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7월에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을 계기로 프랑스의 영화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의 평자들 몇명이 모여 했던 발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트래블링 숏은 도덕의 문제다”라고 한 장 뤽 고다르의 발언이었다. 미학의 기술은 도덕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말이므로 경청해야겠지만, 적어도 레네의 영화에 관해서라면 나는 이 말의 유효기간이 훨씬 오래전에 지났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반문은 간단하다. 레네의 영화 <마음>과 <잡초>와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의 트래블링 숏은 전적으로 도덕의 문제인가. <히로시마 내 사랑>에서 전쟁 이후의 사회정치적 양심과 모더니티의 도래를 읽어낸 고다르로서는 그 어떤 긴급함과 중요도라는 측면에서 그러한 선언적 발언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레네에게 트래블링 숏은 혹은 그것을 포함한 레네의 미학은 도덕의 강령보다는 다른 것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싶다.
같은 자리에 있었던 자크 리베트가 실은 훨씬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부분을 짚었다. 고다르가 <히로시마 내 사랑>이 영화사적으로 어떠한 영화적 참조물도 지니지 않았다며 그 영화의 참조물로 문학의 포크너와 음악의 스트라빈스키를 거론했을 때 리베트는 나서서 이 영화가 에이젠슈테인의 영화를 상기시킨다는 사실을 지적해낸다. 몇 사람의 대화가 오간 뒤에 에릭 로메르에 의해 레네는 큐비스트다, 정도로 정리되는 분위기가 되었지만, 실은 나는 그 좌담 이후로 공히 인정된 큐비스트로서의 레네의 자리보다는 리베트가 제기한 에이젠슈테인과 레네의 관계에 더 끌린다. 물론 리베트가 레네를 에이젠슈테인과 연결지었을 때는 그의 말 그대로 세계를 파편화해서 인식하는 레네의 영화적 태도를 염두에 두었던 것이리라. 하지만 이 문제는 좀 다르게 볼 여지가 있다.
이렇게 우회해볼 수 있다. 에이젠슈테인은 그의 영화적 원대함과는 무관하게 결국 그 자신이 하고 싶었던 것을 최종적으로 해내지 못한 위대한 실패자의 모델인데, 에이젠슈테인이 최종적으로 하고 싶어 했으나 끝내 이루지 못한 것 중 한 가지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영화-논문’이라는 부제를 달고 영화로 만드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제임스 조이스의 의식의 흐름이라는 기법의 내적 언어를 영화의 언어로 옮기는 것이었다. 그는 전자의 프로젝트를 ‘지적 영화’라고 불렀고 후자의 프로젝트를 ‘내적 독백’이라는 용어로 설명했다. 지적 영화와 내적 독백, 둘의 차이는 이렇게도 요약된다. “지적 영화가 관객의 사유과정을 유도하는 데 초점을 둔다면, 내적 독백은 인간의 사유과정을 영화 속에 직접 구현하려는 것이다,”(<영화에서의 몽타주 이론>, 김용수 지음) 말하자면 지적 영화는 관객의 사유를 자극하는 걸 목표로 하는 영화이고, 내적 독백의 영화는 영화 스스로 사유의 작동 과정을 드러내 보이는 걸 목표로 하는 영화다. 내 생각에 레네의 영화가 에이젠슈테인과 관련이 있다면 그건 그의 영화가 내적 독백의 영화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당신은…>의 흥취에 젖어 있는 당신에게 영화 이론적 배경을 주입하고자 이상의 내용을 소개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건 이론의 영역이 아니라 <당신은…>을 본 우리가 가져야 할 최소한의 질문의 실마리에 해당한다. 결국 내가 여기에서 하고 싶은 질문도 레네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영화 <당신은…>이 우리를 어떻게 감탄시키는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프랑스의 미학자이자 평론가인 유세프 이샤그프루가 “레네는 리얼리티 재현을 위한 도구로서가 아니라 마음의 작동에 접근하는 최고의 수단으로서 시네마를 생각한다”라고 말했을 때 나는 그 말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레네의 영화가 특별한 건, 그의 영화가 우리에게 어떤 사유를 불러일으킨다는 점 이전에, 이미 그의 영화가 사유의 혹은 정신의 혹은 마음의 작동임을 우리에게 보여준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레네 영화의 <당신은…>의 감동의 요체가 거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당신의 마음으로 말할 때
물론 레네가 갑작스럽게 내적 독백의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그의 영화 <프로비던스>를 떠올리면 된다. 어느 밤 점점 더 술에 취해가는 노년의 소설가는 자기의 아들과 며느리와 죽은 아내를 등장시켜 소설 한편을 구상해내는데 그의 구상이 고스란히 영화의 내용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술에 취해가니 내용은 엉터리이고 생각과 마음은 번잡스러운 요지경이다. <프로비던스>는 그 소설가의 생각과 마음을 한편의 영화로 만드는 프로젝트를 실행해낸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당신은…>은 정서상으로는 <마음>이나 <잡초>와 연관되어 있지만 머릿속의 내용이 영상으로 치환되고 그것이 작동되는 방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프로비던스>와도 연관이 깊다. 하지만 레네는 마음의 작동이라는 문제를 <프로비던스>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당신은…>에서 우아하게 확장해낸다.
