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남영동 1985] 거의 반 미친 채로, 찍었다
2012-11-19
정리 : 주성철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이경영과 박원상, <남영동1985>의 현장을 기억하다

“죄송합니다.” 지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남영동1985>(이하 <남영동>)가 상영된 직후 열린 관객과의 대화에는 고 김근태 의원의 부인인 인재근 의원이 참석해 무대에 올랐고, 그 옆에 함께했던 이경영은 진심으로 죄송하다며 연신 눈물을 흘렸다. 정지영 감독의 <남영동>은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자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었던 고 김근태 의원의 자전적 수기 <남영동>을 바탕으로,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벌어진 22일간의 잔인한 고문의 기록을 날짜별로 담아낸 작품이다. 박원상이 고문 피해자인 김종태, 이경영이 ‘장의사’로 불리는 고문기술자 이두한을 연기했다. 김근태와 이근안이라는 실명을 쓰지 않은 것에 대해 정지영 감독은 “고문 피해에 대한 이야기는 김근태 의원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 시절 수많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존재했고, 어느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그들 모두가 영화에 담겨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물론 ‘김종태는 박종철과 김근태이고, 이두한은 이근안과 전두환의 결합’이라고 보는 시선도 있다.

자서전 <남영동>에서 김근태 의원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머리와 가슴, 사타구니에는 전기 고문이 잘되게 하기 위해 물을 뿌리고, 발에는 전원을 연결시켰다. 처음엔 약하고 짧게, 점차 강하고 길게, 강약을 번갈아 가면서 전기 고문이 진행되는 동안 죽음의 그림자가 코앞에 다가왔다.” 그렇게 그는 결국 허위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남영동>에서 그런 가해자와 피해자로 만난 이경영과 박원상은 1985년의 그날로 돌아가 영화와 현실 그 어디에도 서 있을 수 없는 22일을 보냈다. 그에 대해 이경영은 배우로 살아오던 그 오랜 시간 한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특별한’ 경험이라고 했고, 박원상은 배우로서의 자아가 송두리째 흔들리던 ‘초현실’의 시간이라고 했다. 취조실로 들어가 다시 헤어지기까지, 두 배우가 고문장치 칠성판 위에서 나눴던 그 오묘했던 교감과 우정, 그리고 떨쳐내고 싶었던 기억에 대해 얘기한다.

박원상_<부러진 화살> 홍보기간 중에 정지영 감독님에게 다음 작품을 같이 해보자는 얘기를 들었어요. 너무 감사했죠. <부러진 화살>을 하면서 저에 대한 신뢰를 가지셨다는 얘기고, 또 한국 현대사에 있어 무척 중요하고 민감한 내용을 다룰 영화에 저를 초대하신 거니까 정말 뭉클했죠. 그리고 <부러진 화살>을 했던 멤버들이 그대로 <남영동>으로 이어져야 더 의미가 있다고 하셨어요.

이경영_<부러진 화살>의 의미있는 성공이 없었더라도 모든 멤버들이 그대로 남아 함께했을 거야. 그만큼 작품에 대해, 감독님에 대해 무한한 존경과 신뢰를 가지고 있었거든. 한팀이라는 결속력이 정말 대단했어. 다들 <부러진 화살>의 성공, 그리고 우리의 생각과 작업이 결코 일시적인 이슈가 아니었음을 <남영동>으로 보여주자는 마음이었을 거야.

<남영동 1985>
<남영동 1985>

시나리오는 더한 돌직구였다

박원상_시나리오 받고서는 감독님이 이걸 어떻게 풀어내실까 너무 궁금했어요. 완성된 영화도 엄청난 직구인데 시나리오는 그보다 더한 돌직구였거든요. 감독님이나 나나 이걸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1차적으로 고민이 됐던 건, 나중에 후일담으로 20여년 이상 지나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나오는 노년의 모습이 자연스러울까, 하는 걱정이었죠. 다른 배우들이 제 나이로 나올 때 나만 펜슬로 주름을 그리고, 흰머리를 한 모습이 이전까지 쌓아온 감정을 흐트러놓으면 안된다는 생각이었어요.

