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10일, 영국을 대표하는 해로즈백화점 맞은편에 위치한 만다린호텔에서 영화 <호빗>의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이날 참석한 이들은 간달프를 연기한 이안 매켈런과 골룸 역의 앤디 서키스, 그리고 빌보의 마틴 프리먼이었다. 영화를 미처 볼 수 없었던 기자들의 영화에 대한 강한 호기심 덕분에, 간담회 자리는 배우들이 등장하기 전부터 서로의 의견과 기대감들을 나누느라 그 어느 때보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한국, 꼭 한번 가고 싶다
간달프 역의 이안 매켈런
간담회장의 문이 빼꼼히 열리며, 노신사 이안 매켈런이 등장했다. 화이트 와인잔을 손에 거머쥐고 들어온 그가 한 첫 질문은 “한국에서 온 기자가 있던데 누구인가요?”였다. 이안 매켈런과의 인터뷰는 “한국에 꼭 한번 가고 싶다”는 그의 바람에서부터 시작됐다.
-<반지의 제왕>은 한국에서도 큰 인기가 있었다. 정말 한국을 방문할 생각이 있나.
=(웃음) 당연히! 한국인이 <반지의 제왕>을 좋아했다니, 나를 꼭 한번 초대해줬으면 좋겠다. 이건 진짜진짜 진심이다!
-피터 잭슨의 연출에서 <반지의 제왕>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글쎄. <반지의 제왕>의 성공 때문에 피터에게는 압박감이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도 그렇게 보였고. 그래서 초반에는 좀더 안정적으로 진행하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를 비롯해 다른 모든 배우들은 그에 대한 깊은 믿음이 있었고, 피터 역시 이를 알고 있었기에 후반부로 갈수록 점차 그도 편안해진 것 같다.
-예고편을 본 일부 팬들이 TV시리즈 정도밖에 되지 않는 영상미를 가졌다고 비난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부분에는 절대 동의하지 못한다. 이 작품은 <반지의 제왕>만큼 흥미진진하며, 3D로 제작된 일부 장면은 <반지의 제왕>보다 긴장감이 넘친다. 3D로 제작된 화면은 중간계에 속한 작은 길모퉁이 코너까지 세심하게 보여줄 것이다. 좀 진부한 표현이지만, 그동안 중간계에 대해 상상해왔던 것, 그 이상이 <호빗>에 있다고 생각한다.
-뉴질랜드에서의 촬영은 어땠나.
=좋았다. 한 가지, 너무 멀다는 점만 빼면. 처음 뉴질랜드에 도착했을 때, 영국적인 어떤 것도 발견할 수 없어서 매우 고립된 느낌이었다. 아, 이건 긍정적 의미에서의 고립이다. (웃음) 환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촬영을 하면서도 마치 내가 휴양지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반지의 제왕>과 비교했을 때 소설 <호빗>에서의 간달프는 조금은 가벼운 캐릭터로 묘사된다. 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당신이 연기하는 간달프는 어떤가. 다소 가벼워졌나, 아니면 중간계에서는 차지하는 비중이 여전히 크기 때문에 무게감있게 그렸나.
=음… 매우 좋은 질문이다. (웃음) 간달프를 어떻게 연기할지가 정말 딜레마였다. 사실 <호빗> 속 간달프는 상황에 따라 가변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 이번 영화에서 그는 난쟁이 호빗족과 좀더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한다. 하지만 간달프가 유독 통제하기 어려운 ‘소린’이라는 캐릭터가 있는데 그와 함께할 때 간달프가 어떻게 변하는지 보는 것도 영화를 보는 한 재미가 될 것이다.
-영화를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이 있나.
=내 첫 질문은, ‘내가 이 영화를 보고 싶은가?’다. 만약 ‘아니’라면, 개런티가 아무리 높아도 출연하지 않는다. 다음 질문은, ‘이 역할이 나에게 충분히 어려운 것일까?’와 ‘내가 이 역할을 전에 해본 적이 있는가?’다. 나는 내가 전에 연기했던 비슷한 캐릭터는 연기하고 싶지 않다. 매번 나에게 자극이 되고 어려운 역할일 것. 그것이 내가 작품을 고르는 두 번째 기준이다.
13분 출연, 그러나 강렬하다
골룸 역의 앤디 서키스
앤디 서키스는 샐러드가 담긴 접시와 함께 간담회장에 들어섰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그는, 점심은 잘했냐는 인사와 함께 자리에 앉았다. 시종일관 호탕한 웃음을 보여주었던 서키스는 불행히도 인터뷰가 끝날 때까지 샐러드는 입에도 대지 못했다.
