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전영객잔]
[신 전영객잔] 공존의 조건
2012-12-13
글 : 김영진 (영화평론가)
굴욕과 자존의 자리바꿈 드라마, <남영동1985>의 진정한 미덕

<남영동1985>는 이제까지 반기득권 편에서 나온 정치영화 가운데 가장 대중적이고 선동적인 영화다. 고 김근태 의원이 1985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겪은 고문에 기초한 이 영화는 매우 명시적인 방식으로 소재를 다룬다. 간단한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빼면 주인공 김종태(박원상)가 남영동 분실에서 고문당하는 과정이 영화의 내용 전부다. 명시적이며 동시에 미시적이다. 나는 이 단순한 구조의 영화가 내재한 드라마가 예상 밖으로 많은 겹을 갖고 있다는 것에 놀랐다. 여느 보통 관객과 마찬가지로 100여분 동안 주인공이 고문당하는 스토리에 불편한 죄의식을 예감했던 나는 영화가 재미있었다. 이게 누군가에게는 불경스러운 것으로 보일지라도 실제로 그랬다. 재미라는 표현이 부적절하다면 활력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전작 <부러진 화살>에서 굳이 숏간의 짜임새에 신경을 쓰지 않은 듯했던 정지영 감독의 연출감은 이 영화, <남영동1985>에선 훨씬 정교하게 느껴진다. 이 활력을 제대로 홍보하지 않고 현실정치의 맥락에서 우리 편에만 호소하는 전략을 씀으로써 <남영동1985>는 더 많은 관객을 모으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고 김근태의 이야기라는 걸 강조하고 독재자의 딸이 절대적으로 견고한 지지층을 거느리고 있는 대선국면의 현실정치 맥락 속에서 우리 편의 도덕적 정당성을 재확인하는 것에만 정치적으로 활용되는 한 이 영화가 정치영화로서 외연을 확대할 가능성은 더욱 작아진다.

‘악의 평범성’을 구현한 인물들

어차피 이 영화는 일방의 편에서 재현된 픽션이다. 고 김근태의 실화에 기초했다고 하더라도 이 실화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국민의 절반 가까이 있는 현실에선 더욱 그렇다. 정지영의 연출은 이 소재를 픽션화하면서 실존인물 이근안을 모델로 한 고문기술자 이두한(이경영)의 캐릭터를 축으로 한나 아렌트가 정의했던 ‘악의 평범성’을 구현한 형상을 여러 인물들에 뛰어나게 기입했다. 이두한은 외형적으로 정장만 고집하는 신사이고 아마도 한 집안의 충실한 가장인 것 같으며 국가에의 충성과 권력에의 충성을 동일시하는 난맥을 깨닫지 못한 채 성실하게 살아가는 공무원이다. 김종태가 이두한을 무서워하는 것은 그가 평범한 사람의 외피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김종태를 이두한은 정신병자나 극악 범죄자를 다루는 태도로 다룬다. 그는 그가 속한 세계에서 외형적으로 평범함과 정상성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인물이다.

다른 경찰공무원들이 김종태를 고문하면서 성과를 내지 못할 때 윗선의 연락을 받고 심문방에 온 이두한을 보여주는, 첫 그의 등장장면에서 그는 김종태에게 어떤 안도감을 준다. 그는 사무적이고 공식적인 말투와 행동으로 김종태가 받은 고문의 흔적을 추궁한다. 김종태가 실제로 고문을 당했다고 응석부리듯 항변할 때 이두한은 피식 웃으며 보다 전문적인 고문의 절차를 밟기 시작한다. 그가 고문을 행할 때 그는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의 말투와 행동이 아니라 공무를 집행하는 자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좀있으면 고환 아래 실핏줄이 터질 겁니다”라는 따위의 대사로 다른 동료 경찰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키는 그의 모습에서 전문가주의의 위엄이 느껴진다. 화면 속 동료들뿐만 아니라 관객에게도 느껴지는 이 일상적인 전문가주의가 김종태에게는 엄청난 공포이다. 그게 그의 삶에서 일상적인 행위의 부분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악을 집행하는 자가 자신이 저지르는 행동이 악행이라고 의식하지 않을 때 상대는 대적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낀다. 앨프리드 히치콕의 영화에서 살인이나 폭행을 예술처럼 치르는 악당들의 자기만족적 행위가 공포 효과를 배가시키듯이 이 영화에서 이두한의 행동은 완벽하게 일상적 절차의 둔감함 속에 묻혀 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의 행위의 일상성이 관객인 우리의 일상과는 완벽하게 유리돼 있기 때문에 우리는 위축된다. 영화가 전개될수록 그의 일상성과 우리의 일상성 사이에 쳐져 있던 경계선은 조금씩 희미해져 간다. 영화 속 한 장면에서 고문이 시작될 때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중계를 라디오로 듣고 싶어 하는 경찰관의 조심스런 제의를 흔쾌히 수락하면서 이두한은 말한다. “그럽시다. 나도 듣고 싶으니까.” 토요일 오후의 일상적인 공무처럼 수행되는 고문행위는 그들 경찰공무원의 업무영역에서 평범한 것이다. 그들이 그것을 유별나지 않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행위로 인식하는 것은 자기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두한은 자신을 애국자라고 생각한다. 한나 아렌트가 유대인 학살의 주범이었던 아돌프 아이히만을 관찰하며 정의내린 걸 참조해 따르자면, 이두한의 자기 확신은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하거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학습할 기회가 없었던 인간성의 바닥을 보여준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타인의 관점에서 생각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이 악행의 수행자는 정해진 매뉴얼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면서 자기 의지를 가질 필요도, 자기 스스로 판단할 필요도 없어진 인간이다. 이 가공할 무지는 전문가로서의 그의 기술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그는 남영동 대공분실의 협소한 공간에서 자신의 전문적 기술을 시연하는 데 익숙하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직업적 존재가치를 입증하는 데 쾌감을 느끼며 그에 따르는 명분의 축적을 확신으로 단단히 옭아맨 인간이다.

