 시사회 때는 제대로 입고 가야 한다고 하시더라. 그래서 빌려 입었다.

-시사회는 어제였는데, 옷을 여러 벌 빌렸나보다. (인터뷰는 시사회 다음날 저녁에 진행됐다.)
=집엘 못 갔다. 아침 8시까지 지인들과 술 마셔서 어제 입었던 옷 그대로다. (웃음) 다들 축하해주고 칭찬해주더라. 영화 본 사람도, 만든 사람도 기분이 좋은 하루였다. 그런데도 막상 나는 사이즈가 좀 잘려나갔네, 이런 생각에 몰입이 안되더라. 처음으로 상업영화를 만들고 큰 화면으로 보니 어느 하나 신경 쓰이지 않는 게 없더라.

-인고 끝에 만들어진 작품이라 더 감회가 크지 않았을까. <우린 액션배우다>(2008)로 스타덤에 올랐고, 당연히 차기작이 충무로의 뜨거운 기대작이었는데 그 영화가 불발됐었다. 기사에는 아직도 그 작품이 정병길 감독의 필모그래피에 포함되어 있더라.
=지금도 그 이야기는 하기 어렵다. 10개월 정도를 매일 술 마시고 괴로워했다. 이렇게 살면 안되겠더라. 형한테 노트북 하나만 사달라고 했다. 그길로 제주도에 있는 펜션 알아보고 내려가서 시나리오를 썼다. 이미 예전부터 구상해둔 작품이라 머릿속에 다 있으니 타이핑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첫날 30쪽을, 1/3을 다 쓰고 나니 펜션 걱정이 되더라. 한달 계약했는데 환불이 되려나. 그런데 역시나 작심삼일이었다. (웃음) 그때부터 한달 동안 꽉 막혔다. 결말이 안 써지더라. 일어나면 매일 노트북만 붙잡고 있으니 사람도 그립고. <우린 액션배우다>에 나온 전세진이 제주도에 산다. 만나서 이야기하다가 핵심 부분에 대한 답을 찾았다.

-오래전에 구상해둔 이야기였는데 이 이야기를 발전시킨 건 어떤 계기였나.
=화성 연쇄살인사건에 관심이 많았고, 그래서 <살인의 추억> 개봉하자마자 조조로 봤다. 언젠가 나도 영화를 해야겠단 생각이 있었고, 엔딩 크레딧 보는 게 습관화되어 있어서 끝나고도 한참 앉아 있는데, 내 옆에 중년 남자가 같이 앉아 있더라. 영화는 통 안 볼 것 같은 인상이랄까. 그런데 혹시 저 사람이 범인이 아닐까 하는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집에 와서 범인 인상착의를 찾아보니 비슷해 보이기도 했다. 그때부터 상상의 나래를 폈다. 일본에 살인을 하고 그 사체를 먹고 책을 썼던 사가와 잇세이란 살인범이 있는데, 그걸 보니 살인범이 베스트셀러 소설을 쓰는 이야기도 아주 비현실적이진 않겠다 싶었다.

-그 점은 무리수긴 했다. 살인범이 스타가 되는 과정을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도록 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안이 필요했을 것 같다.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한 고민이 컸다. 방송국 국장(장광)이 그 고민에서 나온 캐릭터다. 방송국에서 과연 시청률을 위해 살인범을 스타로 만들까? 과연 그렇게까지 할까? 이런 물음을 주고, 해답은 캐릭터 하나를 내세우는 거다. 돌아이 같은 인간이 하나 있어서 그가 행동을 감행한다면 전체적인 사건이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더라. 현실적으로 보일 수 있게 각색에서 디테일한 대사도 많이 넣었다.

-무거운 사건과 장르인데 그에 비해 코믹한 장면이 많다. 극의 몰입을 깰 수 있다는 점도 감내해야 하는 시도였다.
=<우린 액션배우다>도 따지고 보면 슬프고 우울한 영화인데 웃음을 해학적으로 넣었다. 동정받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 영화도 굉장히 센 소재일 수 있지만, 볼 땐 좀 다르게 가고 싶었다. 연쇄살인범을 두고, 여고생이 팬심에서 “우리 오빠가 다 죽인 게 확실해”라고 말하는 순간, 관객은 다 웃을 거다. 그런데 한번 더 생각하면 사회적으로 무척 섬뜩한 이야기다. 받아들일 때는 쉽고 나올 때는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코믹한 장면을 떠나, 영화의 속도가 빨라서 일단은 정신이 없고, 지루할 틈이 없다. 영화에 대한 불평이 있더라도 다 보고 하라는 식이다. 대부분 여백없이 다음 장면으로 이어지는 편집을 활용했다.
=어릴 때부터 영화는 두 시간 동안 고통을 해소해주는 도구였다. 그 시간만큼은 아무 생각 없이 몰입해서 보고 싶었다. 그러니 관객이 영화 보면서 지루해하는 걸 나 스스로 못 참는다. 최대한 빠른 전개가 필요하다고 봤다. 만화책 같은 시나리오를 쓰는 게 목표였다. 빨리 넘기면서 볼 수 있는 만화책처럼 ‘쪽’ 연출을 해봐야지 하고 접근했다.

-액션장면의 역할도 컸다. 영화의 1/3은 액션장면이지 싶은데, 풀어내야 할 스토리가 많은 이 영화의 경우엔 조심스러운 선택이었다. 특히 액션이 주전공이다 보니 되레 액션에 치중하지 말자는 자기 검열도 있었지 싶다.
=실제 시간으로 따지면 그 정도가 안된다. 오프닝 신 5분, 중간 카체이싱 5분, 엔딩 5분여다. 두 시간 영화 중 15∼20분인데 오프닝부터 몰아치니 그 부분이 인상적으로 남은 것 같다. 액션에 대해선 그동안 하지 못했던 것들을 실현해보자는 생각이 컸고, 그러다보니 부담은 없더라. 물론 드라마와 액션을 잘 녹이지 못하면 없느니만 못한 장면이 된다. 액션장면 자체가 매력을 줘야 했다. 초반 액션이 좀 과하더라도 극의 뒷부분은 스토리가 세기 때문에 잡아줄 거라고 생각했다. 편집에서도 치밀하게 계산을 했지만, 어릴 때부터 영화를 보면서 몸에 밴 감을 따랐다.