이경영_이상하네, 분장 안 해도 그 나이로 보이던데? 오히려 노년이 어울렸어. (웃음)

박원상_하하, 그러고 보니 감독님하고 같이 있을 때, 내가 이두한을 하고 형이 김종태를 하면 어떨까, 하는 얘기도 진지하게 했었잖아요.

이경영_애초에 어떤 역할을 하고 싶은지 고르라고 한다면 ‘반반’일 거 같아. 그만큼 둘 모두 다가가기 쉽지 않은 역할이지. 하지만 난 이제 좀 많이 탁해져서 돌아가신 김근태 전 의원님의 인자한 모습을 드러낼 자신이 없었어.

박원상_혹시 체중 감량이 부담되신 거 아니에요? (웃음)

이경영_하하, 가장 신경 쓰였던 건 스케줄 때문이었어. 감독님께서 <남영동> 함께하자고 했을 때 난 이미 류승완 감독의 <베를린> 촬영이 결정된 상태였거든. “감독님, 저 베를린 가야 해요” 그랬더니 언제 출국하냐고 그러시더라고. 5월3일이라고 하니까 그전에 다 찍을 수 있다고 하셨어. 그래서 내가 “감독님, 정 그러시면 제가 <베를린>을 포기할 테니 무리하지 마세요”라는 말까지 했어. 그런데 그 얘기를 내가 못하겠다는 말로 잘못 이해하셨나봐. 그러고는 정말 눈물 없이는 도저히 읽을 수 없는 메일을 보내셨더라고. (웃음) ‘경영아, 꼭 그 기간 안에 네 분량을 다 찍어서 보내줄 테니 너는 꼭 출연해야 한다’며 당시 <남영동>의 첫 번째 제목이었던 <야만의 시대>에 내가 꼭 출연해야 하는 세 가지 이유에 대해 쓰셨어. 아 글쎄, 감독님이 내 얘기를 오해하고 보내신 메일이라 바로 문자를 드렸어. “감독님, 제가 언제 안 한다고 했어요? 원상이를 위해서라도 저 베를린 안 갈게요”라고. 그렇게 하겠다는 확신의 문자를 보냈더니 바로 또 답이 왔어. 하트 3개와 함께 “그래 고맙다 ♥♥♥”라고. 정말 귀여운 감독님이야. (웃음)

박원상_저는 초고를 읽고서 감독님한테 부탁드렸던 게, 일단 김근태라는 실명으로 출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였고요. 실화라는 무게감을 덜고 싶다는 이유였는데 그건 감독님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계셔서 지금처럼 완성됐어요. 두 번째는 제가 끌려온 다음부터는 쭉 시간 순서대로 찍었으면 좋겠다는 거였어요. 그러나 형님 얘기처럼 한국을 떠나야 하는 일정 때문에 김종태가 이두한을 만나는 고문의 클라이맥스를 먼저 찍어야 하는 상황이 된 거죠. 그런데 결국 15회차로 끝내길 원하셨던 영화가 더 늘어나면서 어쨌건 시간이 더 생기게 된 거죠. (웃음)

이경영_영화가 거의 실시간으로 22일 동안 벌어지는 일인데 그걸 뒤바꿔서 찍는다는 건 말이 안되지. 그건 내가 선배로서 너무 큰 잘못을 하는 거야. 또 감독님은 류승완 감독 부인인 외유내강 강혜정 대표가 고려대 직속 후배라 <베를린>에 지장을 줘선 안된다는 미안함도 크셨어. 결국 예정된 회차 자체를 초과하면서 내가 다 못 찍고 베를린으로 떠났지. 그렇게 내가 잠시 떠나 있었던 게 영화에는 나름 도움이 된 거 같아. 귀국해서 이두한이 중요한 진술을 하고, 다시 김종태를 고문하고, 또 교도소에 있는 후일담까지 찍는데 시차도 안 맞고 약간 멍한 상태에서 계산없이 찍었던 게 더 좋은 거 같더라고. 너 역시 내가 없을 때 회상 신이나 다른 외부장면 찍는 게 나았을 거야. 계속 그 안에서만 찍었다면 지쳐서 나가떨어지지 않았을까.

