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관리가 안돼요.”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이하 <하이킥3>) 이후 8개월 만에 <음치클리닉>에서 고음불가 캐릭터로 돌아온 배우 박하선은 반복해서 말한다. 그런데 사실 ‘그냥 관리가 안되는’ 그녀의 표정이야말로 그녀의 가장 사랑스러운 순간들을 결정짓는 제1원소다. 10년 동안 짝사랑한 남자의 마음에 들고자 안되는 <꽃밭에서>를 부르고 또 불러보는 동주는 음이탈만큼이나 표정이탈에도 일인자다. 사랑 앞에서 쩔쩔매던 그녀가 돌아서 헤비급 박치기, 산낙지 주사(酒邪)에 온 얼굴을 내던질 때, 상대배우 윤상현의 말마따나 그 나이에 그녀처럼 “잘 내려놓는” 여배우가 어디 흔할까 싶다. 스튜디오에서 만난 그녀는 한결 차분한 모습이었지만, 보는 사람마저 긴장을 풀고 그녀의 표정을 좇아가게 만드는 소탈한 흡입력은 여전했다. 그 내려놓음이 가능하기까지 짧지 않은 우회로를 지나온 그녀가 자신 앞에 놓인 연기의 미로 속으로 다시 들어서려는 모습 또한 경쾌했다.
-올여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홍보대사로 만났었는데, 그사이 살이 많이 빠졌어요.
=밥맛이 없어져서요. <음치클리닉> 촬영 마치고 다음 작품 기다리면서 넉달 정도 쉬었는데, 제가 사실 쉬는 걸 잘 못해요. 두달 넘어가니까 잡생각이 너무 많아져서.
-<음치클리닉> 시사를 앞두고는 무슨 생각이 가장 많았어요.
=설레기도 했는데 걱정이 많이 됐어요. 이렇게 연기해본 게 처음이었거든요.
-이렇게, 라는 건.
=부러 준비를 많이 안 해갔어요. 첫 리딩 때는 너무 좋았는데 두 번째, 세 번째 갈수록 너무 안 좋아지더라고요. 기계적인 반복을 하면 안 좋아질 영화더라고요. 현장에서 같이 만들어가는 게 맞겠다 싶어서 콘티도 현장 가서 보고 그랬어요. 그래도 전체적인 그림은 리딩 때 열심히 해서 머릿속에 들어와 있으니까. 원래는 이만큼 준비해야 요만큼 나와서 되게 많이 준비해가는 스타일이에요.
-영화를 보고 나서 걱정이 좀 해소됐나요.
=드라마는 보면 감이 오는데, 영화는 정말 모르겠어요. 제가 코미디를 잘 모르기도 해요. <하이킥3> 하면서도 이거 진짜 재밌다 싶은 건 반응이 별로고 이게 재밌나 하면서 힘들게 찍은 건 반응이 막 오고. (웃음) <음치클리닉> 한 것도 코미디 장르를 좀더 경험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자신이 맡은 동주, 10년간 짝사랑해온 남자를 위해 <꽃밭에서>만 주야장천 연습하는 여자를 어떻게 생각하나요.
=무척 단순하고 바보 같은 친구잖아요. 그거 하나밖에 없으니까 거기 매달린 거죠. 근데 우리도 짝사랑할 때는 그런 바보가 되잖아요. 하지만 자신에 대한 일말의 자신감은 있으니까 그 노래를 고집할 수 있는 거죠. 그런 점이 저랑 비슷한 것 같아요. 나도 할 수 있는데, 이거 잘하면 나도 봐주겠지 하는 마음.
-평생 부를 <꽃밭에서>는 다 불렀겠어요.
=다신 안 불러, 막 이러면서…. (웃음)
-동주의 상태 변화를 계속 그 노래로 짚어줘야 하는데, 각 버전은 어떻게 만들었나요.
=그 부분은 감독님께 많이 기댔어요. 전체를 보는 분이니까. 개인적으로 못 부르는 부분은 쉬웠어요. 완급 조절만 하면 돼서 연습도 안 했어요. 연습할 수도 없는 거고. 대본에는 노래를 부른다, 라고만 돼 있으니까 애드리브로 채워넣은 부분도 많고요.
-영화를 보면 전체적으로 애드리브의 비율이 높았을 것 같은데, 정작 대사를 바꾼 부분은 거의 없었다고요.
=전 대사는 작가분의 글을 많이 따라요. 입맛에 맞게 바꾸다보면 매번 연기가 똑같아지는 것 같아요. 처음에는 발연기 소리 들을 수도 있겠지만, 드라마에서는 대본대로 가야 캐릭터가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대사 애드리브는 거의 안 해요. 이번에 많이 상의를 하긴 했는데 주로 신홍(윤상현)과 동주가 같이 연습하는 장면들이었어요. 지문에다 표정이나 감정의 살을 붙이는 정도.
-그런가 하면 자연스러운 연기를 위해 결혼식 축가에 늦어서 숨을 헐떡이며 부르는 장면에서는 실제로 1층에서 5층까지 뛰어올라오고, 주사 부리는 장면에서는 실제로 소주를 반병 정도 마셨다고 들었어요. <하이킥3> 때도 그랬지만 뭐든 몸으로 부딪치는 스타일 같아요.
