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막을 걷고 방으로 들어서면 오로지 한명의 관객을 위해 새만금 방조제로부터 ‘분재’(盆栽)된 6분47초의 일몰이 시작된다. 장민승과 정재일의 <더 모먼트>(the moments) 전시 중 <suns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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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을 보지 않은 터라, <레미제라블>에 관한 나의 기억은 빅토르 위고의 소설과 앞서 읽은 아동용 축약본에 한정돼 있다. 문호 위고는 어린이의 조그만 머리를 각종 의구심으로 괴롭혔으니, 우선 고작 빵 한 덩이를 훔친 죄로 19년을 감옥살이시키는 법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그냥 빵이었으니 망정이지 생크림 케이크(당시 베이커리의 최고봉)라도 훔쳤으면 어쩔 뻔했어! 다음으로는 ‘도대체 프랑스라는 나라엔 경찰관이 자베르 경사밖에 없나?’ 의아했다. 포털 사이트가 있는 시대였다면 분명 내공 드리겠다고 자판 두드리고 있었을 거다. 한뼘 자라서는 자베르가 장발장한테 뭐가 됐든 특별한 감정을 가졌을 거라고 믿었다. <레미제라블>을 보는 동안 이따금 영화와 무관한 웃음을 지은 건 그런 추억들이 부스럭부스럭 일어나서였는데 사실 158분의 러닝타임이 연출의 밀도에 비추어 잡념을 충분히 수용할 만큼 길기도 했다. 연극 무대를 고스란히 필름에 담은 초기영화를 ‘통조림된 연극’(canned play)이라고 불렀던 관행을 상기하면 <레미제라블>은 영락없이 캔에 담긴 뮤지컬이다. 사상 최초는 아니지만 <레미제라블>은 배우들이 인이어를 착용하고 촬영현장에서 노래를 동시녹음하는 방식을 택했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몰라도 대사의 95% 이상이 노래와 레시타티브(음악에 맞춰 읊듯 말하기)로 이뤄진 이 작품이 모든 노래를 후시녹음했다면 영화 전체가 박제처럼 보였을 거다. 본편 시사 앞에 상영된 메이킹 다큐멘터리를 보며 “오직 연기만 신경쓸 수 있었다”, “내가 바로 음악이 되었다”라고 감격하는 배우들의 진술에 고무됐던 나는 그러나, 영화가 진행될수록 이 실험의 이면은 배우랑 관객이 연기에도 가창에도 제대로 집중 못하는 사태가 아닐까 하는 삐딱한 생각에 젖었다.
영화 <레미제라블>의 최대 업적은 블록버스터 뮤지컬을 더 많은 관객이 덜한 부담으로 즐길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톰 후퍼 감독의 영화는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혜택을 입었으나 <레미제라블>의 세계에 뭔가를 보태진 못한다. 톰 후퍼의 연출은 고풍스런 건물, 헬기 촬영 등으로 영화만 누리는 로케이션과 시점의 자유로움을 짐짓 강조하지만 정작 인물의 이동은 생략되기 일쑤이고 극중 장소들을 잇는 선은 거의 지워져 있어서 모처럼의 실제 배경은 호화판 무대 장치를 넘어서는 동력을 드라마에 더하지 못한다. 특히 1832년 바리케이드 봉기 클라이맥스의 단조로운 공간 연출은 맥이 빠진다. 다리미 모양의 건물 외관이 비슷해서였을까? 나쁜 의미에서 ‘연극 세트 같은’ 바리케이드 시퀀스를 보며 미타니 고키 감독의 <매직아워>를 떠올렸다. 미타니 고키는 에필로그에 이르러 여태 당신이 본 세계는 사실 세트였다고 윙크를 하며 무대를 철거한다. 단, <매직아워>에서는 현실 세계와 세트의 닮음 자체가 주제의 일부였다. 각색은 질적 전화(轉化)인데, 장르 불문 원작의 브랜드 가치에 목숨 거는 최근 할리우드영화들은 알려진 내용의 ‘양’(量)을 영화의 기계장치를 써서 어떡하면 더 떡 벌어지고 요란하게 증폭할까에 골몰한다. 영화가 무슨 앰프도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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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실컷 쳐다보다 왔다. 영화음악그룹 복숭아 프레센트 일원으로도 활동한 아티스트 장민승과 음악가 정재일. 두 사람은 각각 15살과 10살이 되던 해 월간 <핫뮤직> 밴드 구인란을 통해 엮인 이래 징한 연을 이어온 친구이며 혼합 미디어 프로젝트를 공동창작하는 파트너다. 그들의 세 번째 전시 <더 모먼트>(the moments)는, 장이 촬영한 바다- 배도 고래도 없는- 사진과 영상에 정의 음악이 결합하고 다시 거기에 동기화된 조명으로 구성된 세개의 공간 혹은 무드다. 표제작 <the moments>는 서귀포 바다를 한 테이크로 촬영한 6분49초의 영상이 반복되는 루프인데 영상이 한 바퀴 돌 때마다 미세하게 주기가 어긋나는 음악의 품새가 행성을 공전하는 위성의 행로 같다. 갤러리 1층 벽 전면에 영사된 이 작품은 진짜 바다가 그러하듯 인공조명이 없다. 관람객 역시 진짜 해변을 찾았을 때처럼 혼자, 때로는 생면부지 타인인 다른 방문자와 나란히 앉아 머물고 싶은 만큼 수평선을 쳐다본다. 자연광이 조명이니 하루 중 어느 시각 전시장을 찾았느냐에 따라 다른 바다를 보는 셈인데 내 몫은 흐린 겨울날 오후 2시의 빛이었다. 흐느끼다 분노하고 분열하며 실컷 허튼짓을 한 다음 제자리로 잦아드는 물의 요동을 하염없이 보고 있자니 내가 바다인지 바다가 나인지 몽롱해지면서 영상에 있지도 않은 서사가 심중에 멋대로 돋아난다(나는 종종 드럼세탁기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 자맥질하는 빨래를 쳐다보곤 하는데 아우라는 딴판이지만 심리적으로는 비슷한 경험이다).
