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김태연(25)은 들떠 있었다. <거짓말>로 베니스 티켓을 거머쥐고서, 힘들게 찍은 만큼 보답을 받나 싶었다. 그의 말대로 “차도 생겼고, 이름도 알렸다.” 한계를 느끼던 모델로서의 주가 또한 높아졌다. 순식간에 흘러간 2년이었다. 그러다 <그녀에게 잠들다>의 수빈을 만났다. “배우로서 인정받아야겠다”는 오기가 솟았다. 미국의 포드사에서 주최한 한 모델 컨테스트에서 수상, 해외연수 기회가 있었지만 미련없이 포기했다. 데뷔작에서 자신이 흘렸던 눈물에 대해, 이제는 정당한 평가를 받을 때라고 생각했다. 가십거리로 다뤄지긴 싫었다. “전체 극을 끌어가야 하는 역할이라 부담도 컸지만”, <거짓말>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 “자신이 배우의 길을 묵묵히 걷고 있음”을 일러주고 싶었다. 지난해 여름, 김태연이 제주도행을 기꺼이 택한 이유였다.
제주도가 달콤한 것만은 아니었다. 팔과 등에 2도 화상을 입어 두달 동안 입원해야 했다. “짓무른 살 한꺼풀을 단번에 사포질당했다”는 말을 엄살이라고 하기엔 그의 두팔은 울긋불긋한 반점들로 뒤덮여, 보기에도 아려보였다. 지연된 만큼 나머지 일정이 강행군으로 치러진 것도 힘들었다. “참는 것 하나는 자신있었다”는 그녀도 한번은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쏟아놓았다. “울고, 신경질 부리고, 건드리면 소리치고… 그랬어요.” 바닷가 폐선에 버려진 한 여자와 한 남자, 상대에 대한 집착과 연민으로 생을 다독이는 두 남녀의 사랑. <그녀에게 잠들다>에 빠져들면서 수빈의 앙상한 가슴은 그의 포근한 안식처가 됐다. “그게 세상이라면서요?” 두편의 영화를 마치고 난 김태연이 대뜸 묻는다. “강한 사람 앞에서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척해야 하는 것 말이에요.” 그렇다면 김태연의 목표는 정상에 있는 걸까. “그래도 최고가 되겠다는 생각은 안 해요. 한계도 있을 것이고. 더이상 욕심은 안 부릴 거예요.” 신이 있다면 모를까,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것은 싫다는 그는 혼자 부딪히고 깨지고 구르다 보면 어딘가에 다다를 것이라고 조심스레 목표를 가늠한다.
유년의 한 장면
릴 적, 참새 목에 실을 매달고 동생과 함께 동네를 산책하던 장면이 떠오르네요. 그게 무슨 해괴한 짓이냐구요. 동생이 유별났던데다, 우리 동네 유행이었어요. (웃음)
자유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 외국 배우들은 인터뷰하는 것만 봐도 모든 게 자유롭게 보이는데. 그런데 우린 다르잖아요. 사람들은 배우가 착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표본을 제시하니까. 그건 자유로워야 할 배우의 사고 자체를 위축시키죠. 숨막힐 정도로 답답해요. 나쁜 짓을 골라하는 것만 아니라면 배우를 제멋대로 풀어놓을 필요가 있어요.
징크스
매번 다쳐요. <거짓말> 찍을 때도 여관에서 잠결에 전화받다 나무탁자에 턱을 찧어 꿰맸는데. 이번에는 화상까지. 모델 쇼 하다가는 다리에 흉터가 남았고. 몸 건강한 게 가장 행복한 것 같네요. 더이상 다칠 데도 없을 정도가 되니. 이러다 ‘병원24시’에 출연하는 처지가 되는 건 아닌지. 굿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