박원상_맞아요. 부득이하게 생긴 그런 쉼표들이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아마도 감독님은 하나의 공간에서 거의 90% 이상 촬영하니까 15회차에 끝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셨던 것 같아요. 그런데 고문장면을 촬영하면서 너무 힘들어하셨어요. 감정적인 고려를 생각지 못하셨던 거죠. <부러진 화살>이 분노하면서도 통쾌함의 쾌감이 쭉쭉 밀고 갈 수 있는 힘을 줬다면 <남영동>은 그런 게 힘들잖아요. 또 한 공간이긴 하지만 카메라는 계속 움직이고 매 컷 다른 조명을 해야 하니 조명부도 힘들어했고요.

이경영_클라이맥스 부분은 갑자기 콘티를 다 엎고 새로 찍기도 했지. 그러고는 배우들이 거의 반 미친 채로 연극을 하듯 14시간 연속으로 찍었지. 나중에 촬영분을 보고는 만족스럽기도 하면서 이건 정말 모두 집단최면이 걸린 게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영화구나, 하고 생각했지. (웃음)

정지영 감독과 만나야 하는 운명

박원상_인연이란 게 참 신기해요. 원래 <부러진 화살>의 박 변호사 역할로 다른 많은 배우들이 리스트에 있었던 걸 알고 있거든요. (웃음) 전에 감독님하고 ‘소맥’ 마시면서 “다들 어떤 이유로 안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그분들한테 정말 감사합니다” 그랬어요. (웃음)

이경영_너에게 가장 뒤늦게 왔을지 모르지만 결국 <부러진 화살>은 너와 만나야 하는 운명이었던 거야. 내가 정지영 감독님하고 처음 만난 작품이 <하얀 전쟁>(1992)인데 그건 원래 최민수가 내가 했던 변진수 역할을 할 예정이었어. 나는 곽지균 감독의 <이혼하지 않은 여자>(1992)를 준비하고 있었거든. 그런데 민수가 못하면서 내가 하게 된 건데 결과적으로 <하얀 전쟁>은 나에게 어떤 전환점 같은 작품이 됐어.

박원상_<하얀 전쟁>은 ‘내 인생의 영화’ 중 하나예요. 라스트의 명동성당 장면은 너무 강렬했죠. 지금 낙산공원 자리에 있던 한기주 병장(안성기)이 살던 동숭시민아파트의 낡은 풍경도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거기서 선배님이 귀 잡으며 불안에 떠는 모습이 지금도 깊이 남아 있어요. <알포인트>(2004)에 출연하면서 자료 삼아 볼 영화는 <하얀 전쟁>밖에 없더라고요. 그렇게 나중에 다시 6, 7번 정도 돌려보는데도 내내 집중해서 볼 정도로 정말 좋은 작품이에요. 그때만 해도 제가 정지영 감독님 작품에 출연해서 이경영 선배님과 대사를 주고받을 거란 생각은 아예 해본 적도 없으니 정말 인연이란 게 참. (웃음)

이경영_이번 영화에서는 서로 대사를 주고받았다기보다 내가 너의 몸을 너무…. (웃음)

박원상_하하, 카메라가 멈추면 제가 고문당하는 칠성판 위에서 꼼짝도 못하고 있을 때 선배님들이 너무 장난을 많이 치셔서. (웃음)

이경영_미안해. (웃음) 계속 고문장면이 반복되다보니 카메라 뒤에서도 그렇게 고조된 감정을 유지했다면 다들 못 견뎠을 거야. 오랜 경험이랄까. 일부러라도 장난을 쳤던 것 같아.