레네는 우선 복수의 점‘들’을 생성해낸다. 단순 나열로 보이는 이 영화의 첫 장면이 중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앙투완 당탁의 죽음을 그와 함께 일하는 배우들에게 알리고 그들을 앙투완의 저택으로 초대하는 장면인데, 이때 ‘미셸 피콜리씨? 피에르 아르디티씨? 안느 콩시니씨? 마티외 아말릭씨? 사빈느 아젬마씨?’라고 인물들의 이름이 하나씩 차례대로 불릴 때 그걸 단지 호명으로만 보기 어렵다. 나는 이 장면에서 마치 그들이 한명씩 그 호명에 의하여 다시 태어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유령들이 태어난다고 해도 괜찮다. 그들이 사람이건 유령으로 보이건 간에 무엇인가로 호명되어 저 구역에서 이 구역으로 불려나와 생성되는 여러 개의 점들이라는 건 변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때 그들의 얼굴을 잡은 클로즈업은 말 그대로 생성의 ‘방점’처럼 보인다. 그 점들(인물들)이 차례대로 불려나와 나란히 하나의 선을 이루는 영화도입부의 이 순간은 이 영화의 전제 조건이다. 때문에 나는 이 첫 장면에 감흥을 갖게 되는가 아닌가에 따라 이미 이 영화에 대한 공감대가 결정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점’이라고 불렀지만 그 점들은 서로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짝패들이다. 여기 그리고 저기, 이것 그리고 저것, 이 사람 그리고 저 사람. 혹은 여기와 저기 사이, 이것과 저것 사이, 이 사람과 저 사람 사이. 그러니까 그 유명한 ‘그리고’와 ‘사이’의 개념은 계열을 총망라하여 온통 <당신은…>을 뒤덮고 있다. 생각나는 대로 몇 개의 짝패 혹은 극점을 말해보자면, 영화와 연극, 스크린과 무대, 에우리디케와 오르페우스, 나이든 세대와 젊은 세대, 현재와 과거, 앙투완과 배우들, 이승과 저승, 레네의 영화와 포달리데스의 영화 등으로 그 분화가 끝이 없다. 이걸 층위, 계, 구역, 차원, 지대 혹은 그 무엇으로 부르건 간에 그것들의 접속과 확장은 거듭하여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세계의 장력을 팽팽한 상태로 이룬다.
레네는 이 장력을 조금씩 넓히고 강화한다. 어떻게 강화하는가. 먼저 배우들은 저 영상 속의 대사를 자기의 기억에 의존하여 읊기 시작한다. 한 배우가 그렇게 하면 이제는 그와 연기했던 다른 배역이 그 배우의 대사에 입을 맞추기 시작한다. 그러면 이제 배우들이 애초에 앉았던 자리는 뒤바뀐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공간은 심리에 의해서 결정된다. 때문에 애초에 배우들이 응접실에 앉았던 자리가 고수되는 건 막과 막 사이의 휴지기나 혹은 13명의 배우에 속하지 않는 집사를 걸고 이 응접실을 보여줄 때뿐이다. 응접실에 앉았던 배우들은 서로서로 등을 돌리고 이제 시선을 맞춰 대화를 시작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 대화는 영상 속의 인물들과도 시선을 맞추면서 이어진다. 그러다 이제는 별도의 장소로까지 확장되기도 한다. 그 확장된 별도의 장소가 등장하기 시작하면, 장 아누이의 희곡을 거친 레네식의 에우리디케와 오르페우스의 이야기는 본 궤도에 오른 것이며 피에르 아르디티-사빈느 아젬마, 랑베르 윌슨-안느 콩시니의 짝으로 나뉘어 수시로 역할 분담하며 전개된다.