밀폐된 방에 설치된 나머지 두 작품은 프로그래밍된 조명으로 단 한 사람을 위한 일출과 일몰의 바다 풍경을 제공한다. 깜깜한 전시실에 들어서면 유일하게 보이는 공중에 걸린 헤드폰이 당신을 유인하고 거기 흐르는 음악에 귀를 맡기는 순간부터 스며들고 다시 사위는 인공의 빛에 의해, 벽에 걸린 바다 사진은 새벽 혹은 해질녘의 해변으로 화한다(수평선으로 양분된 이 흑백 사진들은 명도만 남은 마크 로스코의 추상화와 유사하다). 정지한 이미지에 조명과 소리로 시간의 환영을 입히는 이 작품들은 사진을 위한 사운드트랙이라 해도 좋고 음악에 붙여진 움직이는 일러스트레이션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으며 급기야 미분된 영화처럼 보인다. 물론 엄밀히는 영화가 아니고 영화의 관념이라 해야 옳겠다. 언젠가 피카소의 <게르니카> 화면에 카메라를 유영시키며 스토리를 짓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이 경우는 카메라가 우리의 눈을 대신하는 보통 영화의 체제를 뒤집어 눈이 카메라를 대체하는 셈이다. <더 모먼트>가 던지는 여러 가지 무언의 제안 중 내가 접수한 한 가지는 다음과 같다. 영화란 결국 당신의 머릿속에서 상영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12/25
크리스마스에 뭐했냐고 물어올 누군가에게 “크리스마스라 큰맘먹고 영화를 보러 갔다”고 대꾸하면 웃어주려나 실없는 궁리를 하며 알랭 레네의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의 마지막 상영을 놓치지 않기 위해 광화문으로 향했다.
죽은 극작가의 유언에 의해 고인의 연극 <에우리디케>에 출연했던 13인의 배우가 외딴 저택에 초대된다. 알랭 레네 감독의 단골 배우를 포함한 이 일군의 프랑스 연기자들은 극중에서 실제 이름으로 불린다. 설정만 놓고 보면 흡사 애거사 크리스티의 <열개의 인디언 인형>이지만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에서는 크리스티의 산장에서처럼 등장인물이 하나씩 제거되기는커녕 픽션과 연기, 그리고 예술의 마법을 빌려 2배수, 3배수로 증식되는 희한한 광경이 펼쳐진다. 어떻게? 망자의 청에 따라 젊은 극단이 새롭게 해석한 <에우리디케>의 녹화 영상을 관람하던 배우들은 자발적으로 예전 배역을 라이브로 ‘더빙’하기 시작한다. 화면 속 젊은 연기자에게 리액션하더니 과거 공연했던 파트너와 주고받고 마침내 대도구와 무대장치, 연극 관객이 무대 주변에 상상했을 리얼한 세상까지 소환된다. 말하자면 우리는 한때 자기가 참여했던 연극의 다른 판본을 찍은 영화를 보는 배우 역으로 분한 배우들을 보는 것이다. 아, 이 꽃다발 같은 괄호들의 중첩. 여기서 13인의 배우는 옛 작업을 회상하는 동시에 지금은 사라진 무엇을 상상하는 중이다. 현재의 나이든 육신에 젊었던 시절의 영혼을 씌워 움직이고 다시 서로 부딪혀 하나의 차원을 형성한다. 애초의 그들이 A라면 이렇게 회상/상상을 통해 생성된 배우군은 A′이고 A′는 다시 <에우리디케> 속 각자의 배역 속으로 들어가 A″가 된다. 무엇보다 기이한 일은 늙은 모습 그대로인 배우들이 연기하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가 속삭이는 매우 고답적인 문어체의 대사가 어느 순간부터 실험적 형식으로서가 아니라, 그 내용으로 우리에게 슬픈 멜로드라마의 정념을 부른다는 점이다. 보수적인 관객이라면 노장이 만들어낸 이 정교한 차이니스 박스로부터 “퍼포먼스 캡처? 3D? 영화와 우리의 뇌는 이미 필요한 걸 다 갖고 있지 않은가?”라는 환청을 들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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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한테 못해준 이야기가 내겐 아직 많아”
“사랑해”라는 대사에 인색한 사랑영화들이 있다. 이런 영화를 보는 재미 중 하나는 사랑의 선언을 대신하는 말이나 행위 한 조각을 찾아내는 일이다. 미하엘 하네케의 <아무르>에서 그것은 조르주가 곧 지력을 잃어갈 아내에게 소년 시절 영화를 보고 울음을 터뜨려버린 날의 기억을 들려주며 덧붙이는 “당신한테 못해준 이야기가 내겐 아직 많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