박원상_역시 선배님한테 더 배워야 하는 게, 사실 저는 초반에 그런 분위기에 잘 적응하지 못했거든요. 계속 작품 속 인물로만 살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어요. 그러다보니 가해자 역을 맡은 사람들이 수다를 떨거나 작품과는 무관한 얘기들을 하는 모습을 결코 ‘이완’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심지어는 촬영 초반에 사람들이 하나 둘 미워지기 시작했어요. (웃음) 나는 체중 조절때문에 밥도 조금 먹는데 다들 많이 먹고 야식도 먹고 하니까 정말 얄미웠죠. 나를 묶어놓고는 (김)의성 형이 스마트폰으로 게임하고 계실 때는 진짜 어우. (웃음) 그러면서 <남영동>을 읽으며 가장 기억에 남았던 구절이 떠올랐어요. 정말 미운 건 나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이 사람들이 아니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여자 아나운서의 멘트라고요.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고문을 당하며 죽어나가고 있는데, 라디오에서는 가을의 정취나 커피 한잔의 여유를 얘기하니까. 김근태 의원님이 말씀하셨던 그 고독과 공포의 실체를 확실히 느꼈다고 해야 하나.

우리에겐 너무 ‘특별한’ 경험

이경영_사실 우리도 많이 미안했었어. (웃음) 더구나 카메라가 돌아가지 않을 때 우리가 더 그랬던 건, 그런 이완의 의도도 있지만 실제로 감정적으로 너무 힘들어서이기도 해. 특수효과나 별다른 대역 없이 실제로 고문하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그렇게 미안할 수가 없었어. 뭐라고 할까, 내가 지금껏 수많은 영화에 출연했지만 정말 여러모로 ‘특별한’ 영화를 한 것 같아.

박원상_동감해요. 저로서는 그 수다에 끼어 간식도 먹고 해도 사실 별 상관없는데 왠지 그러면 안될 것 같은 기분이 계속 드는 거예요. 아무리 카메라가 돌아가지 않는 순간이라도 갑자기 김근태 의원님 생각도 나면서 ‘내가 저 사람들한테 이렇게 당하는데, 카메라가 멈췄다고 같이 어울려서 희희낙락대는 게 말이 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에요. 그렇게 해서 나오는 연기가 진짜 연기일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이건 분명히 연기인데 연기가 아니라는 생각도 들고, 하여간 아이러니한 걸 넘어 정말 선배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런 ‘이상한 특별함’ 같은 게 있었어요.

이경영_지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남영동> 상영할 때 김근태 의원 부인인 인재근 의원님하고 다 같이 영화를 봤잖아? 하셨던 얘기 중에 기억에 남는 게, 영화에서 (명)계남이 형이 고문할 때는 ‘아이고 저러다 죽지’ 하는 생각에 너무 불안불안한데, 고문기술자인 내가 전문가처럼 굉장히 능숙하게 고문을 하니까 너무 안심이 되고 고맙더래.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박종철 열사 때와 달리 ‘저 사람이 고문을 했으니까 우리 남편이 살아남았다’라는 거지. 그 얘기 안에 중의적인 걸 넘어 온갖 이상하고 복잡한 속내가 다 뒤섞여 있는데 ‘아, 인 여사님 정말로 강한 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고문할 때만큼은 최대한 프로페셔널하게, 진짜 너를 끝까지 괴롭힌다는 생각으로 했던 것 같아. 영화 속 김종태가 아닌 후배 박원상을 조금이라도 보호해야 하지만, 그 행위 자체를 가해자의 위치에서 즐기지 않으면 안된다고 봤어. 그래서 네가 정말 힘들었을 거야.

