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익숙한 이야기 속의 떨림 <반창꼬>
2012-12-19
글 : 이영진

소방관 강일(고수)은 3년 전 아내의 죽음에서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강일이 다른 사람을 구조하던 도중 만삭이던 강일의 아내는 비명 속에 죽어갔다. 시간이 흘렀지만 강일의 죄책감은 조금도 줄지 않는다. 흉부외과 의사인 미수(한효주)는 응급실에 실려온 환자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돌려보냈다가 의료사고에 휘말린다. 미수는 자신의 책임을 면하기 위해 병원에서 환자의 남편이 휘두른 칼에 맞은 강일에게 맞고소를 제안한다. 그러나 강일은 미수를 양아치 취급하고 돌아선다. 어떻게든 강일의 마음을 되돌려야 하는 미수는 급기야 강일이 일하는 119 구조대 의용대원으로 지원한다.

전반부는 영락없는 로맨틱코미디다. 미수가 벌이는 갖가지 소동들은 <엽기적인 그녀>의 만행 못지않다. 미수는 강일의 관심을 끌기 위해 대교 위 난간에 올라 자살 시위를 벌이고, 술에 취해 경찰서에서 난입(?)해 주먹까지 휘두른다. 헤헤거리면서 연일 사고치는 미수와 뒤얽히면서 강일은 냉동고에 갇혀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아니, 모든 것을 다 가진 저 여자는 왜 나처럼 보잘것없는 놈을 좋아하는 것일까.’ 강일만 헷갈리는 건 아니다. 미수가 왜 강일에게 접근하는지 알고 있다 해도 마찬가지다. 좌충우돌하는 미수의 꽁무니를 뒤쫓다보면 과연 그녀가 언제부터 강일을 진실로 마음에 두고 있었는지 구분하기 어렵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악다구니 전쟁을 벌이던 억세고 철없는 모녀를 기억하는가. <반창꼬>에서 정기훈 감독의 데뷔작 <애자>의 구도를 떠올리는 건 자연스럽다. <애자>가 끊어낼 수 없는 혈연으로 인물간의 갈등을 꿰맸다면, <반창꼬>는 매일 생사의 갈림길을 지켜봐야만 하는 소방수와 의사라는 직업으로 강일과 미수를 한데 묶는다. 무뚝뚝한 강일이 제멋대로인 미수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어 보이는 과정은 아내의 죽음에 단단히 붙들린 강일의 삶과 환자의 죽음을 어떻게든 회피하고픈 미수의 삶이 서서히 자리바꿈하는 순간의 연속이다. 두 남녀의 옥신각신에만 치중했다면, 미수가 굳이 구조대원으로 변신해야만 했을까 하는 의문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재난의 상황 안에 두 남녀의 사랑을 던져넣는 익숙한 드라마를 따랐지만, 그렇다고 <반창꼬>가 정해진 궤도를 고스란히 되밟으면서 자족하는 건 아니다. 새로울 것 없는 스토리라인에 떨림과 울림을 가하는 건, <애자>의 최강희와 김영애가 그러했듯이, 배우들이 주고받는 감정의 반향들이다. 무조건 앞으로 나아가려는 미수와 한없이 뒷걸음치는 강일의 부딪침이야말로 <반창꼬>의 동력이다. 다만, 사건들의 연쇄 속에서 연이어 등장하는 죽음의 의미들을 조금만 더 신경 써서 부각시켰다면 두 인물이 품고 있는 감정이 더욱 증폭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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