이 무수한 변곡들을 지휘하는 것이 오로지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즉 배우들의 마음이 지금 저 눈앞의 장면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프로비던스>에서는 오로지 한명의 화자가 자기의 소설 속 인물을 상상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지만 <당신은…>에서는 여러 명의 배우가 저 앞에 상영 중인 영상을 보며 각자의 마음을 현현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건 이 사람의 마음의 진술이기도 하고 저 사람의 마음의 진술이기도 해서 누구에게는 주관적인 순간일 때 누구에게는 객관적인 것이고 혹은 그 반대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에서 나와 타자의 구분은 거의 무화된다. 지금은 비록 13명의 내적 독백의 콜라주이지만 이 방식은 레네의 영화가 한없이 더 무리수적인 세계를 만들 수 있음을 예감케 한다. 그간에 알랭 레네 영화의 힘으로 밝혀진 작동 요소들은 하여간에 여기서 모조리 작동한다. 그리하여 영화는 말 그대로 기원에 닿아 우주적 확장을 시도한다. 한 사람의 마음의 내적 독백으로부터 시작되어 여러 사람을 거친 뒤에 그들 모두의 목소리를 담게 되는 주관적이며 객관적인 자유간접화법이 가능해지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것이 이 영화를 집단적 최면 내지는 집단적 명상의 상태라고 느끼게 되는 이유다. 이로써 <당신은…>은 다중적 내적 독백인 동시에 자유간접화법이라는 보기 드문 성취를 이뤄낸다.
육체의 주름이 결단코 빚어낸 기적
하지만 <당신은…>의 내적 독백으로서의 자유간접화법이 이 영화의 아름다움의 전부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혹은 이건 이미 레네가 해왔던 것의 근사한 종합일 것이다. 물론 이것 자체로도 위대하기는 하지만 이 영화에는 어떤 진솔한 것이 있어서 더 놀랍다. 가령 과정이 곧 전체가 되려는 영화들이 흔히 잃는 것은 감정이라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레네조차도 그랬던 것 같다. 사유의 과정으로 영화 전체를 만들려고 했던 <지난해 마리엥바드에서>를 후대의 관객으로서 보고 난 다음 개인적으로 그다지 환희에 젖지 못했던 이유가 그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당신은…>을 보면서는 놀라울 정도로 감정이 고양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는데, 도대체 이 감정을 보정해줄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이것이 레네 영화의 말년성과 어떤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아도르노에게 빌려와 쓰는 모호한 개념인 말년성. “말년성은 종국에 접어드는 것, 의식이 깨어 있고 기억으로 넘치는 것, 그러면서도 현재를 대단히 예민하게 (심지어 초자연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라는 설명이 있지만, 이 모호한 개념의 실체를 어디까지 신뢰해야 할지 나는 사실 좀 의심스럽다. 실은 그 개념의 정확도보다는 그런 모호한 말을 통해서라도 품고자 하는 인생사의 어떤 필연성에 대한 간절함이 느껴져서 이 말을 아낀다. 그러니까 말년성에 대한 개념적 동의가 어렵다 해도 말년성이 우리 인생사에 드리워진다는 그 필연성을 거부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레네의 말년성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나는 (<마음>과 <잡초>를 넘어) <당신은…>을 꼽고 싶어진다.
레네의 말년성은 세속적 감정과 늙은 육체의 현존을 인정하는 데 있어 보인다. 보통의 창작자가 이 두 가지를 인정하는 것은 흔한 일이며 이걸 인정할 때는 상투가 된다. 하지만 레네의 영화에서 이 두 가지는 오히려 크나큰 예술적 결단이다. 비교적 평탄한 영화적 구조를 취하고서라도 <마음>과 <잡초>에서 성취되었던 것이 바로 이 세속적 감정과 늙은 육체의 현존을 두고 벌어지는 상상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당신은…>에서 그것들은 복잡한 구조 안에서도 자기자리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당신은…>을 두고 액자식 구성의 영화라는 말로 단순 구획해서는 안될 것 같다. 그 말은 이 영화의 활발한 무리수적 운동성을 저해하기 때문에 피해야 할 용어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가 형식적 화려함을 넘어서 갖추고 있는 또 다른 자연사적 간절함을 훼손할 염려가 있기 때문에 또한 피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알고 있다. 1기(피에르 아르디티-사빈느 아젬마), 2기(랑베르 윌슨-안느 콩시니), 3기(영상물 속의 두 남녀)의 에우리디케-오르페우스가 나이대별로 나뉘어져 있고, 그들이 전부 다른 사람들이므로 이 삼항의 기수들이 서로 상호작용을 일으켜 만들어내는 영화적 합창이 이 영화의 결을 풍부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슴을 치는 특기할 만한 장면 하나가 우리를 불러세운다. 