굴욕을 주는 자와 굴욕을 당하는 자의 위치역전

그렇지만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다르다. 특히 말단 형사들은 조금씩 강도가 높아지는 이두한의 고문 전개를 지켜보며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혼란을 느낀다. 이두한이 없을 때 말단 형사들이 김종태에게 베푸는 자그마한 시혜, 잠을 재운다든가, 먹을 걸 준다든가, 학식있는 김종태에게 인생상담을 청한다든가 하는 행위들은 그들이 김종태를 인간적으로 대함으로써 자신들의 죄책감을 덜어내려는 방어수단이다. 더 나아가 고문으로 몸이 너덜너덜해진 김종태를 폭행하면서 한 형사가 내뱉는, 너 그러다가 죽는다, 그러니 차라리 시키는 대로 자백하라는 말은 그들 말단 공무원들이 매뉴얼을 집행하면서 접수할 수 없었던 어떤 근원적 가치의 혼란에 대한 반응이다. 그들은 전문가의 자기기만에 만족하는 대신 거기에서 거리를 두고 떨어져나와 가급적 심리적으로 방관자적 위치를 잡음으로써 자신들을 보호하려 한다.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자신들의 위치에 굴욕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 굴욕감을 느끼는 당사자는 김종태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형사들 앞에서 몸을 발가벗기우고 수치심을 느낀다. 이 심리적 수치심은 그보다 더한 물리적 고통이 뒤따르면서 오래가지 않는다. 영화 중반, 고문을 이기지 못한 김종태가 고문도구인 칠성판에서 축 늘어질 때 카메라는 발가벗겨진 그의 나신과 그의 주변에 도열해 있는 형사들을 부감으로 잡는다. 국가권력의 시녀들에게 둘러싸여 육체적, 정신적으로 바닥을 드러낸 김종태의 벗은 몸이 표상하는 것은 굴욕이다. 처음에 형사들은 김종태의 굴욕을 목격하며 낄낄거린다. 대의명분의 추상적 가치를 웅변하던 김종태의 육체적 몰락은 김종태의 위선을 증거하는 것이고 이는 이들의 무의식에 숨어 있는 죄책감을 무마할 수 있는 것이다. 고문에 버티지 못할 유약한 몸으로 거대한 가치를 내세우는 김종태의 행동은 실천 불가능한 공약을 내세우는 정치가의 위선과 동일한 것처럼 비쳐진다.

김종태의 굴욕을 재확인하는 것은 자백이다. 김종태는 형사들이 요구하는 자백의 시나리오를 자기화해 끊임없이 고문당하는 과정에서 거듭 수정과 탈고, 퇴고를 거듭한다. 이런 과정의 맥락에서 보면 자백이라는 말은 논리적으로 하자가 없다. 형사들은 자신들이 요구하는 시나리오를 발설하지 않는다. 정해진 결말만 알려주고 고문 당사자에게 나머지 세부를 채우도록 한다. 복선과 개연성까지 계산하면서 고문을 당하는 사람은 계속 자백의 시나리오를 정교하게 짜맞춘다. 그들은 먼저 말하지 않는다. 당사자에게 직접 말하게 할 뿐이다. 이 과정에서 굴욕의 집대성이 이뤄진다. 고문받는 사람은 자신을 채우고 있던 명분과 가치를 몸과 마음에서 다 내몰아낸다. 자백과 부인이 거듭되고 모든 게 끝났다고 여겨지는 마지막 단계에서 항거할 한줌의 호흡도 남아 있을 것 같지 않았던 김종태가 경찰 고위 간부와의 최종 면담에서 다시 자신의 원래 신념을 재확인하자 고문기술자 이두한은 그때까지 정돈돼 있던 자신의 인격적 갑옷을 벗어던지고 이성을 잃는다. 이두한이 김종태를 사정없이 구타하고 자신의 구두를 핥으라고 명령하는 영화 후반부에서는, 그런데 놀랍게도 굴욕을 주는 자와 굴욕을 당하는 자의 위치역전이 일어난다. 김종태가 이두한이 시키는 대로 이두한의 구두를 개처럼 핥고 있는데도 관객 입장에서 굴욕감을 느끼는 당사자는 이두한으로 느껴진다. 그가 자신의 직업적 정체성을 위장하고 있던 매뉴얼대로 행동하지 않자 그의 앙상한 내면과 행동이 드러난다. 격식과 절차에 가려져 있던 그의 존재적 가치는 스스로 부정된다. 자신의 가치를 타인에게 어필하려는 자들의 싸움을 대공분실 고문 현장을 통해 보여주려던 이 영화의 정치적 외연은 등장인물들의 굴욕과 자존의 역전을 보여주면서 확장된다.

