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그 사람’을 향한 복수극 <26년>
2012-11-28
글 : 강병진

영화 속 ‘그 사람’은 이런 이야기가 “지루하다”고 말한다. 80년 5월의 광주. 억울하게 죽은 수천명의 사람들이 있었고, 살해를 지시한 사람은 여전히 사죄하지 않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에 관한 이야기다. <26년>이 염원하는 관객은 바로 그때의 기억을 듣고 들었던 지루한 이야기로 치부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때의 광주를 이야기한 영화, 드라마, 소설들 가운데 실제적인 ‘복수’를 거론한 작품은 없었다. 강풀의 동명 웹툰을 영화화한 <26년>은 아직도 남아 있는 상처에 대한 위로가 아닌, 점점 커져가는 분노의 폭발에 관한 영화다. 실제의 그 사람이 아직도 건재한 현실에서 그를 향한 복수극은 지루할 수 없을 것이다.

<26년>은 파스텔 톤의 애니메이션으로 시작한다. <마당을 나온 암탉>의 오성윤 감독이 만든 이 애니메이션은 훗날 복수에 가담할 인물들의 비극적인 사연을 소개한다. 미진(한혜진)의 엄마는 딸의 이름을 짓다 창문을 뚫은 총알에 맞는다. 정혁(임슬옹)의 누나는 동생과 계엄군의 총구를 피해 달리다 죽고, 진배(진구)의 엄마는 남편의 시체 앞에서 혼절한다. 그리고 계엄군인 김갑세(이경영)는 도청 건물에서 불가피한 살해를 저지른다. 색감의 느낌과 다르게 머리를 관통한 총알이 뿜어내는 피와 배에서 터져나온 장기, 총과 구타에 짓이겨진 얼굴 등의 묘사가 전하는 충격은 강도가 높다. 20여년이 흐르고, 당시의 아이들은 여전히 그때의 상처와 함께 사는 중이다. 진배의 어머니는 TV에서 그 사람이 나올 때면 정신을 잃고, 미진의 아버지는 매일같이 술에 절어 있다. 경찰이 된 정혁은 그 사람의 외출을 위해 교통신호를 바꾸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 앞에 대기업 총수가 된 김갑세가 나타난다. 그는 그 사람에게 사죄를 요구하고, 사죄하지 않을 시 죽이겠다며 이 일에 동참할 것을 제안한다. 저마다 울분을 참고 살아온 세 남녀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영화화된 <26년>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장광이 연기한 ‘그 사람’이다. 반바지를 입고 땅콩을 까먹으며 외출을 하는 모습이나 발가락의 굳은살을 벗길 때의 표정 등은 그를 거대한 벽 자체로 묘사한 원작보다 훨씬 더 생생한 ‘그 사람’을 만들어냈다. 그의 추종자들이 각하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큰절을 하는 기이한 풍경도 단순히 이야기의 전개를 위한 묘사로 보이지 않는다. 저격의 목표가 더욱 구체화된 만큼 최후의 거사를 향해 숨가쁘게 달려가는 영화의 힘도 상당히 센 편이다. 원작에서 몇몇 캐릭터를 제외시키는 한편, 또 다른 사연을 덧입힌 각색도 효과적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제작된 강풀 원작의 영화들이 원작과 똑같거나(<바보> <순정만화>), 원작의 설정만 빌려온(<아파트>) 경우와 비교할 때, <26년>의 태도는 원작의 장점을 살리려 애썼던 <그대를 사랑합니다>나 <이웃사람>과 견주어볼 법하다.

하지만 관객을 추동시키는 <26년>의 힘이 과연 영화적인 완성도에 힘입은 것인지는 반문할 필요가 있다. <26년>의 인물들이 벌이는 팀플레이 속에서 그들끼리의 교감은 보이지 않는다. 작전을 전개시키는 데에 급급한 영화는 그들이 거사에 뛰어들고 한팀이 되어가는 시점을 소홀히 지나치고 있다. 강풀의 원작을 둘러싼 팬덤의 원천은 작품 자체의 에너지와 함께 실제의 그 사람이 아직도 과거의 일에 대해 뻔뻔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는 현실에 있었다. 그날로부터 32년이 지났고, 원작이 발표된 지 6년이 지난 지금도 그 사람은 마찬가지다. 여러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영화를 만들어냈다는 점은 높게 평가받아 마땅하지만, <26년>의 영화적인 에너지가 여전히 현실의 그 사람에게 크게 기대고 있다는 점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아픔에 공감하는 감정만큼 냉정한 전략도 필요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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