박원상_저도 진짜 참기 힘들 때 신호를 줘야 하는데 잘 안 했어요. 참을 때까지 참다가 신호를 주면 멈출 텐데 정말 끝까지 가보고 싶었어요.

이경영_내 기억에 네가 딱 한번 신호를 줬던 것 같아. 사실 나를 포함한 우리 가해자들은 어차피 네가 참기 힘들면 신호를 보낼 거란 생각에, 감독님의 ‘컷!’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절대 멈추지 않기로 했거든. 이게 분명 연기인데도 사람이 이 정도로 잔인해질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몸서리를 치기도 했어. ‘레디 액션’을 외치고 ‘컷’하기까지의 그 시간은 정말 영화와 현실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던 것 같아.

박원상_사실 한번 말고 또 있긴 했어요. (웃음) 내가 버티고 버티다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고개를 저으면 그만하라는 신호였는데, 어느 순간 가해자들이 사인인지 연기인지 모르는 순간이 오더라고요. 그러니까 나는 막 고개를 젓고 있는데 의성 형이 순간 내 오른쪽 어깨를 못 움직이게 꾹 누르면서 계속하시더라고요. 이러다 진짜 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웃음)

이경영_감독님이 컷을 안 했는데 동시녹음 기사가 컷을 했던 적이 한번 있어. 우리도 아무 소리 못 들었는데 동시녹음 기사가 귀신 소리를 들은거지. 그때 다들 완전 얼어붙었잖아. 스튜디오를 떠돌던 당시 영혼이 소리로 들어온 거라는 얘기도 하고. 원래 촬영장에서 귀신 소동이 나면 영화가 대박난다던데. (웃음)

박원상_귀신 소동, 하니까 촬영 전에 우리가 촬영하던 남양주종합촬영소 6세트로 두꺼비가 들어온 적 있었잖아요? 영화에도 나오는 민청련(민주화운동청년연합) 상징이 바로 두꺼비인데 그걸 보고 또 대박날 징조라고 했었죠. (웃음)

이경영_네가 고문을 당하면서 성기가 노출되는 장면이 있는데, 그걸 직부감으로 담아낸 장면이 너무 좋았어.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같은 느낌도 있고. 그러기엔 네가 너무 몸이 좋아, 완전 이만기 종아리잖아. (웃음) 아무튼 난 될 수만 있다면 그게 메인 포스터감이라고 생각했었어.

박원상_제가 대학연극반 공연 때 <소포클레스>를 한 적 있거든요. 그게 고대 그리스 시대의상이니까 다리 옆 라인이 드러나고 그러잖아요. 그때 한 친구가 연극 도중에 “야, 원상이 종아리 좀 봐라. 진짜 튼튼하다” 그랬어요. 그게 귀에 콱 박혀가지고는 연극을 어떻게 끝냈는지도 모르겠고 그날 이후 반바지도 잘 안 입었어요. (웃음) 그래서 사실 좀 약해 보이는 김근태 의원을 연기한다는 걸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는 순간이 있었어요. 그런데 인재근 여사님이 얘기해주셨는데 김근태 의원님도 축구를 워낙 좋아하셔서 종아리가 아주 굵으셨대요. 그때 좀 기분이 나아졌죠. (웃음)

고문과 용서 그리고 기억

이경영_가족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김근태 의원님의 의동생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을 이번 부산영화제 기간 중에 만났는데 이근안 면회 간 얘기를 해주셨어. 진짜 한대 치고 싶어서 주먹을 내내 쥐락펴락하셨대. 그래서 “영화 보시고 난 다음에 저라도 한대 때리세요” 그랬지. 그런데 영화 끝나고 난 다음에 펑펑 운 얼굴로 내 두손을 꼭 잡으시더니 “수고했어” 그러시더라고.