-<반지의 제왕>과 비교했을 때, 골룸의 비중이 다소 줄어 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분량만 놓고 본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이 골룸이라는 캐릭터를 가장 잘 설명한다고 생각한다. 골룸이 책 속에서 글로만 묘사됐던 것을 구체화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있다. 사실 골룸이 등장하는 장면은 전체 영화에서 13분 정도다. 내가 연출도 해야 했기 때문에, 골룸은 영화 초반에 한꺼번에 촬영했다. 이것 역시 내게는 새로운 경험이었다(앤디 서키스는 영화 <호빗> 연출에 일부 동참했다.-편집자).
-당신이 나온 장면 중 당신이 연출을 한 부분이 있나.
=없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골룸 분량을 초반에 한꺼번에 해서 내가 참여할 기회는 없었다. 내 촬영분을 마친 다음부터 배우에서 연출자로 역할이 바뀌었다.
-연출자로서, 피터 잭슨과의 작업은 어땠나.
=피터는 내가 연출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내가 좀더 대범하게 연출에 참여하기를 원했다. 필요한 순간에는 결단도 내리고, <호빗>을 위한 준비 촬영도 하라고 조언했다. 내가 촬영한 것들을 나만의 생각과 방식을 가지고 편집하라는 조언도 해주었다. 나에게 많은 자유를 주었는데, 처음에는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무척 즐거웠다.
-어렸을 때도 배우, 연출가가 꿈이었나.
=20대 초반까지 단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나는 화가나 그래픽디자이너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에 랑카스터대학에 입학했다. 만약 랑카스터대학의 연극학부가 훌륭하지 않았다면 나는 어쩌면 화가나 디자이너가 됐을지도 모른다. 1학년에 갓 입학한 나는, 연극과 미술의 연관관계를 찾으면서 연극계에 입문했다. 처음에는 연극 포스터를 디자인하고, 세트와 작은 소품들을 만들다가, 급기야 직접 연기를 하게 됐다. 첫 배역을 받고 연기를 했을 때 나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이것이야말로 앞으로 내가 할 일이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는데, 그때의 그 강렬했던 감동은 아직까지 잊혀지지가 않는다.
-배우와 연출자 중 당신의 심장을 더 떨리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음…. 하나만 딱 꼽기는 사실 어렵다. 연기야말로 나 자신을 표현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인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연출가가 되어 나만의 영상을 만드는 데 대한 기대와 환상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향후 몇년간은 아마도 연출쪽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추지 않을까 싶다.
톨킨의 팬, 어떤 배역이든 하고 싶었다
빌보 역의 마틴 프리먼
마틴 프리먼은 간담회장에 들어서자마자, 그곳에 모인 9명의 기자들과 일일이 눈을 맞추며 악수를 했다. 들고 온 와인잔에 와인을 따르면서도 그는 기자들을 한명 한명 쳐다보며, 사람 좋은 미소를 보였다.
-당신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호빗>은 규모나 인지도 면에서 매우 큰 영화다. 빌보 역 제안이 들어왔을 때 심정이 어땠나.
=톨킨의 소설을 좋아했기 때문에, 영화 <호빗> 속 어떤 배역이든 꼭 참여하고 싶었다. 정말 기뻤고, 자랑스러웠고, 내가 이 역할을 잘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여전히 이렇게 큰 영화에, 더군다나 <반지의 제왕>에는 참여하지 못했던 내가 빌보를 연기할 수 있게 된 건 정말 커다란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이 연기한 캐릭터들, <셜록 홈즈>의 왓슨 박사와 코미디 시리즈 <더 오피스>의 팀, 그리고 <호빗>의 빌보까지, 이들에게는 자아를 명확하게 규정하지 못한다는 묘한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음… 글쎄. 나는 모든 것이 확실한 배역보다는 불확실한 캐릭터가 더 매력있다. 사실 나는 예술 작품도 불확실성(Uncertainty)이 있는 것들을 좋아한다. 나이가 들수록, ‘확실한 무언가’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게 되는 것 같다. 확실한 것, 절대불변인 것들은 나에게도 그렇지만 점점 더 재미가 없어지고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면.
=골룸의 동굴에서의 첫 촬영장면은 잊을 수 없다. 내가 ‘반지’를 찾기 위해 골룸의 동굴에 가는데, 여기서 빌보와 골룸은 서로 수수께끼를 낸다. 이 장면은 소설에서도 정말 아름답게 쓰여졌고 영화에서도 매우 극적으로 표현됐다고 생각한다. 물론, 골룸을 연기한 앤디 서키스의 훌륭한 연기가 없었다면 힘들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