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인터뷰에 응해주신 한 감독님께 선물받았던 10년 다이어리. 용도가 다했으려니 막연히 체념하고 있었는데 막상 펼쳐보니 4년이나 남아 있다. 진즉 성실했다면 365일이 ‘원데이’가 될 수도 있었는데.
1/1
‘Day 1’에 <원데이>를 보러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성싶었다. 새벽 5시부터 날리기 시작한 눈을 맞으며 동트기 전 집을 나섰다. 정결히 쌓인 첫눈에 두줄의 점선이 찍혔다. 새해에도 여전히 비뚤고 서툰 나의 궤적. 눈발이 멎지 않았기에 나 다음 이 길을 걸을 누군가도 천진하게 처음의 기쁨을 누릴 거라는 사실이 더 흐뭇했다. 4시에 출근하셨다는 택시기사 아저씨에게 날이 험해 일찍 퇴근하셔야겠다고 참견했더니 “그럼 손님처럼 택시 필요한 사람들은 어쩌고요”라고 웃어넘기고 “시베리아 사는 사람들에 비하면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죠”라고 덧붙이신다. 그냥 수사인 줄만 알았더니 여행을 다녀오셨단다. 바이칼 호수 깊이가 1740m인 거 알아요? 호수로 흘러들어가는 물은 서른 줄기가 넘는데 나가는 물길은 앙가라강 하나야. 믿겨요? 26인승 비행기를 타고 이르쿠츠크를 가는데 거기서 추락해도 숲이 하도 깊어 잔해를 못 찾는다고 해요. 이야기를 듣는 동안 차창 밖 서울 거리의 어둠은 흑림이 되었다. 내 부모님이 홋카이도 여행을 다녀와 곰들의 사연과 아이누족 이야기를 삼십분 가까이 흥겹게 들려주시던 일이 떠올랐다. 노년에 이르러 다른 나라를 여행할 여유를 얻은 어르신들이 돌아와서 관광 가이드의 설명을 되풀이할 때면 세부의 명징함에 놀라곤 한다. 내 귀로 직접 들으면 틀에 박힌 심상한 정보에 불과한데, 모처럼 시야에 들어찬 이방의 풍경에 와락 흔들렸던 어르신들의 마음에 한번 괴었다가 다시 흘러나오는 ‘관광 정보’는 무슨 조홧속인지 문학이 되어버린다.
꽁꽁 싸매고 쇼핑몰 엘리베이터에 오른 승객들은 모두 극장행이었다. 오전 7시20분. 평소라면 단지 영화 보러온 사람들에게 적절한 질문이 아니지만, 때가 때이니만큼 “다들 무슨 사연이신지?”라고 묻고 싶은 충동이 일어 애먹었다. 하긴 그렇게 치면 정초 댓바람부터 보온병과 막대사탕, 수첩과 펜을 끌어안고 영화관에서 혼자 신나게 웃다가 훌쩍이다 분망한 여자가 제일 괴상해 보였을 테지. 신년 해돋이를 극장의 암흑 속에서 맞이하는 걸 연례행사로 정해볼까? 한해의 마지막 어둠과 최초의 빛 사이에 영화로 날짜변경선을 긋는 거다. 정동진행 기차를 타는 것보다야 훨씬 덜 수고로우니 게으름뱅이도 시도해볼 만한 세리머니다.
1/2
<원데이>의 엠마(앤 해서웨이)는 영화가 종반에 이르도록 사랑하는 덱스터(짐 스터지스)에게 충실한 친구 노릇을 한다. 자연 둘이 만날 때마다 덱스터는 엠마의 소망보다 늘 조금 일찍 그녀를 떠난다. 그 ‘조금’이 쓰라리다. 어느 해 여름 “너한테 꽂혔다”는 덱스터의 돌발 발언에 심장이 두방망이질쳤던 엠마는 “문제는 아무한테나 꽂힌다는 거지”라는 맥 빠지는 말이 뒤미처 날아오자 장난인 척 남자의 머리를 헤엄치던 강물에 처박아버린다. 그때 수면 위에서 무너져 내리는- 덱스터는 보지 못하고 관객만 보는- 엠마의 얼굴이 <원데이>의 뇌관이다. 엠마가 사랑을 이슈화하지 않는 것은 덱스터가 겁먹고 떠나버릴까봐 두려워서만은 아니다. 작가(지망생)인 엠마는 어떤 시(詩)도 억지로 쓰이지 않는다는 걸 잘 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박자에 맞춰, 스텝을 헝클지 않고 가능한 한 오랫동안 춤을 추는 데에 만족한다. 십수년에 걸친 사랑의 연대기인 <라잇 온 미>와 <원데이>는,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애인과 친구의 곁을 지킨다는 맹세의 진의가 무엇인지 보여준다는 공통점이 있다. 곤경을 함께한다는 말을 우리는 흔히 상대가 연약해지고 불운한 처지에 빠져도 도망치지 않고 어깨를 감싸주는 행위라고 여긴다. 그러나 <원데이>와 <라잇 온 미>에서 보듯, 나쁜 상황이란 당사자와 분리된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에서 ‘나쁠 때’란 내게 소중한 그 사람이 나빠진다는 걸 의미한다. 내게 각별한 신뢰를 표하며 솔직히 기대오긴커녕, 자기 문제가 뭔지 설명하는 문장을 제대로 마무리짓지 못할 만큼 망가지고 못난 행동으로 실망과 권태를 주고, 무엇보다 내가 그에게 귀한 존재임을 확인해줄 여유 따위는 없다는 의미다. 그러니 어찌 보면 우리는 대담하게도, 우리가 전혀 모르는 사람에 대한 우정과 사랑을 미리 서약하는 것이다.
