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와의 인터뷰는 촬영이 진행되는 스튜디오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그의 이름을 입력하고, 시나리오를 읽거나 영화를 미리 보고 감상을 끼적이는 모든 순간들로부터 만남은 시작된다. 비슷한 매뉴얼로 김래원과의 인터뷰를 시작하다가 잠시 멈칫했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더라? 당장 떠오르는 건 지난 2011년 연말 종영한 드라마 <천일의 약속>의 비운의 남자주인공 지형인데 그마저도 1년 전이다. 각종 예능 프로그램이 스타의 매력을 부각시키는 새로운 창구가 된 지금, 1년의 공백은 마치 영겁처럼 느껴진다. 물론 그 시간 동안 김래원은 <마이 리틀 히어로>를 촬영하고 있었다. 서바이벌 오디션에 참가해 인생 한방을 노리는 삼류 음악감독으로 분해, 머지않아 한국의 ‘빌리 엘리어트’라 불릴 초짜 아역배우를 다독이면서. 그러나 영화의 촬영이 끝난 뒤에도 그는 섣불리 자신을 내세우거나 포장하려 들지 않았다. 음악을 듣고, 책을 보고, 친구들과 만나고, 맛있는 음식점을 찾아다니는 보통 사람의 호사를 누리다 체중이 늘어났다며 “외면보다 내면의 매력을 보여주려고 했는데, 욕만 많이 먹고 있다”고 투덜거리기도 한다. 그런 그의 태도는 유행에 민감하며 주목받기 위해 원치 않는 컨셉마저 잡아야 하는 최근의 연예계 트렌드와 멀리 떨어져 있다. 요즘 시대에는 찾기 힘들어진 그 여유와 자연스러움이 오히려 지금의 김래원을 주목하게 하는 요인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천일의 약속>으로 30대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으며 <마이 리틀 히어로>를 통해 30대의 첫 영화에 도전하는 배우 김래원의 현재를 이루고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 예능에서 쉽게 볼 수 없기에 더더욱 궁금한, 그의 속마음을 들여다보았다.
<천일의 약속>
솔직히 말하면 작품 자체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고 디테일도 훌륭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냥 따라가게 되는 부분이 있었다. 배우로서 내가 뭔가를 발휘할 수 있는 부분이 없다는 느낌? 연출자와 배우는 함께 하는 파트너여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천일의 약속>에선 그런 점이 부족했던 게 좀 힘들었다.
<마이 리틀 히어로>
<천일의 약속>이 끝나갈 무렵 몇편의 시나리오를 검토했다. 그중 <마이 리틀 히어로>를 선택한 건 시나리오를 봤을 때 굉장히 따뜻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가볍지 않은 웃음과 감동을 받았고, 그것을 내가 전달할 수도 있겠다는 확신도 생겼다. 그리고 감독님을 만나서 얘기를 들어보니 많이 열려 있는 분이라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돌이켜보면 촬영 기간이 6개월 이상으로 조금 길기는 했지만 너무 좋은 시간들이었다. 아직도 감독님이랑 형, 동생 사이로 지낸다.
아역배우
개인적으로 오래전부터 아역배우와 꼭 한번 호흡을 맞춰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뭐랄까, 아이들이랑 함께 작품을 하면 굉장히 기분이 좋을 것 같았다. 아이의 순수한 연기에 맞춰 나 자신을 믿고 솔직하게 연기해보고 싶었다. 물론 기본적으로 지키고 준비해야 할 감정선은 있겠지. 하지만 촬영을 해보니 아이와 함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장면을 찍을 때 오는 묘한 느낌이 있더라. 배우가 뭔가를 하지 않고, 카메라 앵글로 감독이 의도하지 않아도, 꼬마 아이와 나 사이에 생겨나는 교감이 있었다. 이 영화에 우연이라도 그런 감정이 묻어나기를 바랐다. 그게 참 쉽지 않은 일이지만.
