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삶, 사랑, 그리고 원주율 <어느날, 사랑이 걸어왔다>
2012-12-12
글 : 김효선 (영화평론가)

재즈뮤지션 샘(루퍼트 프렌드)은 세상을 떠난 아내 조세핀(사라 웨인 콜리스)을 잊지 못해 모텔에서 폐인처럼 살아간다. 어느 날 낯선 여자(클레멘스 포시)가 갑자기 샘의 방 화장실로 뛰어들어오고, 샘은 여자의 요청에 응해 노래를 불러준다. 여러 날 동안 화장실 문을 사이에 두고 숨바꼭질하던 두 남녀는 얼굴도 모르는 상대에게 야릇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다. 여자의 이름은 ‘파이’다. 원주율을 가리키는 그 수학기호가 맞다. 샘의 노래 가사를 빌리자면, 시작은 알아도 끝은 모르는, 그저 다음 숫자에 대한 설렘으로 이어질 뿐인 원주율은 두 사람의 느닷없는 인연을 의미하기도, 변화무쌍한 삶 자체에 대한 비유가 되기도 한다.

삶, 사랑, 그리고 원주율에 내재된 즉흥적 성격은 <어느날, 사랑이 걸어왔다>를 채우고 있는 재즈음악의 속성이기도 하다. 샘이 선보이는 즉흥연주는 불규칙한 리듬으로 포개진 영화 속 이미지들과 조응하며 몽환적이고 로맨틱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영화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재즈의 정신이 진지하게 언급되는 것에 비해 정작 영화가 흑인음악과 재즈뮤지션의 열정을 그려내는 방식은 피상적인 수준에 머문다. 주연배우들의 연기도 감정을 밀도있게 담아낸다기보다 그것을 흉내내는 듯한 인상을 남기는데, 이 때문에 이들의 감정으로부터 자꾸만 거리를 두게 된다. 샘과 파이의 가교 역할을 하는 사나이 조지(포레스트 휘태커)의 존재감도,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괴로워하는 젊은 친구 윌리엄(맷 워드)의 고민도 중심 플롯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지 못한다. 충만한 감성이 가벼운 감상에 머물지 않도록 영화는 주변 갈등을 포섭하며 주제를 확장시키지만, 이를 제대로 조율하지 못해 오히려 이야기가 장황해진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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