유용한 몇 가지 교훈에도 불구하고 <원데이>가 론 셰르픽 감독(<초급 이태리어 강습> <언 에듀케이션>)의 실패작으로 기록될 수밖에 없는 최대 사유는 구조의 정당성을 입증하지 못해서다. <원데이>는 2006년의 프롤로그로부터 1988년의 대학 졸업식으로 역행했다가 다시 2009년까지 전진하며 매년 7월15일 엠마와 덱스터에게 일어난 일로 영화를 채웠다. 그러나 각 시퀀스는 7월15일 하루만 도려내서 보여주는 게 아니라 편의적으로 조정된 길이로 그해 둘의 전반적 상황을 보여준다. 구조를 엄격하게 운용하지 않았으니 자연히 날짜 자막이 없다 해도 영화의 해석에 일어날 만한 이렇다 할 변화가 없다. 형식을 위한 형식으로 굴러떨어지는 것이다. <500일의 썸머>와 <원데이>가 가작과 태작으로 갈리는 지점이 여기다. 현실적으로 매년 7월15일마다 두 친구의 관계에 의미심장한 사건이 터질 리 만무하므로, <원데이>는 기념할 만한 7월15일들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7월15일들을 엮어 하나의 음악을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극적 밀도가 상이한 하루를 영화적으로 동등하게 묘사함으로써 성취할 수 있는 어떤 아름다운 리듬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론 셰르픽은 야심이 없고 <원데이>의 매년 7월15일에는 우리가 기존 연애서사에서 익히 보아온 사건에 해당하는 일들이 꼬박꼬박 일어나 구태여 택한 형식의 의미를 미궁에 빠뜨린다. 여기에 결정타를 먹이는 한수는 둘의 만남 초기에 있었던 로맨틱한 에피소드를 떼어내 영화 결말로 배치한 편집. 행여나 부족할지 모를 관객의 애석한 감정을 확보하기 위한 목표 외에 이유를 찾기 힘든 조작인데 장르영화에서 심심치 않게 보는 이런 식의 구성이 <원데이>에서 유독 마음에 거슬리는 건 스스로 선택한 구조, 즉 시간을 다루는 태도를 배신하는 반칙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1/3
내가 계산적이고 정밀한 영화라고 판단했던 알랭 레네의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를 L선배는 혈액형으로 치면 O형 영화라고 비유하며 ‘A형 영화’ <토리노의 말>과 대조했다. 연출 이외 변수와 우연의 작동에 많은 부분을 개방해놓은 영화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다. 정반대의 결론에 당혹스러워하다가 곰곰 생각해보니 레네가 고안한 것은 모종의 자기장(磁氣場)이 아닌가 싶다. 영화와 연극과 삶, 캐릭터와 배우와 자연인과 유령, 과거와 현재, 살아 있는 자의 불가능한 사랑과 죽음 뒤에야 확정되는 사랑. 감독이 이런 일련의 전극을 심고 도체 울타리를 쳐놓자, 그 안에 투입된 배우와 드라마는 온갖 조합을 이루며 알아서 증식한 것이다. 그러니 선배와 나는 같은 과정의 다른 지점을 본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오늘은 내가 별 감흥을 얻지 못한 <레미제라블>에 관해 H선배가 새로운 견해를 들려주셨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레미제라블>의 시네마틱한 변환은 애당초 톰 후퍼 감독의 목표가 아니었고, 오직 뮤지컬 무대를 스크린에 무손실로 인코딩해 고스란히 옮겨놓는 데에 테크놀로지와 연출, 연기 역량을 집중시킨 결과가 <레미제라블>이라는 해석이었다. 즉, 뮤지컬 장르의 실패가 아니라 최신의 모색이란 말씀. 우리의 잡담은 이는 넓게 보면 비단 <레미제라블>의 특징이 아니라 최근 몇해 동안 중요한 대중영화가 보여주는 경향과 통한다는 이야기로, <호빗: 뜻밖의 여정> 감상으로 이어졌다. 100여년간 영화적 완성도의 지표로 여겨졌던 항목들은 영화를 만드는 이들로부터 의심받고 있다. 이제 영화는 여타 매체와 영상 미디어 사이의 허브, 혹은 콘텐츠의 운송수단(vehicle)으로 자체 용도변경을 감행하고 있는 걸까?
좋아요
돼지와 하마
<라이프 오브 파이>의 타이틀 시퀀스에는 종이 다른 두 동물, 평면인 벽화와 입체인 동물이 주의깊게 배치(staging)돼 있다. 그중 돼지를 근경에 하마를 원경에 두어, 두 마리가 관객의 눈에 똑같은 크기로 보이게 연출한 착시숏은 리안 감독의 내성적인 조크다. “3D로 찍은 2D 농담인데 알아봤나요? 허허” 아! 영화감독의 유머란….