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형식에 바치는 영화적 연가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2012-11-21
글 : 이지현 (영화평론가)

유명 극작가 ‘앙트완 당탁’의 부고를 들은 열세명의 인물들이 몽블랑 고지대에 위치한 대저택에 모여든다. 그들은 모두 과거에 앙트완의 희곡 <유리디스>를 연기한 적이 있는 배우들이다. 집사는 이들에게 저택의 내력에 대해 설명하는데, 앙트완이 지난해 스물다섯살 연하의 애인과 헤어지면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게 됐단 이야기이다. 이후 모두가 스크린이 설치된 거실에 모이고, 본격적인 유언집행이 시작된다. 이때 영화에는 무르나우의 <노스페라투>(1922) 속 구절, “그들이 일단 다리를 건너자, 그때 유령들이 다가왔다”가 떠오르는데, 이는 모든 인물들이 앞으로 맞게 될 상황에 대한 암시를 준다. 유령들, 그러니까 이미지의 환영이 재연될 것이고 이들은 곧 현실과 괴리될 것이다. 실제로 영화가 진행되자 배우들의 현실은 당연한 듯 지워지는데, 인물의 나이나 배경 등이 모두 삭제되지만 아무렇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모두 이 문구 덕이다. 같은 배역을 연기하는 세 커플이 반복 혹은 겹쳐지며 흐르는 이후의 이야기는 유명한 그리스 신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체’의 패턴을 따라간다.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지옥신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뒤를 돌아보게 될 것이다.

알랭 레네의 신작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전형적인 미장아빔(mise en abyme) 형식을 취한 드라마이다. 거실에 영사되는 배우들의 연극 <유리디스>를 필두로 하나의 작은 괄호가 점점 바깥의 유사한 괄호들로 확대되는데, 이 독특한 형식은 ‘완벽하게 닫힌 물리적 배경’(저택 혹은 거실)을 오히려 구조적으로는 완전히 여는 결과를 낳는다. 자기 반영의 반복적 연쇄를 통해 영화가 현실에까지 범위를 넓히는 것이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시퀀스에서 이를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이를테면 오프닝에서는 배우 ‘램버트 윌슨, 사빈느 아젬마, 미셀 피콜리’ 등의 실제 이름이 호명되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영화 속 영화의 배우’가 영화 바깥의 배우들과 엇갈리며 뫼비우스의 띠를 완성하는 식이다. 이를 위해 오프닝의 파리 장면은 클로즈업으로 처리되었고, 배우의 얼굴과 수화기만이 드러나게 연출됐다. 영화 속의 희곡 <유리디스> 또한 프랑스 극작가 ‘장 아누이’의 작품들을 개작해 완성된 결과이다. 영화 자체가 현실에서 기인한 것이다. 즉, ‘그리스 신화와 실제의 희곡, 영화 속 희곡, 이를 연기하는 영상, 그 영상을 따라하는 배우들과 앙트완의 바깥 이야기’ 등 최소한 다섯개 이상의 층위가 모두 현실과 이어진다. 어쩌면 아흔살의 거장이 고심 끝에 이룩한 이 영화는 형식에 바치는 영화적 연가인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독특한 제목에 대해 감독은 프랑스 주간지<르주흐날 뒤 디망쉬>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러시필름을 들여다보면서 제작자에게 입버릇처럼 말하던 ‘아직은 편집되지 않았으니 당신은 아무것도 본 것이 아니다’란 말이 발전해서 이렇게 완성됐다”라고. 또한 이는 최초의 유성영화라 불리는 <재즈싱어>(1927)에 대한 오마주라고도 전해진다. 첫곡 <더티 핸즈 더티 페이스>의 공연이 끝나자 박수를 보내는 카페의 관중을 향해 알 존슨이 던진 대사, “잠깐만 기다려요. 당신들은 아직 아무것도 듣지 못했어요”를 기억하는가. 맥락상 이 대사는 다음의 노래 <투트 투트 투치>를 위한 호언쯤으로 들리는데, 영화 <당신들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역시 후속작을 기대해 달라는 레네의 선언이라 이해해도 무방할 것 같다. 트리플로 캐스팅된, 세대별 오르페와 유리디우스 커플을 살피는 것 역시 흥미롭다. 그중 가장 연장자 커플인 ‘사빈느 아젬마와 피에르 아르디티’에 특히 눈이 가는데, 레네 영화 특유의 환상성이 이들에게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사빈느 아젬마의 얼굴에 젊음의 혼령이 덮치는 마법 같은 순간에는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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