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나쁜 남자>의 창녀촌 포주역 김정영
2002-01-30
글 : 백은하 ( <매거진t> 편집장)
사진 : 정진환
“첫 외박이 <나쁜 남자> 때문이었어요.”

“저런 년은 지가 6만원짜리인 걸 빨리 알아야 돼!” 낮고 건조한 목소리, 낯선 얼굴. 미소의 흔적을 찾기 어려운 무표정에 얼핏 김여진과 정경순을 떠올리게 만드는 배우. 영문도 모른 채 사창가에 팔려온 선화에게 적도 동지도 아니었던 <나쁜 남자>의 포주 은혜의 존재는, 영화가 끝난 뒤에도 내내 궁금증으로 남았다. “어제 좀 과음했나봐요. 미장원도 못 갔네요” 다소 부스스한 짧은 파마머리로 스튜디오 문을 열고 들어오며 자신을 김정영이라고 소개하는 그는, 제법 걸쭉한 나이의 냉소적인 중년 여성을 상상했던 것과 달리 “서른한살, 쥐띠예요”라는 경쾌한 대답을 날린다.

‘연극인 환영!’ 상명대 연극반을 거쳐 95년 극단 한강에서 <산재> <전태일> <단장곡> 등 결코 가볍지 않은 작품들과 함께 자신의 무게감도 늘려나갔던 그의 눈을 영화쪽으로 돌리게 한 건 <실제상황> 배우모집 광고의 마지막 줄. “컷없이 한번에 가는 영화라니 이건 한번 해볼 만하겠다는 마음이 들었죠.” 2차 오디션을 보고 돌아가던 김정영은 지하철역 앞에서 우연히 김기덕 감독을 다시 만났고 “정영씨, 이거 인연인 것 같네요”라던 김기덕 감독의 예언(?)은 <실제상황>과 <나쁜 남자>로 이어졌다. “한강의 장수익씨가 ‘배우가 무대에 준비없이 올라가면 창녀와 같은 거다’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했는데 <나쁜 남자>에서의 내 연기는 정말 연습부족이었어요. 게다가 정말로 창녀촌 포주 역할을 했으니….” (웃음) 연극무대에 먼저 뿌리를 내린 배우라면 누구나 겪는 어려움이겠지만 상대배우가 아닌 카메라를 향한 연기는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너도 나처럼 평생 목욕탕 못 가게 해줄까?” 몸을 휘감은 문신을 선화에게 보여주며 울부짖는 장면. 웃통을 벗은 채 상반신을 휘두르는 과격한 동작을 해야 하는 장면을 앞두고 그는 꽤나 긴장했다. “결국 다른 스탭 다 내보내고 찍었어요. 유난스럽다고 할 수도 있을 텐데, 감독님은 앵글 아래에서 내 다리를 잡고 넘어지지 않게 균형을 잡아주시더라고요. 소문과 다르게, (웃음) 이해심도 많고 배려도 많이 해주시는 편이세요.”

“첫 외박이 <나쁜 남자> 때문이었어요.” 요즘 <행복한 가족>이란 연극에 출연중인 김정영은 극작가 출신의 김학선씨와 2년 전 ‘행복한 가족’을 이루었다. 대학로 민속주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외상값 갚으러 온 남편을 만나 6개월 만에 결혼에 골인했다는 그는 ‘바른 생활 남편’의 철저한 관리 덕에 ‘바른 생활 아내’로 살았다. 하지만 요즘은 남편이 홍상수 감독의 눈에 띄어 <생활의 발견>에 출연하는 바람에 이 ‘영화가족’의 규율도 조금은 느슨해졌다. “영화요? 연극보다 돈이 되니까, (웃음) 그리고 연기할 수 있으니까….” 대학로에서도 몇몇 유명배우를 제외하고 나이든 여자배우들이 연기할 수 있는 기회는 점차 각박해지고 있는 것이 사실. 관객과 함께 존재가치를 부여받은 배우라는 직업을 선택한 이상, 좀더 많은 관객을 만날 수 있는 영화작업을 멀리할 이유가, 그에겐 없었다. “주연은 아니지만 은혜는 나름의 역사를 가진 인물이었는데, 그냥 아무런 역사도 없이 누구누구 이모나, 고모 같은 역을 하게 될까 두려워요.” 이제 막 영화라는 매체를 향해 발을 들여놓은 신인배우 김정영. 그가 앞으로 나이든 여배우의 비애가 아니라 잦아질 외박의 스트레스로 괴로워하게 되길, 조심스럽게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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