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전영객잔]
[신 전영객잔] 기다림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은
2013-01-24
글 : 남다은 (영화평론가)
<레미제라블> 속 혁명과 사랑, 그리고 지금 여기 우리의 마음

설마 했으나 그것이 현실이 되었다. 절망과 분노,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의 말들이 난무했고, 그 어느 쪽에라도 마음을 두고 싶었으나 모든 것들이 껍데기 같았다. 슬프고 억울했으나, 실은 무엇에 슬프고 억울한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 그러나 이상하게도 자꾸만 몸으로 돌아오는 반응에 몸서리치다가 그 끝에 지독한 호들갑과 자기 연민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은 알게 되었다. 지금 내 앞의 믿을 수 없는 현실보다, 실은 그 호들갑과 자기 연민이 어느새 더 끔찍해졌다. 수많은 말들에 또 다른 말을 끼워넣을 자격이 내게 있는지, 아무래도 주제넘은 글이 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을 안고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쓰기로 한다. 객잔의 일원으로 다시 돌아오면서 다시 자유롭게 여기서 놀기 위해서는 한번 쯤은 이런 글을 써야 할 것 같다고 변명한다. 그러니 이 글은 2012년 12월 선거 이후, 어느 영화를 보며 느낀 상념들을 쓴 글이 되겠지만, 영화평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며, 무엇보다 사심 가득하고 이곳저곳을 생각나는 대로 돌아다니는 산만한 글이 될 것이다. 불편하신 분들은 기꺼이 이 지면을 넘기시기를.

2012년 12월22일, <레미제라블>을 보았다. 19일의 선거만 아니었다면, 이 영화에 대해 쓰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유는 많다. 감독의 전작을 보고 다음 작품을 뭉뚱그려서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는 알고 있지만, 나는 감독 톰 후퍼의 <킹스 스피치>에 도무지 동의할 수 없는 소수의 사람들 중 하나다. 이 자리에서 길게 논할 일은 아니므로 간단히 비판하자면, 연설 불능인 왕이 얼마나 완성된 발음으로 연설을 완벽히 마치는지에 골몰하는 영화는 그 연설문이 2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참전 결정을 선포하는 내용이라는 점을 망각하고 있거나 망각해도 된다고 여기는 것 같다. 국민의 목숨이 걸린 전쟁을 선포하는 장면들이 이토록 성취감, 만족스러움, 대견함과 같은 자아도취의 향연으로 연결되어도 괜찮다고 넘기는 감독의 태도가 나는 의심스러웠고, 그런 의미에서 그가 <레미제라블>에서 민중봉기를 다룬다 해도 정치적으로 전복적인 의중이 담겨 있을 거라고 믿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일종의 판타지로 영화 안에서 기능할 것이라고 마음대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영화를 본 다음에도 그 생각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또 다른 이유는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이므로, 양해를 구하고 말하자면, 나는 이상하게도 뮤지컬영화에 별다른 감흥을 얻지 못하는 편이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에서 험버트 험버트가 뮤지컬에 대해 내린 정의(“죽음과 진실이 금지되어 있고, 본질적으로 근심이 스며들 여지가 없는 존재영역”)에 나는 공감한다. 혹은 그 세계는 “믿기지 않는 에너지, 결코 고갈되지 않는 풍부함, 그리고 유토피아적 공동체에 의해 특징지어”(<자기반영의 영화와 문학>)진다는 설명에 동의한다. 그러니까 아무리 슬픔과 고통의 심정을 노래해도 거기에는 슬픔과 고통으로 부서지는 허약한 틈이 아닌, 슬픔과 고통의 요약이 압축되어 있다고 느낀다. 혹은 그때 음악은 인물과 나, 그의 세계와 나의 세계 사이를 오가는 것 같지만, 실은 둘 사이를 가로막으며 서로가 서로로부터 상처입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투명한 유리막 같다고 느낀다. 감정의 변죽은 울리지만, 찌르는 데까지 이르는 뮤지컬을, 혹은 뮤지컬영화를 무지한 나로서는 아직 경험한 적이 없다. <레미제라블>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뮤지컬 공연과 뮤지컬‘영화’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이 영화는 눈을 잡아채는 몇몇 스펙터클(이를테면 사창가에서 말라비틀어진 판틴이 <I dreamed a dream>을 부르는 압도적인 장면. 그러나 이는 엄밀히 말해서 앤 해서웨이라는 배우의 공적이 아닐까)을 전시하지만, <레미제라블>은 영화적인 측면에서나 서사적인 측면에서 훌륭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영화다. 그걸 여기서 하나하나 지적하는 건 지루한 과정이 되거나 별 의미가 없거나 어쨌든 지금 나의 관심사는 아니다.