박원상_제가 또 감동적이었던 일은요, 인재근 여사님이 현장에도 2번인가 오시고 카메오 출연도 하셨잖아요. 부산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얼마 전에 꿈에 남편이 나왔는데 원상씨 얼굴이더라고” 그러셨어요. 뭔가 찡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어떤 지인이 눈이 참 예쁜 마리아상을 선물로 줘서 집에 가져다놓으셨다고도 하시고. 나중에 개봉하면 마리아상도 볼 겸해서 형하고 같이 찾아뵈려고 했죠.

이경영_그래 같이 가야지. 주변 분들 얘기를 들어보면, 김근태, 인재근 두분 캐릭터가 약간 남녀가 바뀌었대. 웃을 때 보면 소녀 같고 정말 고우신데 완전 여장부래. (웃음)

박원상_생각나는 다른 분도 계세요. 촬영 끝나고 김근태 의원님 계신 모란공원을 찾아뵌 적 있거든요. 그런데 입구 안내판을 보니 박래전 열사도 거기 계신 거예요. 그 선배님이 숭실대 인문대 학생회장이었는데, 1988년인가 우리 연극반에서 막 연극을 올리려고 할 때 총학생회에서 ‘지금 학생회관에서 한 사람이 분신을 하고 투신했는데, 공연을 안 하면 안되겠냐’라고 부탁한 적 있어요. 그분이 바로 박래전 열사였죠. 그런데 연극을 안 할 수 없는 상황이라 막을 올리기 전에 관객하고 다 같이 묵념을 했던 기억이 나요. 정말 뒤늦게 또 한방 맞은 기분이었어요. 오랫동안 잊고 있던 그 기억이 그때 되살아났죠. 그래서 이후로는 <남영동>에 대해 고문과 용서의 영화이기도 하지만 ‘기억’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고 계속 말하고 있어요.

이경영_내가 아주 오래전에 출연했던 <부활의 노래>(1990)가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으로 도청 진압 때 사망한 윤상원과 전남대 총학생회장으로 옥중 단식 끝에 절명한 박관현 등 실존인물들에 대한 영화인데, 거기서 내가 연기한 ‘태일’의 모델이 바로 윤상원 열사거든. 검열 때문에 25분이나 잘려나가기도 했는데, 유가족들을 초청해서 대한극장 특별시사실에서 원본으로 시사할 때는 다들 통곡을 하시더라고. 그 울음소리 때문에 도저히 진행이 안돼서 잠시 영화를 끊었다가 볼 정도였으니까. 그러다보니 나는 <부활의 노래>하면서 광주 망월동에 못 간 게 너무 큰 죄책감으로 남았어.

박원상_<남영동>이 15세 관람가인데 어린 학생들이 많이 봤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함께 토론했으면 좋겠어요. 내 아이도 이제 중1인데 잊혀진 역사를 알아갔으면 좋겠다는 게 아니라, 최근의 학교폭력이든 뭐든 그게 다 어른들의 잘못으로 삶의 가치가 무너지고 사회가 뒤죽박죽 학습되어온 결과인데, 이 영화가 보여주는 고문과 고통을 접하면서 과연 그 아이들이 아무렇게나 주변 친구를 괴롭히고 쉽게 폭력을 행사하는 아이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역사로부터 느끼는 공포와 고통이 우리의 삶으로도 전이될 수 있다고 봐요.

이경영_어떤 분이 했던 얘기인데 “끝까지 버티고 봐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수 있다. 끝까지 버티면서 여기 차오르는 먹먹함들을 갖고 극장을 나가야 한다”고 하시더라고. 정말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다시 옛날로 돌아가지 않으리란 법이 없잖아? 마지막 추신으로 개인적인 바람을 말하자면, 박원상이 이 영화를 통해 공익광고를 찍을 수 있으면 좋겠어. 물론 인기가 많아져서 상업광고를 찍어도 좋겠지만, 진짜 진정성있는 공익광고를 찍게 되고 그 수익금이 엔딩 크레딧이 나올 때 나오는 분들에게 전달되면 어떨까.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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