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과연 당신은 믿을 수 있나? <라이프 오브 파이>
2013-01-02
글 : 이화정

리안 감독은 장구한 필치의 소유자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에니스(히스 레저)와 잭(제이크 질렌홀)이 간직한 사랑의 아픔을 표현하는 데는, 만년설로 뒤덮인 산과 푸른 초원이라는 방대한 자연이 전제된다. 에니스의 옷가지와 창 너머 펼쳐진 설원의 한 장면이 주는 먹먹함을 얻기까지 그는 멀고 먼 길을 돌아온다. <와호장룡>의 리무바이(주윤발)와 용(장쯔이)의 대나무숲 결투장면도 다르지 않다. 대나무숲을 가르는 검과 검의 화음, 둘 사이의 대결은 아슬아슬한 와이어 액션 신의 신기를 통해 한올 한올 수놓듯 전개된다. 대자연과 어우러진 이 장중한 화면은 결국 리무바이와 용의 내면 깊숙이 침투하는 데 성공한다.

무려 227일간의 인도 소년 표류기인 얀 마텔의 소설 <파이 이야기>를 영화화한 <라이프 오브 파이>는 그가 전작에서 고수한 이 필치에서 한치 벗어나지 않는 이야기다. 끝이 보이지 않는 태평양과 낡은 구조선, 고작 열여섯살에 졸지에 고아가 된 인도 소년 파이(수라즈 샤르마), 동물원에서 나온 벵골 호랑이 한 마리가 전부. 126분의 러닝타임 중 파이가 인도를 떠나기 전과 구조된 뒤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을 제외한 9할은 파이의 가족이 정부 지원이 끊긴 폰디체리의 동물원 운영을 접고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는 배에 탑승한 뒤의 기록이다. 가족 중 유일한 생존자인 파이와 난파선에 함께 탑승한 호랑이가 겪는 바다에서의 생존기, 즉 그의 기억에 의존한 회상이다. 파이가 추억하는 호랑이 리처드 파커는 함께 겪은 사투만큼 우정이 켜켜이 쌓이는 ‘디즈니식’ 휴먼스토리의 주인공이 아니다. 소년과 호랑이의 눈빛 교환은 시종 이루어지지만, 그 진의를 파악하는 건 당사자에게조차 마지막까지 불가능에 가깝다. 참으로 냉정한 시선이다. 결국 단출한 재료들이 말하는 건 극한의 상황에 몰린 한 인간을 통해 본 신에 대한 믿음과 철학, 삶의 가치 같은 것들이고, 파이와 눈맞춤을 하는 리처드 파커 역시 그걸 투영하는 거대한 자연의 일부에 편입된다. 일찍이 700만부의 판매고를 올리며 스테디셀러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다해낸 원작의 후광이 있다지만, 이런 재료는 영화라는 시각적 수혜를 입기에는 지극히 문학적이다.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

리안 감독에게는 아마 이 지점을 표현하는 것이 도전의 핵심이 아니었나 싶다. 소년과 호랑이라는 심심한 재료만으로 도전하기엔 어느 모로 보나 무모하다 싶지만, 그가 택한 방법은 제작비 1억2천만달러가 소요된 비주얼의 첨예, 3D였다. 그로 말하자면 <헐크>(2003)를 통해 블록버스터의 틀을 빌려왔을 때조차, 블록버스터의 히어로와는 전혀 다른 자신의 세계관을 투영했던 전적의 소유자다. 거대한 수조와 블루 스크린을 활용한 제작방식은 기존 3D 블록버스터영화와 다르지 않지만, 결과는 지금껏 본 3D의 사전적 정의에서 다분히 벗어난다. 가령 입이 떡 벌어질 만큼 황홀한 영화장면들, 밤바다를 환히 밝힌 해파리떼의 푸른빛과 미어캣떼의 기괴한 군집은 단순히 엄청난 볼거리로 기능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바로 생과 사를 오가는 사투, 신의 존재를 갈구했던 한 소년을 통한 믿음의 문제를 건드리는 지점이다. 원작의 황홀경을 스크린에 기어코 재현해낸 리안 감독은 이 위대한 전시를 과시할 수 있는 절정의 순간, 불쑥 관객을 향해 질문을 던진다. ‘과연 이 엄청난 광경을 당신은 온전히, 한치의 의심없이 믿을 수 있나?’라고. 심상을 꿰뚫는 비주얼이다. 단언컨대 <라이프 오브 파이>는 지금껏 본 가장 입체적인 3D 활용의 예다. 덧붙이자면 파이를 연기한 수라즈 샤르마는 이전까지 연기 경험이 전무한 소년이다. 표류의 과정, 까맣게 타고 말라가는 그의 육체적 고통, 점점 깊이를 더해가는 눈빛 연기가 이 사투에 믿음을 더한다는 건 두말할 나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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