사랑을 기꺼이 인정하는 혁명을!

서설이 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미제라블>을 이 자리에 불러오고 싶었던 이유를 말해야 할 것이다.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고백하듯이, <레미제라블>에 등장하는 항쟁의 장면들과 그것의 처참한 실패,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울려퍼지는 “민중의 노랫소리가 들리는가?”라는 간절한 함성, 그리고 피 흘리며 죽어간 자들이 결국은 환상일지라도 붉은 깃발 아래 봉기하는 스펙터클의 해방감은 그 도저한 감상주의에 아무리 저항하려 해도 이성을 잃어버린 우리의 마음을 자극한다. 하지만 극장 밖으로 나와서도 이 영화를 우리가 처한 현실과 동일시한 다음, 우리의 상처 입은 순수함과 치유와 희망에 대해 말하며, 마치 씻김굿을 하듯이 구는 건 어쩐지 과잉된 자기도취 같다. 우리가 마주한 현실이 아무리 납득하기 어렵다고 해도, 우리는 무장으로 진압당한 것이 아니라, 민주적인 절차로 반민주주의의 상징을 뽑은 것이다. 슬프고 치욕스러운 건 ‘저들’이 아니라, 저들이 이렇게 귀환할 줄 몰랐다는 듯이 애통해하는, 치열하지 못한 ‘우리’가 아닌가.

내가 이 영화에서 상념에 잠긴 지점은 정작 따로 있다. 혁명을 도모하기 전날 밤, 어느 다락방에 모여 결의의 노래, <레드 앤드 블랙>을 부르는 젊은 동지들 사이로 마리우스(에디 레드메인)가 등장한다. 마리우스는 방금 전 우연히 거리에서 마주친 코제트(아만다 시프리드)에게 한눈에 사랑에 빠져 그 감흥에 여전히 취해 있다. 혁명을 꿈꾸며 결기에 차 있던 그의 얼굴은 어느새 사랑의 달콤함으로 녹아 있다. 흥미로운 건 바로 이 부분부터다. 동지들이 부르는 노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레드, 분노한 이들의 피/ 블랙, 지나간 과거의 어둠/ 레드, 동이 트려는 세상/ 블랙, 결국 저물 밤.” 마리우스가 동지들의 노래를 이어간다. “레드, 불타오르는 내 영혼의 느낌/ 블랙, 그녀가 없는 나의 세상/ 레드, 욕망의 색/ 블랙, 절망의 색.” 말하자면 마리우스는 혁명의 노래를 바로 그 자리에서 사랑의 노래로 바꿔 부르고 있는 중이다. 그때 동지들 중 한명이 마리우스를 꾸짖는데 대강의 내용은 이렇다. “그러나 지금은 더 고귀한 요구가 있지/ 누가 너의 외로운 영혼 따위에 관심이 있나/ 우리는 더 큰 목표를 향해 싸운다/ 우리의 사사로운 생은 중요하지 않지.” 혁명의 노래와 사랑의 노래, 대의와 사적인 욕망, 그러니까 여기, 세상을 바라보는 두개의 다른 시선이 충돌한다. 전자의 도덕과 윤리가 후자의 감정과 욕망을 주눅들게 한다. 그러니 두 세계는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가치의 위계로 벌어진 이 화해 불가능한 거리, 하나의 희생으로 다른 하나가 존립할 수밖에 없다는 믿음은 우리를 억압하고 슬프게 한다. 하지만 이렇게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둘은 과연 다른 세계인가. 혁명의 노래와 사랑의 노래가 위의 장면에서 동일한 곡조와 리듬 안에서 불릴 때, 그들 각각의 레드와 블랙은 같은 곳을 보고 있거나, 혁명과 사랑은 서로를 바라보는 거울 같다(양쪽의 가사를 바꿔 불러보아도 별 문제가 없어 보이지 않는가). 그러니 혁명의 노래와 사랑의 노래는 결국은 얼마나 같은가. 그 일치, 그 확장은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공과 사, 선(先)과 후(後), 역사와 개인사, 의식과 욕망, 이데올로기와 비이데올로기 등을 나누는 경계, 차이, 위계가 무너져내릴 때, 그 각각을 공고히 규정하는 틀들이 사라져버릴 때, 그 가치들의 혼란 앞에서, 불행한 시대를 사는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까. 외부에서 선택의 기준을 찾을 수 없다면, 우리는 무엇에 기대어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을까. 이 상투적인 장면에 만약 급진성이라는 것이 하나라도 있다면, 그건 바로 이러한 두려움과 질문 앞에 우리를 서게 한다는 데 있을 것이다.