유일한
이름이 참 재미있는 것 같다. ‘유일한’ 유일한 감독이라고…. 인생 역전의 ‘한방’을 노리는 삼류 뮤지컬 음악감독이다. 처음의 시나리오에는 뚜렷한 색깔이 없는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극을 진행하는 데 소비되는 인물의 느낌도 있었다. 캐릭터를 잡아가는 과정에서 감독님과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시나리오에선 이기적이고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인물이었는데 그런 모습만 보여주면 관객이 반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약간의 ‘허세’를 가미했다. 감정선을 맞추는 게 중요했다. 때로는 허세스럽고, 또 한편으로는 이기적이고 나빠보이는, 그러다가 아이에게 마음을 열게 되면서 따뜻한 면모를 보이기도 하는. 캐릭터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했다.
전문직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드라마 <식객>의 요리사, 영화 <인사동 스캔들>의 복원 전문가처럼 최근 들어 뚜렷하게 직업이 정해져 있는 인물들을 연기했다. 일단 기본적인 도구가 있으니 연기하기가 훨씬 편하다고 봐야지. 이번 영화에서는 음악감독이기 때문에 건반 다루는 법, 악보 그리는 법 등에 익숙해지도록 준비했다. 대단하게 연습한 건 아니고, 영화 보고 티나지 않을 정도로. (웃음)
지대한
대한이는 나보다 1년 전에 먼저 캐스팅됐다. 아역배우가 아니라 평범한 아이였기 때문에 연기와 음악을 1년 동안 혼자 준비해왔는데 그 과정이 참 힘들었을 거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 내가 바랐던 건 영화 속 우리의 만남과 현실의 만남이 차이가 없도록 몰입하는 것이었다. 다른 배우가 들으면 “야, 유치하다. 그렇게 안 하면 못하냐” 할 수도 있겠지만, 난 그렇게 해보고 싶었다. 내가 끌어주면 대한이가 따라오는. 그런데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은 상태였는데 대한이는 이런저런 레슨을 받으며 딱 틀이 잡혀 있는 거다. 그 틀을 깨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시나리오의 흐름에 촬영 순서도 얼마간 맞춰졌기 때문에 영화 초반부엔 나와 대한이의 어색한 첫 만남이 그대로 화면에 담겼다. 재밌는 건 중반부 들어 유일한은 아직 영광이(지대한)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고, 좋게 대하면 안되는데 현장에서 이미 대한이에게 내가 마음을 줬기 때문에 계획보다 마음이 빠르게 열린 느낌이 영화에 살짝 반영되었다는 거다. 촬영하면서 그런 점이 좀 흥미로웠다.
<빌리 엘리어트>
우리 영화를 두고 <빌리 엘리어트> 얘기를 많이 하는데, 나는 진심으로 대한이가 빌리보다 잘했다고 생각한다. 감독님이 레퍼런스 영화로 추천해서 촬영이 끝나고 한번 봤는데, 영화에서 배우가 너무 연습한 동선으로 움직이는 게 보이더라. 토스트 받아서 한 바퀴 돌고, 다시 와서 계란 받아가다가 떨어뜨리고…. 그건 연습에 의한 ‘연기’다. 그런데 <마이 리틀 히어로>의 영광이는 안 그랬다. 대한이가 정말 부러웠던 게 아무런 부담이 없었다. 그냥 촬영하면 현장에 가서 부딪히면 된다. 그런데 나는 직업배우이기 때문에 생기는 불안감이 있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하려고 준비 안 하고 가면 또 그게 불안해서 연기가 잘 안 나오는 거다. 31년 동안 살아오면서 ‘나’가 형성된 것 같다. 배우들이 매번 역할마다 새옷으로 갈아입는다고 하지만 그래도 내 모습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대한이는 정말 깨끗한 상태에서 순수하게 무엇이든 받아들이는 느낌이 드니까. 뭐랄까, 내가 도움을 받는 점도 많았다.
30대
어떤 장르, 어떤 느낌의 영화이건 간에 나만의 방식으로 할 수 있는 영화를 만나고 싶다. 그게 확실히 무거운 느낌의 것은 아닌 것 같다.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두운 부분을 경쾌하고 밝게 풀어갈 수 있는 작품이면 좋겠다. 지독한 비운의 인생을 살아가는 인물을 표현하기보다는 즐거움과 감동을 줄 수 있는 영화에 끌리나보다. 내가 좋아하는 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처럼, 관객을 많이 웃고 많이 울게 해드리고 싶다. 이게 딱 정확한 표현인 것 같다. 앞에서 했던 많은 이야기들을 다 미뤄두고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