=사실 그래야 하는 거잖아요. 뛰어온 신이잖아요. 그럼 뛰어와야 하고. 술 마신 신이잖아요. 그럼 술 취해 있어야 하고. 드라마에서는 시간이 촉박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냥 하는 경우가 많아요. 난 취했다 자기최면 걸면서. 다행히도 그게 잘되는 편이에요. (웃음) 근데 영화에서는 좀더 여유가 있으니까요. PT 체조로 대신 해보려고 했는데 제가 PT 체조를 좀 잘해요. 숨이 별로 안 차는 거예요. 어떡하지, 하다가 감독님께 밑에서부터 뛰어올라오고 싶은데 그래도 되냐고 물어봤더니 시간 충분하다고 갔다오라고 하시더라고요. 유난 떤다고 하지 않으시고 배려해주셔서 감사했어요.
-흔히 드라마 배우들이 지닌 ‘쪼’는 별로 없는 편인 것 같았어요.
=그럼 다행이에요. 제가 봤을 땐 조금 있었어요. 드라마 쪼는 아니더라도 ‘하이킥’ 쪼는 어쩔 수 없이 남아 있더라고요. 첫 장면 찍고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신경을 많이 썼는데 막상 보니까 저도 아차 싶은 부분이 있었어요.
-비슷한 캐릭터의 반복처럼 보일까봐 염려도 했겠어요.
=캐릭터는 확실히 달라요. 똑같이 애교를 부려도 박쌤은 남자들이 더 좋아할 캐릭터라면 동주는 여자들이 더 공감할 캐릭터예요. 사실 <하이킥3> 찍고 팬층이 지긋하신 아저씨들, 언니들에서 10대, 20대 남자들로 완전히 바뀌었는데, 동주는 여자분도 좋아해주시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요.
-박쌤과 동주는 어찌됐건 사랑을 받는 역할이지만 그전까지는 주로 힘든 사랑을 했어요.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이별>의 연수나 <챔프>의 윤희는 유부남이나 애 딸린 남자를 좋아했고, <영도다리>의 인화는 남자가 남기고 간 뱃속의 아이뿐이었죠. 지금 그녀들을 떠올려보면 어떤 마음이 드나요.
=글쎄요. 잘 돌아보지 않는 성격이에요. <하이킥3> 하면서 그간의 한을 풀었던 것 같아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들도 있어서 행복해요. 이제 불쌍하지 않아요. 짝사랑을 하다보면 자신감이 없어지잖아요. 연기도 그런 역할만 하다보면 자신감이 떨어져요. 근데 지금은 많이 충족된 상태예요. 내가 열심히 하면 내 캐릭터에게도 해뜰 날이 오는구나 싶기도 하고요.
-보통 학교에서 연기를 배울 때 자신을 컨트롤하는 법부터 배우잖아요. 근데 박쌤이나 동주로서의 박하선은 마치 그런 과정이 없었던 것처럼 전혀 통제를 안 한 연기를 보여줘요.
=전에는 컨트롤을 너무 했었어요. 머리로만 인형놀이를 한 거죠. 그래서 크게 연기 못한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지만, 절대로 실수하면 안된다는 생각에 갇혀 있었어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때 민규동 감독님도 그러셨어요. 나 이만큼 못한다고 보여주라고. 그래서 뭐, 이런 자세로.
-그 틀을 깨트리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동이> 때 지진희 선배님이 그러시는 거예요. 너 일밖에 안 했지. 계속 그러면 나중에 너무 흔들릴 거라고, 일단 다 제쳐두고 너부터 찾으라고 하셨는데, 비슷한 시기에 (류)덕환이도 저에게 예전의 자기를 보는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바른 사람이었는데 그게 답답한 걸 안대요. <챔프> 때 태현 오빠도 저보고 ‘너 술은 먹니, 놀러 좀 다녀라’라고 하시고. 저 스스로도 답답했던 시기여서 그런 말들에 많이 자극을 받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하이킥3> 시작하기 전에 한동안 신나게 놀면서 작은 것들부터 다 깼어요.
-어떤 것들인가요.
=진짜 사소한 것들이요. 엄청 많았어요. 엘리베이터 4층은 절대 누르지 말아야 하고, 횡단보도는 흰 선만 밟아야 하고, 문지방 밟으면 안되고, 국수 먹을 때 소리 내면 안되고…. (웃음) 집안이 보수적인 분위기여서 고등학생 때는 통금도 있었고요. 절 가두어놨던 것들을 하나씩 깨나가니까 너무 좋은 거예요. 쾌감도 있고.
-그런 쾌감을 연기에서 발견한 건 언젠가요.
=<바보> 때 처음 느껴보고 <동이> 때도 몇번 있었고 <하이킥3> 때 아주 많이 찾았어요. 착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는데 <바보> 하면서 화도 내봤어요. 굉장히 시원하더라고요. <동이> 때는 울컥해서 대사가 안 나오는 경험을 해봤고. 이 맛에 연기를 하는구나 싶었어요. <하이킥3>는 특히 초반 3개월 동안 희열을 느끼면서 했던 것 같아요.
-그런 희열을 가능케 하는 최선의 연기란 어떤 것이라 생각하나요.
=사실 연기라는 게 진심이 어디 있어요. 연기는 연기잖아요. 진심을 담아서 한다는 말 자체가 되게 아이러니한 거잖아요. 그래도 그 사람이 어떻게든 돼서 어떻게든 해보는 게 제일 좋은 답이라고 생각하면서 하고 있어요.
-차기작으로는 어떤 역할을 기다리고 있는지.
=그냥 조금이라도 다른 거요. 한동안 본능에 충실한 로맨틱코미디를 많이 했으니까 다시 정극도 하고 싶고, 목소리가 낮은 것 때문에 사극을 좋아해서 그쪽에서 악역 같은 게 들어와도 너무 좋을 것 같고요. 근데 그전에 제가 다른 것도 할 수 있다는 걸 어떤 식으로 보여드려야 할까 고민 중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