이 장면에 대해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영화는 혁명의 처절한 실패를 지나, 홀로 살아남은 마리우스의 죄의식과 고통의 노래에 이르고 있었다. 동지들은 모두 무참하게 살해되었고 마리우스만이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그가 죽은 동지들을 떠올리며 목 놓아 슬픔의 노래를 부르는 그 짧은 순간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는 코제트와 재회하고 그의 노래는 금세 사랑의 세레나데로 전환한다. 급기야 그는 자신이 혁명을 꿈꾸는 동안 멀리하던 부르주아 가족의 품으로 돌아와 코제트와 화려한 결혼식을 올린다. 비겁한 배신자, 얼치기 혁명가.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저 수많은 죽음들 앞에서 사랑이라는 사치를 부리다니. 사랑이 혁명을 체념하고 압도하게 하다니. 그들을 따라 자결하지는 못할망정 행복을 꿈꾸다니. 혁명의 실패가 사랑의 성공으로 이어지던 그 순간, 어떤 죄의식의 그림자도 없이 두 연인의 표정이 환하게 빛나는 그 순간에 나는 내 가치의 저울 한쪽에 혁명을, 다른 한쪽에 사랑을 올려놓고 영화가 전자의 진중함 대신 후자의 낭만으로 기울었다는 사실에 화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잠깐. 역사와 서사의 구멍을 사랑으로 봉합하는 이 영화의 허술함을 탓하기 이전에, 이내 나는 영화의 태도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섬뜩해지고 말았다. 세상에, ‘사랑이라는 사치’라는 표현이라니. ‘자결하지 못할망정 행복을 꿈꾸다’라는 말이라니. 이 시퀀스에서 무의식적으로 내가 기댄 것이 가치의 위계 혹은 무거운 시대와 가벼운 사랑이라는 상투적이고 억압적인 구도가 아니라면 다른 무엇이었겠는가. 마치 잠에서 깨듯, 소스라치게 그걸 깨달은 순간, 이상하게도 문득 오래전 읽었던 소설의 구절이 생각이 났다.

