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터/액트리스]
[이정현] 무당? 미혼모? 배우인데 뭐
2012-11-22
글 : 김성훈
사진 : 최성열
<범죄소년>의 이정현

모든 걸 다 바꾸겠다던 테크노 여전사, 영원히 소녀일 줄 알았던 이정현이 엄마가 되어 돌아왔다. <범죄소년>에서 그가 맡은 장효승은 33살의 미혼모다. 17살 때 원치 않은 임신과 출산을 한 뒤 아들이 3살 때 가출한 그다.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뒤, 그는 아들(서영주)이 소년원에 있다는 사실을 듣고 찾아간다. 처음으로 가족에 대한 사랑을 느낀 그는 아들과의 동거를 시작한다. 그러나 아들의 여자친구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미혼모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혼란스러워한다. 데뷔작 <꽃잎>(1996), 공포영화 <하피>(2000)에서 보여준 강렬한 모습이나 <파란만장>(2011)의 무당은 잠깐 잊어도 좋다. 강이관 감독의 영화 속 인물이 그렇듯이 <범죄소년>의 이정현 역시 사실적이고 섬세한 연기를 펼쳐낸다.

-강이관 감독은 “실제 미혼모들의 연령대가 10대가 많아서 아들 역을 맡은 서영주 씨와 나이 차가 크게 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이유로 캐스팅했다고 하던데요.
=연락이 왔어요. <파란만장>이 좋았다면서.

-그리고 만나셨군요.
=만났는데, 여배우들이 기피하는 미혼모 역할이고, 노 개런티래요. 이거 어쩌지? 하하. (웃음) 일단 시나리오부터 읽어보고 판단하려고 했어요.

-시나리오는 어땠나요.
=이야기가 어둡고 역할이 어려웠어요. 정말 자신이 없었어요. 그래서 못할 것 같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감독님이 이야기를 많이 하시면서 설득하시려고 하셨어요. 좋은 취지로 기획된 인권영화니까 한번 하자면서.

-만나기 전에 강이관 감독은 알고 있었나요.
=작품에 너무 목말라 있던 때였거든요. 감독님을 만나기 전에 작품을 찾아봤죠. <사과>가 매우 좋았어요. 인물의 감정이 섬세하더라고요. 그런 사람이 만드는 영화라면 한번 해봐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어요. 그리고 미혼모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를 보았죠.

-다큐멘터리 속 미혼모를 보니 어떤 기분이 들던가요.
=대부분의 미혼모들이 피임에 대해 잘 모른 채 실수로 아이를 가지더라고요. 경제력이 없는데다가 그들에게 조언을 해줄 만한 어른도 주변에 없고. 사회적인 안전장치도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고. 그저 아이를 낳아 단둘이서 힘들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니 너무 안타깝고 눈물이 났어요. 이런 현실을 관객에게 제대로 알릴 수 있다면 좋겠다 싶었어요.

-효승은 어떤 여자던가요.
=울면서 항상 부탁하러 다니고, 그러다가 대성통곡을 하는 친구였어요. 그런데 미혼모라고 해서 그런 모습만 보여주면 전형적인 드라마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원래 캐릭터를 약간 바꿨어요.

-어떻게 바꿨나요.
=납득이 잘 가지 않았지만 효승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봤어요. 정말 아들과 단둘이 막막한 상황에서 살게 된다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 살아남기 위해서 자존심을 버린 채 실실 웃으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구걸하며 살아갈 것 같았어요. 감독님께 그렇게 말씀드렸더니 제 의견을 수용해주셨어요.

-촬영 첫날 굉장히 애먹으셨다고 들었어요. 소년원에서 아들(서영주)과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요.
=대본에는 아들을 처음 만나자마자 대성통곡한다, 라고 나와 있었어요. 그게 이해가 안됐어요. 태어나자마자 버린 이후 십 몇년 동안 보지 못한 아들을 처음 만났는데, 어떻게 눈물부터 흘려요. 그런데 감독님께서는 그래도 한번 그렇게 가보자고 하셨어요. 한 6시간을 울었죠. 결국 선택된 장면은 기자님이 보신 버전이에요. 대사를 건조하게 툭툭 내뱉는 장면요. 촬영 첫날은 감독님이나 저나 시행착오가 많았던 것 같아요.

-제작진도 고민이 많았을 것 같아요. 정현씨와 서영주씨가 엄마와 아들처럼 안 보일까봐.
=감독님은 약간 연인처럼 보여도 괜찮을 거라고 말씀하긴 했는데. 그럼에도 다크서클도 그려서 만들고. 저는 아무리 밤을 새워도 다크서클이 안 생기거든요. 메이크업 때 피부톤도 두껍게 하고. 전부 늙어 보이려고 한 설정이죠.