영화의 후반부 피에르 아르디티와 사빈느 아젬마가 연기하는 8분간의 롱테이크 장면이다. 레네는 이 장면을 예의 분화된 형태로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가장 나이든 기수인 그들, 피에르 아르디티와 사빈느 아젬마의 연기에 이 장면을 온전히 맡긴다. 이때에 질문은 원초적이다. 왜 이 장면은 분화하지 않는가, 왜 이 장면은 다른 기수들의 배우들과 함께 나뉘고 상상되지 않는가. 여기엔 단순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태도가 있는 것 같다. 레네는 가장 나이든 세대에 이 사랑 이야기의 고전의 클라이맥스를 맡기고 있다. 그들의 현존을 그 순간 받아들이고 그 묘한 불일치를 응시한다. 동시에 이때 그들의 클라이맥스가 어떤 내용인지도 한편으로는 중요하다. 고전 설화에서 오르페우스가 지하세계와의 약속을 어기고 끝내 에우리디케를 뒤돌아보게 되었던 이유는 그녀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보고 싶어서였다. 오로지 애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피에르 아르디티가 사빈느 아젬마를 끝내 뒤돌아보는 이유는 이 순간에조차 그들 사이에 낀 세속적 의심과 두려움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이것이 늙어서 현명해진 현자의 결단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 관한 나의 감탄은 그러므로 비유컨대 두개의 주름의 양상에 대한 감탄이다. 그 둘은 서로 다른 양상이다. 첫 번째는 뇌의 주름이다. 이 주름은 접히고 펼치고 다시 접히기를 반복하는 익히 알려진 레네 영화의 신기에 가까운 주름이다. 그 주름들이 내적 독백이고 자유간접화법이고 무리수적 잠재태의 세계를 만든다. 하지만 두 번째 주름, 레네의 말년성이 만들어낸, 특히 이 영화에 새겨진 주름은 육체의 주름이다. 육체의 주름은 레네 영화에서 유독 근래에 깊어진 말년성의 주름이며 무수히 접고 펼치기가 가능한 영화 형식적 주름이 아니라 그냥 저 배우의 육체에 새겨지고 쌓인 말 그대로 쭈글쭈글한 인생의 켜다. 레네는 현대영화의 거장으로 칭송받았는데 그때 그에 대한 칭송은 뇌의 주름을 그가 현묘하게 다루었기 때문이다. 그 뇌의 주름으로 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에 이르러서는 외롭고 늙은 육체 한쌍, 그러니까 변할 수 없는 주름의 종류로도 마음을 보여준다.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가지 주름, 그러니까 전자는 이것과 저것 사이의 거대한 벡터를 그리고 무한히 나아가고, 후자는 그 팽창 속에서 언뜻언뜻 거기 서서 새겨짐으로써 자연사의 흔적을 부둥켜 끌어안는다. 그렇게 이 한편의 기적같은 영화가 만들어진다.
시는 사랑 ‘할 때’ 쓰여진다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라는 제목은 내 생각에 역설이다. 제목과는 무관하게도 우리는 이 영화에서 많은 것을 보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가치는 마음의 작동을 끝내 눈에 보이게 하는 것에 있다. 마음의 작동을 물질적으로 보여주는 데 성공한 영화다. 그래서인지 이상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나는 이 영화를 보며 이런 시구 하나를 떠올린다.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고등학생들도 배우는 널리 알려진 시이며 이 첫 문장은 너무 평범해 보인다. 별다른 시적 수사도 없다. 하지만 나는 이 문장의 견고한 아름다움을 거의 절대적으로 신봉한다.
나는 이 문장의 극진한 아름다움이 다름 아니라 “사랑해서”라는 말에 있다고 믿고 있으며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랑’이 아니라 ‘해서’에 있다고 믿고 있다. 나타샤를 사랑‘하는’ 오늘밤 눈이 나리는 것이 아니고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 눈이 나린다. 그러니 그 눈은 풍경의 눈도 비유의 눈도 아닌 마음이 작동하여 물질로 화한 눈이다. 내가 나타샤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저기 저 눈이라는 물질은 오늘밤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마음이 먼저이고 물질이 나중이라는 철학적 관념론의 우위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물질로 화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예술의 위대한 터치를 말하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짧은 시구가 내가 한 백마디 말보다 이 영화에 관한 더 뛰어난 설명이 될 것이다. 더도 덜도 아니고 레네가 <당신은…>으로 해낸 위대함이란 바로 그 시의 위대함과 동질의 것이리라. 그렇게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