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 은퇴식을 마친 학교 수위 하네스(테오도르 줄리어슨)는 괴팍한 성미의 노인이다. 그는 걸핏하면 아내 안나(마그렛 헬가 요한스토디어)에게 화를 내고, 장성한 아들과 딸에게 생트집을 잡는다. 자식들은 어머니를 연민하고, 아버지를 원망한다. 이들에게 하네스는 그저 실패자일 뿐이다. 그러나 이들은 하네스가 바로 자신들 때문에 귀향을 포기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이들은 은퇴식이 끝난 뒤 하네스가 자살 시도를 했던 것도, 안나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변기에 앉아 아이처럼 울었던 것도 알지 못한다. 전신불수가 된 안나를 하네스가 직접 돌보겠다고 고집하자, 자식들은 아버지를 몰아세우며 반발한다. 그리고 곧 체념하고는 이내 심드렁해진다. 이제 이들은 어머니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아주 가끔씩 부모 집을 드나들 것이다. 죽어가는 아내 곁에서 연로한 남편이 경험하는 심연에 비한다면, 어쩌면 자식들의 연민과 원망이란 호들갑스럽고 얄팍한 감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아이슬란드의 신예 루나 루나슨 감독은 2004년에 <라스트 팜>이라는 단편영화를 만들었다. 죽은 아내를 위해 직접 나무를 잘라 관을 짜고 구덩이를 파는 노인의 이야기다. 영화의 결말은 사뭇 다르지만, <볼케이노: 삶의 전환점에 선 남자>도 이 단편과 비슷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 아내가 죽어가는 비극 속에서, 결국 남편은 선택의 순간에 직면한다. 영화는 하네스의 비애를 설명하기보다 그의 단호한 움직임을 좇으며 그 안에 숨겨진 고통을 우회적으로 드러내는 쪽을 택한다. 하네스는 영화에서 끊임없이 움직인다. 그는 펌프질을 하고 생선을 손질하며, 고장난 엔진을 고치고 아내의 기저귀를 간다. 대사 또한 많지 않다. 그러나 이 건조한 톤이 결국 삶을 관조하는 영화의 태도와 효과적으로 공명한다. <볼케이노: 삶의 전환점에 선 남자>를 완성도가 뛰어난 작품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간혹 노골적인 상징이 등장하기도 하고, 아들과 딸의 캐릭터가 불안정해 집중을 흐트러뜨리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하네스 역을 맡은 배우의 투박하면서도 섬세한 연기가 영화의 단점을 압도한다.
하네스가 아끼던 배는 닳고 시들해진 노년에 대한 비유일 것이다. 하네스는 혼자서, 그리고 나중에는 손자와 함께 고장난 배를 고치고 손질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바다를 꿈꾼다. 영화의 제목인 ‘볼케이노’가 숙명과도 같은 삶의 질곡을 의미한다면, 바다는 그 질곡 속에서 살아온 회한의 세월에 대한 은유가 될 것이다. 모든 진통이 끝난 뒤, 하네스는 바다를 바라보며 선다. 이때 구름 사이로 스쳐간 빛이 아주 잠시 하네스의 얼굴에 드리우는데, 눈물 맺힌 얼굴에 닿았다가 부서지는 옅은 빛줄기가 묘한 서정을 자아낸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그것의 정체가 ‘위로’였음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