-그날 현장 가는 길에 이런 상상은 안 해보셨나요. 아들을 처음 만나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효승은 거짓말을 잘하는 캐릭터잖아요. 그래서 아들도 속이고 싶어 할 것 같았어요. 나름 부자처럼 보이려고 정장 차림에 고급 스카프를 매고. 차도 친구의 그랜저를 빌려 나오고. 아들한테 ‘내가 엄마야. 나 좀 잘살아’라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한달까. 나중에 아들을 집으로 데려오면서 그게 거짓말인 게 들통나긴 하지만. (웃음)

-강이관 감독은 “2회차 촬영부터 정현씨가 완전히 효승이 된 것 같다”고 하시던데요.
=2회차 촬영현장에서 감독님도 똑같은 말씀을 해주셨어요. 효승에 완전히 몰입하게 된 게 그때였나.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현장에서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는 그렇게 세부적으로 하진 않으셨다고.
=감독님께서 사실적인 연기를 선호하셔서 캐릭터에 대한 큰 그림 정도만 얘기했어요. 그런 연기 연출 방식이 한편으로는 편하기도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걱정도 많이 됐어요. 찍다가 약간 불안감이 들던 때가 있었어요. 그때 감독님께 ‘이게 맞는 거죠?’라고 물어봤지만 또 대답을 안 해주시고.

-그러면 감독님께 ‘나, 답답하다. 왜 얘길 안 해주냐’고 요구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아, 전 그렇게까지는 못해요.

-잘하실 것 같은데.
=정말. 그런 거 되게 못해요. 현장에서 감독님 말씀 되게 잘 듣고요. 스탭들끼리 다투면 중간에서 화해시키는 거 잘하고요.

-아니, 그런 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배우로서 요청할 수도 있다는 거죠.
=그냥. (웃음) 여러 테이크를 가서 그중 하나를 선택했다면 그것도 다 제 복이라고 생각해요. 영화를 보니 잘 나온 것 같아 기분이 좋았어요.

-지난해 <파란만장>으로 거의 10년 만에 한국영화에 컴백했어요. 물론 그동안 중국, 일본을 오가며 여러 드라마에 출연한 적이 있긴 하지만. 그동안 한국영화에 출연하지 않았던 이유가 뭔가요.
=<꽃잎>과 <하피> 때문인지 이후 들어온 작품과 역할이 거의 다 공포영화나 신들린 역할이었어요. 대중에게 그런 이미지로 굳어지는 게 싫었어요. 그레서 그런 역할을 기피했던 게 사실이에요.

-공포영화나 신들린 역할이 아닌 캐릭터는 하나도 없었나요.
=없었던 것 같아요.

-<파란만장>에서도 무당 역을 맡았잖아요. (웃음) 어떻게 출연하게 된 건가요.
=어떻게 영화 컴백을 하지 고민을 하던 차에 박찬욱 감독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는데. 첫 말씀이 ‘여주인공’이라고 하셔서 ‘와!’ 했더니 ‘그런데 무당이야’라고 하시더라고요. (웃음) ‘에이’ 하면서도 박찬욱, 박찬경 감독님을 믿고 도전했어요. <파란만장> 덕분에 강이관 감독님도, 현재 함께 작업을 하고 있는 김한민 감독님도 연락을 주신 거거든요. 그 영화를 보시고서 여기저기서 연락이 많이 와요. 박 감독님께 항상 감사드려요.

-영원히 소녀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30대가 됐어요.
=예전에는 이런저런 계획들을 세웠는데, 원래 제가 계획을 세워도 계획대로 실행한 적이 거의 없었어요. 계획하면 욕심만 커지고 고민만 느는 것 같아서. 나이를 먹으면서 현재에 충실해야겠다 싶더라고요. 그걸 30대가 된 지금 깨달았어요. 무당? 미혼모? 뭐 어때? 배우인데 뭐. 이거 들어오면 이거 하고, 저거 들어오면 저거 하며 살면 되지.

-가수로서도 매년 꾸준히 앨범을 낼 만큼 열심히 활동하고 있어요. 이제는 걸그룹과 경쟁해야 하는데요.
=경쟁하면 질 것 같아요. (웃음) 경쟁은 안 할 거고, 제 색깔을 좀더 두드러지게 만들어서 기존의 팬층을 더욱 두텁게 만들 거에요. 새 앨범은 내년 초 발매를 목표로 하고 있어요.

-2000년쯤, 어느 인터뷰에서 3년 안에 결혼하겠다고 말씀하셨어요.
=솔로로 지낸 지 2년 가까이 됐어요. 지금은 (남자친구가) 없는 게 편해진 상태예요. 일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게 됐고. 남자친구 있으면 자꾸 보고 싶고 외로워지는 것 같아요. (웃음) 어쨌거나 장기적으로는 3년 안에 결혼을 해야 할 텐데 큰일이에요.

-차기작은 김한민 감독의 신작이라고.
=김한민 감독의 신작 <명량, 회오리 바람>이라는 작품으로, 이순신(최민식) 장군의 명량대첩이 영화의 배경이에요. 조선 수군 ‘임씨’(진구)의 아내 역을 맡았는데, 현장에서 홍일점이에요.

-<하피> 이후 첫 상업영화 복귀작인 셈이네요.
=그럼요. 감독님들께서 연락을 많이 주셨으면 좋겠어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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