다자이 오사무의 단편 중에 <오상>이라는 소설이 있다. 화자인 아내의 고백으로 진행되는 이 소설에서 그녀의 남편은 전쟁 뒤 실업자가 된 전직 저널리스트이자, 허약하고 무능력하기 짝이 없는 지식인의 전형이다. 어느 날 그가 도망치듯 집을 떠나고 며칠 뒤, 아내는 신문을 통해 남편이 어느 여인과 동반자살을 했다는 소식을 읽는다. 그가 남긴 유서에는 “사람들에게 혁명이며 파괴를 부추기면서 자신은 언제나 그곳에서 쏙 빠져나와 땀을 닦는” 저널리스트로서의 자기혐오를 견디다 못해 스스로 “혁명가의 십자가”에 오르겠다는, 그야말로 유약하고 한심한 내용이 담겨 있다. 그의 유골을 가지러 가는 기차에서 아내는 마침내 이렇게 중얼거린다. “혁명은 사람이 편하게 살기 위해 일으키는 것입니다. 비장한 얼굴을 한 혁명가를 저는 신용하지 않습니다. 남편은 어째서 그 여자를 좀더 당당하고 즐겁게 사랑하고, 아내인 저까지 즐겁게 사랑할 수 없었던 걸까요?… 마음을 가볍게 확 바꾸는 것이 진짜 혁명이며,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아무런 어려움도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아내에 대한 마음 하나 바꾸지 못하다니, 혁명의 십자가도 참으로 어처구니없구나!”

왜 그 순간 이 소설의 이 마지막 구절이 떠올랐을까. 우리의 현실에서 낭만과 감상의 외피를 두른 것은 실은 사랑이라는 구체가 아니라 오히려 혁명이라는 추상임을 이 소설이 깨우쳐주던 순간이 기억나서였을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다면, 나는 남편이 호소하는 혁명보다 아내가 읊조리는 혁명을, 그러니까 사랑마저 포괄하는, 혹은 사랑보다 위대한, 혹은 이 사랑을 연대라는 고귀한 가치로 승화하는 혁명이 아니라, 통념으로는 결코 이해될 수 없으나 지금 바로 여기서 만질 수 있는 사랑을 기꺼이 인정하는 혁명을 지지한다. 신념을 지키고 관철시키는 혁명은 감히 나의 것이 아니나, 즐겁게 마음을 확 바꾸는 혁명은 나의 것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문학평론가 황현산은 예술이란 “현실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동시에 현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게 해주는 어떤 힘”(<문예중앙>, 2011, 가을)이라고 말했다. 그 정의를 떠올릴 때마다 언제나 감동을 받는 나는, 그 말이 예술뿐만 아니라 사랑에도, 내가 잘 알지 못하는 혁명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이 혁명이 아니라면, 혁명이 예술이 아니라면, 예술이 사랑이 아니라면, 다른 무엇이겠는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일관되지 않은 방향으로 글이 흘러온 것 같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민망함을 무릅쓰고 조금 더 쓰고 싶다. 대선이 지나고, <레미제라블>을 본 뒤, 이상한 경로로 사랑과 혁명에 대해 생각하며, 오랜만에 뒤적이던 시집에서 오래된 시 한편을 예전과는 다른 감흥으로 읽었다. 그리고 나는 지난 몇주간 허우적거렸던 상처의 호들갑을 그만둘 때가 왔음을 느꼈다. 그 시를 나누고자 한다.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이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2012년의 끝자락, 이 시는 내게 이렇게 다가왔다. 언제나 너를 기다리고 있지만, 기다리던 너는 단 한번도 온 적이 없다. 왔다고 믿은 순간, 거의 언제나 너는 이미 네가 아니었다. 사랑에도, 혁명에도 완결된 의미에서의 성공 혹은 실패는 없고 오직 기다림이 있을 뿐이다. 기다리는 동안 지금 내 앞에 있는 너의 신기루와, 미래에 올 너라는 환상과 대면하며 싸우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 너의 진위를 골몰하는 대신, 기다림 그 자체를 멈추지 않는 것, 무엇보다 춤추고 사랑하고, 또 춤추고 사랑하며 즐겁게 버티는 것, 나의 놀이를 불경하다고 비난하는 자들의 엄숙함에 더 자유롭고 더 불경한 놀이로 맞서는 것, 그리하여 너를 기다리는 동안 결국은 천천히 ‘내가 너에게 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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