용서도 화해도 불가능한

김종태가 자신을 고문하는 경찰들과 그들의 뒤에 있는 독재권력의 메커니즘에 대드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설파하기 위해서다. 마찬가지로 김종태의 신념이 악의 축에 서 있다고 믿는 경찰간부들과 그들의 수하인 말단 경찰공무원들도 김종태에게 국가권력이 주입한 가치를 주입하려 애쓴다. 폭력적인 방식으로 주입되는 이 방식이 고문이다. 물리적으로 극한의 상태에 몰아넣는 이 고문은 때리는 자와 맞는 자의 몸의 교합을 통해 이뤄지는 강제적인 소통이다. 이 소통의 목적은 상대방의 가치를 빼앗고 박탈함으로써 스스로 부정하게 하는 것이다. 처음에 이두한이 지휘한 경찰권력의 하수인들은 김종태에게서 자존감과 확신을 빼앗는 것처럼 느꼈다. 실제로 김종태는 육체적 고통 속에서 일시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포기했다. 자신의 가치를 부정하면 폭력고문이 중단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몇 차례의 반복을 겪고 난 뒤에도 김종태는 끝내 자신의 가치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의 끈질긴 저항에 낙담한 이두한이 가장 손쉬운 방식으로 김종태를 고문할 때 그의 자존도 훼손된다. 권력은 우아하게 일상적 삶의 질감 속에 스며 있지 않으면 자신의 힘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때려도 때려도 말을 듣지 않는 아이 앞에서 거듭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처럼 이두한은 자신의 폭력이 궁극에는 강제적 소통에 실패할 것이라는 예감을 받는다. 이것은 두려움을 동반하는 것이고 자신에게 굴욕을 안겨주는 것이다.

영화의 후반부, 바뀐 정치지형 속에서 장관이 된 김종태가 이두한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면회하는 자리에서 용서를 빌면서 무릎을 꿇은 이두한을 보며 그 자리에서 걸어나올 때 이두한이 자신을 고문하기 직전 불던 휘파람 소리가 환청으로 들린다.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어떤 폭력의 전조로 사용되던 청각적 효과가 과거의 환청으로 재생되는 순간에 김종태는 고개를 돌려 이두한을 바라본다. 이두한은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시선을 돌리지 않고 있다. 그의 가련한 굴욕 앞에서 정지영은 주인공에게 가장 정직한 반응을 요구한다. 김종태는 카메라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눈을 부릅뜬다. 그의 두눈을 극대화해 잡은 이 마지막 숏은 <남영동1985>가 구조화한 굴욕과 자존의 자리바꿈 드라마의 핵심이다. 현재의 자존이 과거의 굴욕을 보상해주는 것은 아니다. 과거에 굴욕을 겪었고 다시 자존을 회복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과거의 굴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과거에 대한 용서와 화해의 무산으로 해석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용서해야 하고 화해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도 화해도 불가능하며 잊지 않고 살아가는 대신 함께 살아가는 것은 받아들인다는 것 정도로 해두자. 나는 이런 결말이 어떤 상투적 언사보다 감동적이었다. 굴욕은 굴욕이고 자존은 자존이며 자신의 가치를 타인에게 강요하는 폭력적 소통은 용인될 수 없다. 나는 이 영화가 구체적인 현실정치의 맥락에 개입하려는 영화 외적 열망만큼이나 내재된 이 솔직한 발화에 반응한다. 용서, 화해, 관용, 통합 등의 수사보다 중요한 것은 솔직함이다. 다른 것을 다른 것으로 직시하고 서로 섞이지 않는 것을 섞이지 않는 상태로 견뎌낼 때 우리는 진화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것이 정치영화 <남영동1985>의 진정한 가치이자 힘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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