-최 형사와 살인범의 추격전이 펼쳐지는 오프닝 신은 뉴욕 마천루를 활공하는 <스파이더맨>을 연상시키더라.
=원 신 원 컷 추격 신이 가능할까 생각하며 카메라 합을 많이 맞췄다. 무술감독이 숨어 있다가 뛰는 카메라맨에게 와이어를 걸어주는 방법, 사람이 영화에서 구현된 것처럼 빨리 못 뛰니 대역들을 많이 투입하는 방법을 동원했다. 한 캐릭터의 뒷모습과 앞모습 등 대역을 각 장소에 숨겨놓고 카메라가 숨어 있으면서 그 대역을 찍는 방식이다.

-<우린 액션배우다>에서 제작진이 무술감독의 액션 설계를 알아듣지 못해서 그 장면을 찍지 못했던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이 현장에선 적어도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겠다.
=홍콩이나 할리우드 액션이 실력으로만 유명한 게 아니다. 한국의 액션배우들은 세계 최고인데 아는 사람도 없고, 그걸 풀어줄 연출가도 없었다. 카메라 앵글만 바꿔도 분명 좋은 액션이 나올 수 있다. 예를 들면 보닛 위에서 몸싸움을 하는 중간 카체이싱 장면이 제작진의 반대가 가장 컸다. 100억원짜리 영화도 아니고(<내가 살인범이다>의 순제작비는 38억원이다), CG도 안 쓰면서 실사로 어떻게 그런 위험한 장면을 찍냐는 거였다. 이용희 PD와 권귀덕 무술감독 모두 <우린 액션배우다>에서부터 함께해온 팀이라 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이용희 PD가 한강에 가서 와이어 안 메고 보닛 위에 올라가 달리니 그제야 믿어 주더라.

-캐스팅 이야기를 듣고 싶다. 최형구와 살인범의 대결 구도가 중심축인데, 주변 캐릭터가 워낙 많다. 새로운 얼굴을 많이 발굴했다.
=연극을 많이 봤다. 알려진 배우보다 연기를 잘하는 배우를 써야 한다는 게 철칙이었다. 배우들을 미팅하기 전에 그 사람의 작품을 먼저 다 찾아보고, 이 사람이다 싶으면 그때 찾아가서 하자고 했다. 배우 입장에선 큰 역할을 대뜸 하자고 하니 놀라기도 했다. (정)재영 선배와 합을 맞춘 형사 광수 역의 배성우씨는 길거리에서 말을 걸었다. 추리닝 차림에 나이도 어린 사람이 다짜고짜 말을 거니 처음엔 신뢰를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같이 떡볶이 먹으면서 섭외했다. (웃음)

-독립다큐멘터리를 찍을 때와는 사뭇 다른 경험이었을 텐데, 프로덕션 과정에서 남은 건 무엇인가.
=<우린 액션배우다>의 후광을 얻으면서 시작된 영화다. 먼저 연락이 오고, 투자사들이 시나리오를 좋아했고, 불과 4시간 만에 투자가 결정됐다. 신기했다. 그런데 상업영화는 몇 천만원이 아니라 몇 십억원이 투입되는 현장이다. 독립영화는 내 맘대로 할 수 있는데 돈이 없어서 못했다면, 이건 그 반대의 고민이 생기는 거다. 한동안은 적응을 못해서 고통스럽기도 했다. 나는 제법 유리한 조건으로 계약을 한 건데도 이 정도니 상업영화로 데뷔하는 감독들은 얼마나 힘들고 간섭이 많을까 싶기도 하더라. 독립영화에서 두각을 나타내다가도 상업영화를 만들 땐 결과가 좋지 않은 경우를 많이 보게 되는데, 결국 그 사람이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시스템에 적응을 하지 못한 거라고 생각한다.

-그럼 스스로는 시스템 적응에 성공한 건가.
=그냥 너무 하고 싶어서 미쳐서 한 것 같다. 크랭크업하는 날 눈물이 막 나는데, 최선을 다했는데 왜 이 정도밖에 못 찍었지 싶어 후회가 되더라. 재영 선배님이 어떻게 더 열심히 하냐며 위로해주시더라. 재영 선배님이 없었다면 아마 못했을 거다. 처음 고사 때 나를 부르더니 부탁을 하셨다. “촬영 일주일 남았으니 하루만 여행을 갔다와라. 프리 프로덕션을 이렇게 열심히 하는 감독은 처음 봤다. 지금보다 현장이 더 중요하니 제발 하루라도 쉬어라”라고. 그 말 듣고 정말 하루 동안 아무것도 안 했다. 나를 전적으로 믿어주셨다. 어떤 경우에도 감독 말 따라주라고 하니, 다른 사람들이 그러더라. 어떻게 했기에, 저 배우가 저렇게 감독 편을 드냐고. (웃음)

-결과는 이제 관객 손에 맡겨졌다. 그보다 차기작을 할 수 있는 자신감은 충만하겠다.
=다음 작품은 드라마, SF멜로액션, SF멜로 세편이나 구상 중이다. SF액션은 90% 완성했는데, 역시 결말을 못 짓고 있다. (웃음) 지금은 자신감보다는 일단 쉴 수 있구나 싶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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